伝統文化

其王本<百済>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国. 初附庸于<百済>,
<百済>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帰之, 遂致強盛. 因襲<百済>, 附庸於<迦羅国>焉

 

その王は(新羅王は) 本来 ¥”百済¥”人で海で逃げて ¥”新羅¥”に入って行ってその国で王をした.
初めて百済の属国だったが, ¥”百済¥”が ¥”高麗¥”を征伐する時,
残酷な使役を耐えることができなくて, 後に戻って来て剛性するようになった. そんな理由で
¥”百済¥”を攻撃して,(百済の風習に付いて) 伽揶国の属国になった.

 

- 北史 熱戦 82 新羅 -


やはりあまりにも無茶な文章です. 半島の中の新羅だと言う固定観念に捕らわれている私たちはこの当然存在しなければならない記録に対して

 

 

これ私たちの分かる新羅ではないのに百済人が新羅王をした事がなくてそして百済人が新羅を行くのにどうして海に入って行く? そのままどこで変なデマ聞いて無茶な話少ないことではないの?

 

このようなものが仕事であるでしょう

しかし三国史記アシンワング記録に見ればまさしく高句麗戦争の賦役を避けて新羅で離脱した百済勢力の話があります. そしてヤングジック公道には新羅の高麗大学名称 斯羅国が百済のダムロの一つに記録されています. こんな事実に根拠してあのように文章を書いたということはやっぱり当時離縁数は半島の状況に対して私たちよりもっと多い最小限私たち位詳細な
情報を接していたという意味です.

 

それならやっぱり疑わなければならない部分は
私たちが離縁数の語法をまともに理解しているかと言う部分です.

 

http://bluecabin.com.ne.kr/china25/booksa.htm

 

ブックサで一度百済記録を見ます.

ブックサでは旧態だと言う私たちが全然分からない百済人の記録を書きます
大房の高地すなわち今の搖れ地域に百済があると言います. そして当時その地域の権力者公孫島と婚姻同盟を締結します. 児そして私たちが分かる馬韓で出発した半島百済の記録も一緒に竝行して記録します.

 

殖民士官にチォルオイッヌン私たちと違いそんなことと関連がないブックサの著者離縁数にあって百済だと言う国は半島と大陸にかけた国です. したがって半島の百済記録大陸の百済記録をそれぞれ竝行してすべての情報を記録するのが正しいだろう

 

そして新羅.. 新羅は半島に限定された国家が当たりますか?

 

敢えて彌生時代初期の行くと新羅系列の遺物たちが出土される最近の
発掘成果たちを話さないとしても私たちは文献分析だけでも列島の新羅勢力に対して推論することができます

 

ヨンオとセオニョ説話そして列島の新羅百済人が記録したチォンイルチァング説話
両方皆赤い布だと言う metaphorが登場するのに共通的にこれが新羅に移動したと言います. これは列島の新羅半島の新羅説話が後代のそれぞれの政治的状況によって変形されることはしたがその原型は半島新羅と列島新羅住民たちがその内容を共有していたと思いますが

 

雰囲気上では半島新羅と列島新羅勢力間に権力の中心がどっちに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対して葛藤の跡たちの見える説話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どうであれ列島の新羅勢力の存在に対しては特別に疑う理由はなくて
新羅百済人がなぜを大きい国になるようにしただと記録した離縁数も
列島の中に新羅人がいたと認識していましたよって

半島の新羅を基準では到底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いあの記録はやっぱり
列島の新羅に対する記録で見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大陸百済と半島
百済の記録を竝行して記録したように半島新羅と列島新羅にかたよることなしに皆記録したことだと思うべきでしょう

すなわち離縁数が記録した新羅百済が一緒になぜを大きい国で作った. の状況を具体的に説明したのです.

 

其王本<百済>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国.

新羅王は元々百済人だ. 海を通じて新羅に入って行って国と
王を受け継いだ.

 

 

 

ヤングジックゴングドに百済は王の息子と兄弟のような種族を通じてダムロを統治した. したし当時新羅の名前だった 斯羅が百済のダムロに記録されたことで見てあの百済人はやっぱり王族である可能性が高いです.
遂王其国 王と国を受け継いだ.. と一応書いておいたが
解釈はちょっと検討して見るとゲッネです ‾
一応こんなに解釈してニュアンスはこのようです. 百済王族が新羅の治者が
になるのにどんな無力的衝突なしに自然な支配被支配関係が成立された
ようです. ふと日本書紀 神代記で 天孫がここに人が(国が) イッヌンゲロング?
ここに人オブシムドするからなければそのまま私が君たちダスリンダングケロング
する場面が連想になります. 日本人たちは緊張する必要ないです何を
主張するのではなくそのままそれが連想になると言うことだから www
( 全羅道と慶尚道方言に変更したことは少し realityをいかして見ようとするだ )


初附庸于<百済>, <百済>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帰之, 遂致強盛

 

初めには百済の属国だった. 百済が高句麗を征伐する当時その労役を
手におえることができなくて後でお互いに導いて帰って来て遂に剛性することを成した(?)

 

やはり漢文が短い人だからちょっと変に翻訳ができますね
どうであれこれが広開土大王碑文に書かれた 倭 VS 高句麗戦争の実体です
列島の中に百済王を仕えた新羅だってあるいは高句麗立場(入場)では半島南部を
完全に圧したと思ったがふと列島で軍事勢力が登場して
高句麗の心臓部である大房の境界 ( 搖れ地域)までドロブシブを試みた
百済王族を支配者で受け入れて百済の属国になった列島の新羅人なのか
新羅系列 倭人認知する種族は初期には当然百済 VS 高句麗戦争で百済の肩を持ったはずです. しかし広開土大王碑文に出るように
これらは悽惨な敗北を喫するようになりますよ. 不堪戎役 と言う文章で
その雰囲気が分かります. どうであれこれらは形式的には百済の属国だったが比較的独立的な性格を持った勢力と見えます. 百済 VS 高句麗戦争で手をはなして独立することとして半島から独立するだけでなく剛性されたと言います. すなわち現代人が言う日本だと言う国の出発点です. ヨーロッパでゾンゼングナで植民地の税金あげるからアメリカ植民地住民が税金いつまでもかえって独立するつもりなの ‾ したボストン車事件の連想する瞬間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因襲<百済>, 附庸於<迦羅国>焉

 

解釈 1. 風習は百済に付いて伽揶国の属国になった
解釈 2. こんな理由のため百済を攻撃して伽揶の属国になった.


そのまま 2種解釈すべてあげてこの部分はちょっと悩んで見ます.
どうであれ百済の属国で伽揶の属国で変身するのにこの変身のきっかけは
やはり高句麗広開土大王の 2次南下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碑文はたくさん
壊れたがどうであれ結論は広開土大王が半島南部を整理して伽揶勢力
 安羅だと言う勢力を高句麗に従属させることが結論と見えるように
になりますよ. 高句麗と戦争した列島の勢力が伽揶に付いたということは複雑な
半島の状況で手をはなすことを意味します. そして 倭ははじめて
外交舞台に登場するようになります. エンジョイ時代話申し上げたように倭王 賛は
高句麗の南下以後非Miho以後初めて中国南朝に謝絶を送るようになるのに高句麗と一緒に行くようになります. そして中国で高句麗の下位国家に認識されます.

あ...

とても面白いです古代史


한일 고대사 (7) 신라왕이 된 백제인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그 왕은(신라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의 속국이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공격하고,(백제의 풍습을 따르고) 가야국의 속국이 되었다.

 

- 北史 열전 82 新羅 -


역시 너무나 엉뚱한 문장입니다. 반도 안의 신라라고 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이 당연히 존재해야 할 기록에 대해

 

" 이거 우리가 아는 신라가 아닌데 백제인이 신라 왕을 한 적은 없어 그리고 백제인이 신라를 가는데 어째서 바다로 들어가?" 그냥 어디서 이상한 헛소문 듣고 엉뚱한 이야기 적은거 아냐?

 

이런 것이 일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아신왕 기록에 보면 틀림없이 고구려 전쟁의 부역을 피해서 신라로 이탈한 백제 세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양직 공도에는 신라의 고대 명칭 斯羅국이 백제의 담로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저렇게 문장을 적었다는 것은 역시 당시 이연수는 반도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많은 최소한 우리만큼 상세한
정보들을 접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의심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이연수의 어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http://bluecabin.com.ne.kr/china25/booksa.htm

 

북사에서 한번 백제 기록을 봅니다.

북사에서는 구태라고 하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백제인의 기록을 적습니다
대방의 고지 즉 지금의 요동 지역에 백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그 지역의 권력자 공손도와 혼인 동맹을 체결합니다. 아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마한에서 출발한 반도 백제의 기록도 " 같이 병행해서" 기록합니다.

 

식민 사관에 쩔어있는 우리와 달리 그런 것과 관련이 없는 북사의 저자 이연수에게 있어 백제라고 하는 나라는 반도와 대륙에 걸친 나라입니다. 따라서 반도의 백제 기록 대륙의 백제 기록을 각각 병행해서 모든 정보를 기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신라는 반도에 한정된 국가가 맞습니까?

굳이 야요이 시대 초기의 가야 신라 계열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최근의
발굴 성과들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헌 분석만으로도 열도의 신라 세력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 그리고 열도의 신라 백제인이 기록한 천일창 설화
양쪽모두 붉은 옷감이라고 하는 metaphor가 등장하는데 공통적으로 이것이 신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열도의 신라 반도의 신라 설화가 후대의 각각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그 원형은 반도 신라와 열도 신라 주민들이 그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분위기 상으로는 반도 신라와 열도 신라 세력간에 권력의 중심이 어느 쪽에 있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갈등의 흔적들이 보이는 설화가 아닐까 합니다

어쨋든 열도의 신라 세력의 존재에 대해서는 특별히 의심할 이유는 없고
" 신라 백제인이 왜를 큰 나라가 되게 하였다" 라고 기록한 이연수도
열도 안에 신라인이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반도의 신라를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 기록은 역시
열도의 신라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륙 백제와 반도
백제의 기록을 병행해서 기록했듯이 반도 신라와 열도 신라에 치우침 없이 모두 기록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즉 이연수가 기록한 신라 백제가 함께 왜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 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신라왕은 원래 백제 사람이다. 바다를 통해서 신라로 들어가서 나라와
왕을 물려 받았다.

 

 

양직공도에 백제는 왕의 아들과 형제와 같은 종족을 통해서 담로를 통치하였다. 하였고 당시 신라의 이름이었던 斯羅가 백제의 담로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저 백제인은 역시 왕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遂王其國 왕과 나라를 물려받았다.. 라고 일단 적어 놓았는데
해석은 좀 검토해 보아야 겠네요 ~
일단 이렇게 해석하고 뉘앙스는 이렇습니다. 백제왕족이 신라의 통치자가
되는데 어떤 무력적 충돌없이 자연스러운 지배 피지배 관계가 성립된
것 같습니다. 문득 일본서기 神代記에서 天孫이 "여기 사람이(나라가) 있는게롱? "
" 여기 사람 없심더 " 하니까 "없으면 그냥 내가 너희들 다스린당께롱"
하는 장면이 연상이 됩니다. 일본인들은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무엇을
주장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게 연상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니까요 www
( 전라도와 경상도 방언으로 변경한 것은 조금 reality를 살려보고자 함이다 )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처음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 그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중에 서로 이끌고 돌아와서 마침내 강성함을 이루었다(?)

 

역시 한문이 짧은 사람이라 좀 이상하게 번역이 되는군요
어쨋든 이것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적힌 倭 VS 고구려 전쟁의 실체입니다
열도안에 백제왕을 섬긴 신라인들 혹은 고구려 입장에서는 반도 남부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열도에서 군사 세력이 등장하여
고구려의 심장부인 대방의 경계 ( 요동 지역)까지 드롭십을 시도한
백제 왕족을 지배자로 받아들여 백제의 속국이 된 열도의 신라인인지
신라계열 倭人인지 하는 종족은 초기에는 당연히 백제 VS 고구려 전쟁에서 백제의 편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듯이
이들은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는데요. 不堪戎役 이라고 하는 문장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어쨋든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백제의 속국이었지만 비교적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세력으로 보입니다. 백제 VS 고구려 전쟁에서 손을 떼고 독립하는 것으로서 반도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강성해졌다고 합니다. 즉 현대인이 말하는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출발점입니다. 유럽에서 전쟁나서 식민지의 세금 올리니까 미국 식민지 주민이 세금 못내 차라리 독립할래 ~ 하던 보스턴 차 사건이 연상되는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해석 1. 풍습은 백제를 따르고 가야국의 속국이 되었다
해석 2. 이런 이유 때문에 백제를 공격하고 가야의 속국이 되었다.


그냥 2가지 해석 다 올리고 이 부분은 좀 고민해 봅니다.
어쨋든 백제의 속국에서 가야의 속국으로 변신하는데 이 변신의 계기는
역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2차 남하가 아닐까 합니다. 비문은 많이
깨어졌지만 어쨋든 결론은 광개토대왕이 반도 남부를 정리하고 가야 세력
 安羅라고 하는 세력을 고구려에 종속시키는 것이 결론으로 보이게
되는데요. 고구려와 전쟁했던 열도의 세력이 가야에 붙었다는 것은 복잡한
반도의 상황에서 손을 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倭는 비로소
외교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인조이 시절 이야기 드렸듯이 왜왕 贊은
고구려의 남하 이후 비미호 이후 처음으로 중국 남조에 사절을 보내게 되는데 고구려와 같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고구려의 하위 국가로 인식됩니다.

아...

너무 재미있습니다 고대사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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