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去ります二人ですべてのものさっさと捨てて済州島プルンバムその星の下

 これからはこれ以上かまけることはわれらは嫌いです新聞に TVに月給封筒に

 アパート壁の面よりは海を見られる窓が良いです...            <済州島プルンバム>

 

 日常生活にくたびれた都会人に済州島は美しい島であり行きたい所であるはずであり, 飢えにくたびれた昔の済州出身の大人たちに済州島は出たかった所であるはずであり, 材料を捜そうとしてくたびれた嫌韓に済州島は 4.3事件で剥きたい所であるでしょう.

 済州島は韓国で一番大きい島や陸地とは違う自然と地形を持っていて一番人気ある国内旅先だ. そして海という地形的障害物を持っているから陸地とは違う独特の風習と文化があって自然といっしょに風変わりな所だ.

 

 

 済州島は火山爆発で成り立った火山島で熔岩洞窟や瀧, 他の所で見られない独特な 地形が多くて 島の中では休火山である漢拏山が湧いていて同じ済州島でも北風が正しく来る北と山が阻んでくれる南側と気温と降水量が差がある.

 歴史的には耽羅国があったしモンゴル侵入の時は最後の抵抗の基地だったし現代には 4.3事件の不幸があったが今は有名な観光地だ. 済州島は 三多島とも呼ばれるのに石が多くて風が多くて女が多いからだ. そして 3種がないのに乞食, 泥棒, 大門だ.

 

 

 多くののの中に一つは石なのに済州島にはゴムウンビッをたたえるいろいろな穴抜けた玄武岩を有り勝ちに見られる. この玄武岩で家屋の壁を積んで垣根も積んで多方面にたくさん使われる.

 写真の山は赤んぼう火山, 寄生火山だと言えるオルムなのに火山が爆発しながら中心部ではない横の多くの部位で少しずつ火山が出ながら生じた地形なのに済州島で有り勝ちに見られる 地形で済州島のワールド場競技場もこれの姿を形象化した.

 下に見えるいろいろな四角いカマンセックのわくは済州島の墓なのに陸地と同じく土でふくらんでいる封墳を積んだが陸地と違うように周辺に石で四角い垣根を積んで外部と遮断した. これは周辺に馬や牛などを野原に解いておいて育てるから動物たちによって墓が毀損されないためなことだ. 公衆写真で見れば青色の土台の上に多様な真黒い四角形の図形が不規則に広がっているのに独特の絵を見るようだ.

 

 

 

 済州島と言えば思い出すドルゾガック, 多分記念品に一番多く入って行くデザインの中にひとつのトルハルバンだ. ハール部屋と言う(のは)済州島なまりでお爺さんと言う意味になるのにこちらのまともななまりは本当に聞き取れない.

 これ ¥”ドルハルアボだ¥”はいつ作られたのかわからなくてワングバングウルみたいな目と拳みたいな鼻の似ていながらも少しずつ 他の模様が数十はなるのに守護神, 呪い的, 金表(禁標)の機能をしたようだ. 南方文化の影響だと見たり北方のモンゴルの影響をバッアッダとも言うのに陸地にも違うが似ている ¥”ボックス¥”というドルゾガックサングドルがある.

 

 

 前述したように石が多いから石で家を作って垣根を積んだが これは多くの望むことを防御するためでもある. 四方が開けている島は 障害物がほとんどなしに強い風が吹くのに韓国の南部地方の島や海岸の漁村にも石垣場をたくさん見ること ある.  

 地域によって材料や積む方式も少しずつ違うが石にだけ積む垣根は振ることがなしに精緻に積まない. 石の間に振ることがあればそこで風が抜けて垣根とぶつかる 力が減る. そして 垣根の高さは適当ではなければならない. とても高ければ待ち惚けを食う面積がカーソルー崩れやすくてとても低ければ家の方で望むことが移って生活に差し支えを与えるようになる.  

 

 

 済州島に最後に多くのことは女だ. 通信や交通が発達される以前の島は 外部と孤立して純粋な原始性がたくさん残っていて陸地とは違う原初的で独特の文化が残っている. 農耕以前の社会は母系社会で女性が家庭や社会で高い地位を享受したが本格的な農耕社会で入って階級が生じながら男性優位時代になって思想規範が徐徐に社会に侵透しながら定着される.

 済州島は悲歌よく染みこむ土壌なので稲作がよくできなくて主に畑作に携わるのに土地生産力が低いからすべての家族が生業にぶら下げ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女性は畑で働いて海ではザムニョ(潜女)になって経済生活に重要な役目を占めた.

 家族制度は陸地とは違うように扶養しにくい大家族よりは核家族に近くてその外社会構造も他の点が多かったから比較的儒教規範の影響が少なかった. 男たちはお金を儲けるためにあるいは出世をするために陸地に出ようが漁業に携わって船に乗って海に出ている途中水にパジョズックヌン一刀昔には 海人には有り勝ちなイルイオッドン位 女性の 割合が高くて家庭や社会で重要な役目を引き受けていたと考えられる.  

 

 

 済州島はまた 3無の島として乞食, 泥棒, 大門がないのに島の中で貧しいとしても共同体生活を成して生業に携わったから働かない乞食にな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はずだし逃げだすことができない四方が孤立した島で泥棒にな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はずだ. 泥棒が  ないから自然に大門がなかったはずなのに代わりに大門役目をする ¥”精嚢¥”というのがある.

 3個の木棒で下から 1個をさしておくと ちょっと外出, 2個は長く外出, 3個は何日間家にないことを現わすのに必ずこんな規則が守られることではなくてこのようなものが生じた理由は確かではないが済州島は沼や言葉を野原に解いておいて育てたが核家族制度で大人たちが仕事をしに出ながら幼い子供を家に残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こんなけだものたちがけがをさせることもできて庭先に乾かしておいた穀食や財産を壊れるようにすることを防止する目的が大きかったはずだ.  

 

 

 

 家の形態は 自然環境や文化, 社会など多様な要因の影響を受けるのに済州島の家屋はまず屋根がペチャンコだ. 済州島は悲歌多い地域で普通雨の多い地域は水がよくやつれるように屋根の高いきらいがあるがむしろ平たい理由は望むことを阻むのがもっと重要だったからだ. 風の抵抗を最小化して屋根が飛ばないでしょうために帯を網のように編んで堅く縛った. 屋根の材質は稲作をし終わることは稲のわらが一般的な陸地とは違うように鳥(茅)を編んで屋根を葺いた.

 碧桃も風の影響で石と土を積んで丈夫にさせたし 建物を 前後で 二字で配置するとか 4個の建物を別に置いて 四方に配置する場合も多いのにこれも風の影響を最小化するためだ. 水がよくやつれるから気団が高くなくて家の高さも低いようにした. 写真に木棒を止めておいた部分は 風遮だと言うのに角度を調節しながら日の光を調節するとか望むことを阻む用途だ.

 

 

 済州島は韓国で一番南側に位した暖かい地方だと言えるのに韓屋構造の中に最大の特徴の中にひとつのオンドルの影響が一番少ない所だ. 北で発生したオンドルが長年の時間を経りながら徐徐に南に伝えて韓国人の住居生活に多い影響を及ぼすのに済州島の家屋にオンドルを作り始めたことは朝鮮後期, おおよそ 18世紀位くらいだと考えられる. 中央で派遣された管理や陸地から来た人から伝えたはずなのにオンドルを設置するのに技術がなければならないし天気も暖かかったからその大切さは陸地に比べて大きいでしょう


三多와 三無의 섬 제주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제주도 푸른밤>

 

 일상생활에 지친 도시인에게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요 가고 싶은 곳일 것이며, 굶주림에 지친 옛날 제주출신의 어른들에게 제주도는 나가고 싶었던 곳일 것이며, 재료를 찾느라고 지친 혐한에게 제주도는 4.3사건으로 까고 싶은 곳일 것이다.

 제주도는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이며 육지와는 다른 자연과 지형을 가지고 있어 가장 인기있는 국내 여행지다. 그리고 바다라는 지형적 장애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지와는 다른 독특한 풍습과 문화가 있어 자연과 더불어 이색적인 곳이다.

 

 

 제주도는 화산폭발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며 용암동굴이나 폭포,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이 많고 섬 가운데는 휴화산인 한라산이 솟아있어 같은 제주도라도 북풍이 바로 오는 북쪽과 산이 막아주는 남쪽과 기온과 강수량이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탐라국이 있었고 몽고침입 때는 마지막 저항의 기지였으며 현대에는 4.3사건의 불행이 있었지만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다. 제주도는 三多島라고도 불리는데 돌이 많고 바람이 많으며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3가지가 없는데 거지, 도둑, 대문이다.

 

 

 많은 것 중에 한가지는 돌인데 제주도에는 검은빛을 띄는 여러개의 구멍 뚫린 현무암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현무암으로 가옥의 벽을 쌓고 담장도 쌓고 여러모로 많이 쓰인다.

 사진의 산은 아기화산, 기생화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름인데 화산이 폭발하면서 중심부가 아닌 옆의 여러 부위로 조금씩 화산이 터져나오면서 생긴 지형인데 제주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지형으로 제주도의 월드장 경기장도 이것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밑에 보이는 여러개의 네모난 까만색의 테두리는 제주도의 무덤인데 육지와 마찬가지로 흙으로 볼록한 봉분을 쌓았지만 육지와 다르게 주변에 돌로 네모난 담장을 쌓아 외부와 차단하였다. 이것은 주변에 말이나 소 등을 들판에 풀어놓고 기르기 때문에 동물들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지 않기 위함이다. 공중사진으로 보면 푸른색의 바탕 위에 크고 작은 까만 사각형의 도형이 불규칙하게 퍼져있는데 독특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제주도하면 생각나는 돌조각, 아마 기념품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디자인 중에 하나인 돌하르방이다. 하르방이란 제주도 사투리로 할아버지란 뜻이 되는데 이 곳의 제대로된 사투리는 정말 알아듣기 힘들다.

 이 "돌할아버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고 왕방울같은 눈과 주먹같은 코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양이 수십개는 되는데 수호신, 주술적, 금표(禁標)의 기능을 했던 것 같다. 남방문화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하고 북방의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라고도 하는데 육지에도 다르지만 비슷한 "벅수"라는 돌조각상들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돌이 많기 때문에 돌로 집을 만들고 담장을 쌓았지만 이것은 많은 바람을 방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사방이 트여있는 섬은 장애물이 거의 없이 강한 바람이 부는데 한국의 남부지방의 섬이나 해안의 어촌에도 돌담장을 많이 볼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재료나 쌓는 방식도 약간씩 다르지만 돌로만 쌓는 담장은 틈이 없이 정밀하게 쌓지 않는다. 돌 사이에 틈이 있으면 거기로 바람이 빠져 담장과 부딪치는 힘이 줄어든다. 그리고 담장의 높이는 적당해야한다. 너무 높으면 바람을 맞는 면적이 커서 무너지기 쉽고 너무 낮으면 집 쪽으로 바람이 넘어가 생활에 지장을 주게된다.  

 

 

 제주도에 마지막으로 많은 것은 여자다. 통신이나 교통수단이 발달되기 이전의 섬은 외부와 고립되어 순수한 원시성이 많이 남아있고 육지와는 다른 원초적이며 독특한 문화가 남아있다. 농경 이전의 사회는 모계사회로 여성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지만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접어들고 계급이 생기면서 남성우위시대가 되고 사상규범이 점차 사회로 침투하면서 정착된다.

 제주도는 비가 잘 스며드는 토양이라서 논농사가 잘 되지 않아 주로 밭농사에 종사하는데 토지 생산력이 낮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생업에 매달려야 하며 여성은 밭에서 일하고 바다에서는 잠녀(潛女)가 되어 경제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가족제도는 육지와는 다르게 부양하기 힘든 대가족보다는 핵가족에 가깝고 그 외 사회구조도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유교규범의 영향이 적었다. 남자들은 돈을 벌기위해 혹은 출세를 하기위해 육지로 나가든지 어업에 종사하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다가 물에 빠져죽는 일도 옛날에는 바다사람에게는 흔한 일이었던만큼 여성의 비율이 높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제주도는 또한 3無의 섬으로서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데 섬 안에서 가난하더라도 공동체 생활을 이루며 생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 거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도망갈 수 없는 사방이 고립된 섬에서 도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도둑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대문이 없었을 것인데 대신 대문 역할을 하는 "정낭"이라는 것이 있다.

 3개의 나무 막대기로 아래부터 1개를 꽂아놓으면 잠깐 외출, 2개는 길게 외출, 3개는 며칠간 집에 없음을 나타내는데 꼭 이런 규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고 이런 것이 생긴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주도는 소나 말을 들판에 풀어놓고 키웠는데 핵가족 제도에서 어른들이 일을 하러 나가면서 어린 아이를 집에 두어야 했는데 이런 짐승들이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마당에 말려놓은 곡식이나 재산을 망가지게 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이 컸을 것이다.  

 

 

 집의 형태는 자연환경이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데 제주도의 가옥은 우선 지붕이 납작하다. 제주도는 비가 많은 지역으로 보통 비가 많은 지역은 물이 잘 빠지게 지붕이 높은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납작한 이유는 바람을 막는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며 지붕이 날아가지 않지 위해서 띠를 그물처럼 엮어 단단하게 묶었다. 지붕의 재질은 벼농사를 짓고 남은 볏짚이 일반적인 육지와는 다르게 새(茅)를 엮어 지붕을 올렸다.

 벽도 역시 바람의 영향으로 돌과 흙을 쌓아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건물을 앞 뒤로 二字로 배치한다든지 4개의 건물들을 따로 둬서 사방에 배치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 역시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물이 잘 빠지기 때문에 기단이 높지않고 집의 높이도 낮도록 만들었다. 사진에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은 부분은 風遮라고 하는데 각도를 조절하면서 햇빛을 조절하거나 바람을 막는 용도이다.

 

 

 제주도는 한국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따뜻한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옥 구조 중에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인 온돌의 영향이 가장 적은 곳이다. 북쪽에서 발생한 온돌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점차 남쪽으로 전파되어 한국인의 주거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 제주도의 가옥에 온돌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대략 18세기 정도쯤이라고 생각된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육지에서 온 사람에게서 전파되었을 것인데 온돌을 설치하는데 기술이 있어야 하고 날씨도 따뜻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육지에 비해 크지 앟았다.

 사진은 제주도의 부엌으로 육지에서는 같은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면 취사와 동시에 온돌과 연결되어 있어 난방도 하게 되는데 제주도 부엌의 아궁이는 온돌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취사만 하게 되어있다. 물론 제주도에도 온돌은 있다. 하지만 방의 크기가 작고 부엌과 떨어져 따로 불을 넣는 구멍이 있다.

 

 

 한국의 가장 북쪽이며 지금은 북한지역인 함경도 가옥의 부엌인데 밥을 하기 위해 불을 피우면 그 열로 동시에 난방이 된다. 솥 바로 뒤에 있는 공간이 "정주간"이라는 곳인데 불이 가장 먼저 지나는 곳이기 때문에 가장 따뜻하여 추워서 실내생활이 많은 함경도에서 식사를 하고 작업공간으로 사용하기도하는 다목적의 공간이 된다. 기온의 뚜렷한 차이는 같은 온돌이라도 사용방식과 중요성의 차이를 낳는다.

 

 

 제주도 가옥의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바닥이 나무로 된 마루방으로 가장 넓은 공간이며 식사를 하고 휴식을 하는 다목적의 공간으로 중간에서 약간 뒤쪽에 "부섭"이라고 부르는 돌로 된 화로를 나무바닥을 약간 파서 설치하고 불을 피워 난방을 하기도 한다. 마루방 외에도 온돌로 된 작은 방(사진 왼쪽), 그리고 수납공간으로 창고기능을 하는 "고팡"(사진 오른쪽)이라는 방이 붙어있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배설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할 것인데 보통 한국의 전통민가의 화장실은 생활의 중심공간에서 떨어져 가장 구석이나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뒷간(後+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糞은 중요한 비료로 땅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위에 나무판자를 2개를 놓아 발받침대로 삼고 사용하다가 필요할 때 糞를 퍼내 다른 것과 섞어 밭에 뿌려준다.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해안가에 나무판자에 줄을 묶어 연결하고 다른 한쪽은 바위에 묶어 떠내려가지 않게 고정하고 나무판자를 화장실로 사용하여 바다에 띄우면 자연스럽게 파도에 세척이 되고 줄을 끌어당겨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재미있는 화장실도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제주도의 화장실은 역시 돌을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밑에는 돼지를 키워 떨어지는 糞을 돼지가 처리하는 이런 자연순환의 방식은 고대 중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마 다른 곳에서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주도 화장실의 특징은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인데 일설에는 해적의 침입이 많아 일을 보다가도 밖을 보고 빨리 도망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제주도는 이런 까만 흑돼지가 유명하다. 마을에 큰 잔치가 있을 때 육지에서는 소를 잡지만 이 곳에서는 돼지를 잡았고 돼지요리가 발달하였다. 돼지고기 국물에 해초를 끓여서 먹는 몸국이라든지 고기국수, 제주도 순대 등은 돼지를 이용한 제주도의 유명한 향토요리이다.

 이렇듯 돌담이 많고 돼지요리가 발달한 것은 오키나와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고 그 외에도 공통점이 있겠지만 두 곳의 돌담이나 돼지요리는 같지 않다. 같은 루트로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문화도 있을 것이며 독특하게 발달시킨 문화도 있을 것이다. 문화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끊임없이 변하면서 진화하기도하고 퇴화하기도 하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것의 평가는 달라지는 법이다.

 문화는 문화 그 자체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 그것의 개인이나 집단의 好惡로 우열을 평가할 수는 없다. 우물에서 본 하늘이 전부라면 세상은 작다고 생각할 것이고 코끼리 꼬리만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가 뱀과 같이 긴 생물이라 생각할 것이며 커다란 소를 보지못한 개구리는 배에 바람을 넣고서 자신이 가장 크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 어리석은 짓이다.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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