ミリタリー

 

 

加藤清正
(Katou Kiyomasa)

 

「強い武将」の代名詞

 

 

   生没年:1562~1611年

   出身地:尾張国、現在の愛知県

 

 戦前、五月人形には必ず加藤清正がいた。虎という異国の猛獣を退治した逸話を知らぬ日本人はいなかったし、全国の親たちは、我が子が清正のような強い子に育つことを願ったのである。彼は江戸時代を通じて芝居や講釈の人気者であったが、明治になると大陸進出の偉大な先駆者として再評価され、武神として崇められるようになった。清正の美談や武勇伝は修身の教科書にも載っていたし、かの乃木希典は清正を生涯の師と仰ぎ、「清正公の戦術眼、築城技術を始めとして、治民、経済、水利、一つとして感服せざるはない。清正公の偉業は、三百年後の今に在って、皇家最大の功労者である」と述べている。
 しかし戦後になると価値観は一変し、清正のような海外に武威を轟かせた英雄は否定されるようになった。朝鮮出兵に関しても「耳切り」「鼻切り」などの凄惨な内容ばかりがことさらに強調され、今では「朝鮮侵略」というイデオロギー性を濃厚に帯びた呼称が一般化している。果たして加藤清正は武勇・忠節の英雄だったのか?それとも凶暴な侵略者だったのか?

 

 清正は尾張国の鍛冶屋(もとは斉藤道三の家臣)・加藤清忠の子として生まれた。母・伊都が羽柴秀吉の母・大政所の従姉妹であった縁から、幼くして秀吉に小姓として仕えている。小さい頃から筋骨たくましく体が大きかった清正は、軍学を折野弥次郎右衛門頼広に、兵法剣術を塚原小才次に、槍術を宝蔵院胤栄にそれぞれ学び、見る見る屈強な若武者へと成長。そして秀吉の配下で次々と武功を上げていくのだった。

 

 

 

壮絶!荒武者・虎之助の槍働き

 

・長篠の戦い  
14歳で初陣、武田方の騎馬武者三騎を斬り落とす。

 

・備中冠山城攻め 
備中高松城の前哨戦。清正は城内に一番乗りを果たす。見ると敵方の豪勇の士・竹井将監は槍を振るって次々と羽柴勢の兵を討ち取っている。清正は竹井に一騎打ちを挑んだがなかなか勝負がつかず、痺れを切らした清正が槍を捨て、抜刀してついに竹井を斬り伏せた。

 

・賤ヶ岳の戦い 
 敗走する柴田勢を追撃し、六尺余りの大槍を振るう敵将・山路正国と激闘を繰り広げ、これを組み伏せて討ち取った。また、このとき戸波隼人なる敵将を討ち取ったとする記録もある。この戦いで清正は「賤ヶ岳の七本槍」の一人に数えられ、3000石の所領を与えられた。

 

・加賀野井城攻め  
 槍で敵兵26人を一度に討ち倒し、勝機を生み出した。

 

・天正天草一揆
 所領の一揆勢を押さえきれなくなった小西行長を救援するべく出陣、たちまち一揆勢の諸城を陥落させる。仏木坂では一揆勢随一の豪傑・木山弾正が本陣にまで切り込み、清正に一騎打ちを挑んできた。死闘の末清正はついに弾正を討ち取り、さらに敵兵二人を突き伏せたという。

 

 

 

秀吉の九州征伐に従軍した清正は肥後の半国を与えられ、19万5000石の大名となった。そして文禄元年。主君・秀吉から、前例の無い壮大な対外遠征計画・「唐入り」の先鋒を命じられることとなる。

 

 

 

大陸大冒険!

 

 文禄の役において清正は10000人を率い二番隊の主将となって、一番隊の小西行長と日替わりで先陣を務めることになった。しかし行長が抜け駆けしたため彼と王都・漢城の攻略を競う羽目となり、行長に半日遅れで漢城入りした。その後臨津江の戦いで金命元の朝鮮軍を破り、行長らとは別行動をとって北上、海丁倉の戦いで韓克誠率いる北関の騎兵軍団に大勝を博して咸鏡道を平定。朝鮮の二王子を捕虜とした。このとき、二王子らは朝鮮王朝から寝返った奸臣・鞠景仁により捕らえられていた。清正は王子一行が罪人のように枷をはめられ倉に押し込まれているのを見て「卑しくも貴国の王族であろう。なぜこのような仕打ちをするのか」と鞠景仁を責め、自ら縄を解き、本陣まで護送したという。清正は王子らに礼節を尽くして対応したため、両王子は清正に感謝状を贈り、それは現在、紀州徳川家に伝来している。

  その後、加藤勢は現地の住民たちから「オランケを討伐してほしい」と要請を受ける。この頃、国境の向こうにはオランケ(野蛮人)と呼ばれるツングース系の騎馬民族(女真族)がおり、朝鮮にたびたび侵入しては拉致や略奪など暴虐の限りを尽くしていたのだ。清正は現地人の支持を得るため、また当時「オランカイ」と呼ばれていた満州の地から明への侵入経路を探るため、国境の豆満江を越えた。ここで清正はオランカイ各地に点在する13箇所の砦をことごとく陥落させ焼き払った。しかし兵糧米の取れない不毛の地が果てしなく続いていたため、オランカイからの明国入りは断念している。その後、清正は第二次晋州城攻めで「亀甲車」なる戦車を使って城内に一番乗りを果たし、堅城と名高い晋州城を陥落させた。清正は朝鮮の民衆から「鬼上官(お化け将軍)」と恐れ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た。

 

ファイル:Bunrokunoeki shinro.JPG


 このように比類なき大功を上げていた清正だったが、小西行長、石田三成ら文治派との対立は日に日に深まっていた。行長、三成らは明との早期講和の道を模索しており、主君であるはずの秀吉を欺き、秀吉が大明皇帝の冊封を受けるという屈辱的な条件での和平を結ぼうと画策していたのだ。これを察知した清正は独自の交渉ルートを通じて秀吉が掲げる講和条件を明側に伝えるなど、愚直なまでに秀吉の本意に従おうとした。しかしこうした清正の行動を疎ましく思った三成は、あろうことか「清正が講和交渉を妨害している」という事実無根の讒言を行った。清正は激怒した秀吉から京での蟄居を命じられ、せっかく征服した土地を手放して帰国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の際、増田長盛から「三成と仲直りしてはどうか」と持ちかけられるが、清正はこれを断っている。清正は許せなかった。自らは戦場に出てこないで、陰で人を陥れる策ばかり練っている三成を、決して許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だ。こうして面会も許されず伏見で蟄居していた清正であったが、あるとき転機が訪れる。1593年7月13日、畿内で大地震が起こった。伏見城の天守は倒壊し、避難した秀吉は謀反を恐れて女物の着物を着、息を潜めていたという。清正は手勢を率いて誰よりも早く伏見城に駆けつけ、秀吉の警護を固めた。秀吉はこの忠義を称えて清正を許し、慶長の役で再び先鋒を命じるのであった。

  1597年、再び渡海した清正は右軍の先陣となって黄石山城を陥落させ、半島南部蔚山の地に拠点となる城の構築を開始した。一方、明軍では清正を日本軍最強の武将と考え、侵略軍の象徴的存在となっていた彼を捕らえることによって、日本軍全体の士気を挫こうと考えた。12月、5万7千もの大軍が未完成の蔚山城を包囲し、蔚山の戦いが始まった。清正はこのとき出張で蔚山にはいなかったが、急報を受けるとただちに手勢500人ほどを率いて小船で蔚山城に入る。やがて食糧は底を突き、馬や雑草、壁土まで食うなど城内は飢餓地獄と化し、また厳しい寒さで凍死する者も続出した。しかし清正を柱とする城方の闘志は一向に衰えることがない。雲霞のごとく押し寄せる大軍をことごとく撃退し、ついには1月の援軍到着まで持ちこたえた。明軍は慌てて撤退を始めるが、そこへ援軍が襲い掛かり、清正ら篭城兵も城から打って出て明軍を挟撃。明軍の死者は2万に達し、圧倒的大軍をほとんど壊滅させるという空前の大勝利を収めるのであった。

 

 

 

 

 

忠烈!最期まで豊家に尽くす

 

 秀吉の死後、清正は関ヶ原の戦いで小西領の諸城を攻略し、その功で肥後52万石の大大名となった。時世は豊臣から徳川へと移り変わりつつあり、諸大名は家康から疑いの目を向けられるのを恐れ、豊臣秀頼のいる大坂城を素通りして江戸に向かうようになっていた。しかし清正だけは江戸に赴く前に必ず大坂城に立ち寄り、秀頼に挨拶をした。また二条城の会見では、かつて秀吉から賜った短刀を懐に忍ばせて臨み秀頼を守った。会見が何事も起こらず無事に終了すると、清正は「いささか太閤の厚恩に酬いることができた」と言い、涙を流したという。しかし清正はこの会見からの帰国の船において発病し、熊本で死去する。50歳であった。大坂の陣が起こるのはそれから僅か3年後のことである。

 

 

 

 

 

 

民を慈しんだ名君

 

 現在も、熊本市で加藤清正は「せいしょこさん」と呼ばれ親しまれている。本妙寺には熊本市街を見渡すように、片鎌槍を手にした清正の像が立つ。清正は熊本で治水・灌漑事業に力を注いで河川の氾濫を防いだが、この際施された土木技術は非常に高度なもので、堤防や水路など現在に至るまで実用として使われている遺構も少なくない。清正の類希なる築城技術の応用であろう。他にも広大な干拓事業によって作物の生産量を飛躍的に伸ばし、宣教師が「日本一貧しい国」と呼んだ熊本を豊かな国に発展させた。天下の名城・熊本城に築城にしても、労役に従事した人々には十分な賃金を払い、無理な労働をさせなかったため領民たちから喜ばれた。彼の治世から400年が経ったが、今なお清正は、熊本の人々から父母のように慕われているのだ。
 

 

 

 


 最後に、一編の詩を紹介して締めくくりたい。

 

明治天皇の侍講を務め、陛下の信任厚かった儒学者、元田永孚が詠んだものである。

 

 

 

 


詠加藤公 
~加藤公を詠ず~

 

六尺の孤 以て託す可く


百里の命 以て寄す可し


大節に臨みて 奪う可からず


以て この公の心事を 評す可し


この公 すでに是れ 一世の豪


攻城野戦 独り賢労


絶海 孤塁 飢えて骨に至るも


叱咤 虜を罵れば 虜 遁逃す


帰来 白首 遺孤に捧ぐ


豊家の存亡 僅に一毛


ヒ首 天を仰いで 旧主に酬ゆ


天神泣き 人鬼も号く


なお余力あり 国を経するに堪う


用を節し 民を愛し 民食は足る


治水 築城 功沢を存ず


百世忘れず 公の威徳を


ああ忠勇 あに髯の絶倫のみならんや

 

君子人か 君子人なり

 

 

 

 

 

かの「論語」にいうところの「託孤寄命」の章句は、

 

まさに清正公の心事を言い当てたものだ。


清正公は一代の豪勇で、戦場に臨んでは卓抜の功を立て、


蔚山の篭城では飢餓と戦い、

 

猛然と出撃しては、百万の賊を遁走せしめた。


帰朝してからは、よく幼主・秀頼を奉じ、豊臣氏の命脈を保持した。

 

かの二条城の会見では、太閤から賜った短剣を懐にして秀頼を守り、

 

いささか太閤の厚恩に酬い得たと述懐したごとき、

 

その誠忠に誰か感泣しない者があろうか。

 

しかも大国を経営しては仁政を施し、

 

人民の福利を増進せしめた。


国土を開発し堅城を築き、

 

その大きな功沢は後の世までも称えられている。

 

ああ、清正公は忠烈無双である。


ただ髭が立派、風采が威丈だというだけではない。


かくのごとき人こそ、君子と言うべきであろうか。


まさしく君子と言うべきである。


 

 

 

 

 

 

 

 

 

 

 

 

さて、それでは

そんな加藤清正が着た鎧を見てみよう。

 

 

 

 

 

 

 

 

 

 

 

 

 

 

加藤清正所用 
白檀塗蛇の目紋二枚胴具足
(本妙寺蔵)

 

 朝鮮役のとき、清正のかわりに敵陣へ乗り込み交渉に当たった家臣、九鬼四郎兵衛広隆が清正から拝領した具足。長大な烏帽子形兜がまず目に入るが、この兜は当初のものかどうか不明。二枚胴には加藤家の家紋である蛇の目紋が大きくあしらわれている。無骨で凄みの伝わる一領である

 

 

 

加藤清正所用
白檀塗蛇の目紋蒔絵仏胴具足

(本妙寺蔵) 

 

 こちらは先の二枚胴具足と比べて色彩が明るく、兜には吹返が付き、袖も大きくなっている。恐らく製作年はこちらの方が後だろう。蒔絵が施された滑らかな仏胴が映える。

 

 

 

 

加藤清正所用
紅糸威朱塗二枚胴具足 

(個人蔵)

 

 清正が家臣の石田源介に与えたものと伝わる。清正の着領としては地味な造りで、頭形兜に付属する控えめな大きさの三日月以外、これといった装飾は見当たらない。

 

 

 

加藤清正所用
蛇の目紋長烏帽子形兜
 (本妙寺蔵)

 

 清正は烏帽子形兜を好んで用いており、彼のトレードマークの一つとなっていた。こうした烏帽子形兜は、和紙製の張懸を普通の兜の上に被せて作っていた。よく見ると眉庇(まびさし)には眉毛も付いている。

 

 

 

 

加藤清正所用
長烏帽子形張懸兜
(徳川美術館蔵)

 

 最初に紹介した白檀塗蛇の目紋二枚胴具足と同様、九鬼四郎兵衛広隆が清正から拝領したもの。全長は75センチもあり、表面は銀箔押、朱漆で日の丸が描かれている。張懸は、一説によれば清正直筆の「南無妙法蓮華経」の経文で作られているという。九鬼嘉隆の甥にあたる広隆は主君を8度も変えた人物で、朝鮮から帰国した後加藤家を去り、最終的には徳川頼宣の家臣として生涯を終えている。そのため本品も紀州徳川家に伝来した。昭和8年になって尾張徳川家が一万円(現在の1億円相当)という大金をはたいて買い取り、現在は徳川美術館に所蔵されている。

 

 

 

伝・加藤清正所用
金小札色々威片肌脱胴具足
(東京国立博物館蔵)

 

 片肌脱ぎの男性を象った怪異な風貌の一領。頭形兜に熊毛が植えられ、眉庇や頬当、胴の一部や篭手が肉色に塗られている。敵兵の目にはあたかも自棄になった半裸の野郎が戦っているように見え、さぞ恐怖感を煽られたことだろう。切付小札や脛当、佩楯にはふんだんに金箔が用いられている。江戸時代初期の作。

 

 

「日本の侍の鎧」過去の投稿はこちら↓

/jp/exchange/photo/list.php?tname=exc_board_53&f=a.j_subject&word=%E6%97%A5%E6%9C%AC%E3%81%AE%E4%BE%8D%E3%81%AE%E9%8E%A7&x=1&y=8

 


일본의 사무라이의 요로이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
(Katou Kiyomasa)

 

「강한 무장」의 대명사

 

 

   태어나고 죽은 해:1562~1611년

   출신지:오와리국, 현재의 아이치현

 

 전쟁 전, 오월 인형에는 반드시 가토 기요마사가 있었다.범이라고 하는 이국의 맹수를 퇴치한 일화를 알지 않는 일본인은 없었고, 전국의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키요마사와 같이 강한 아이로 자랄 것을 바랐던 것이다.그는 에도시대를 통해서 연극이나 야담의 인기인이었지만, 메이지가 되면 대륙 진출의 위대한 선구자로서 재평가되어 무신으로서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다.키요마사의 미담이나 무용전은 수신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고, 인가의 노기 마레스케는 키요마사를 생애의 스승으로 받들어,「키요마사공의 전술눈, 축성 기술을 시작으로 하고, 치민, 경제, 수리, 하나도 감복키바구니는 없다.키요마사공의 위업은, 3백년 후의 곧 있고, 황가 최대의 공로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후가 되면 가치관은 일변해, 키요마사와 같은 해외에 무위를 울릴 수 있었던 영웅은 부정되게 되었다.한국 출병에 관해서도 「미미키리」 「코 잘라」등이 처참한 내용만이 일부러 강조되어 지금은 「조선 침략」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성을 농후하게 띤 호칭이 일반화하고 있다.과연 가토 기요마사는 무용·충절의 영웅이었는가?그렇지 않으면 흉포한 침략자였는가?

 

 키요마사는 오와리국의 카지야(아래는 사이토도3의 가신)·카토 키요시충의 아이로서 태어났다.어머니·이토가 우시히데요시의 어머니·오오만 도코로의 사촌자매인 인연으로부터, 어리게 해 히데요시에 시동으로서 시중들고 있다.어렸을 적부터 근골 씩씩하게 몸이 컸던 키요마사는, 병법을 절야야지로 우에몬 요리히로에, 병법 검술을 츠카하라 잔재주다음에, 창술을 호우조인 인에이에게 각각 배워, 순식간에 몹시 힘이 센 젊은 무사로 성장.그리고 히데요시의 부하로 차례차례로 무공을 올려 가는 것이었다.

 

 

 

장절!우악한 무사·토라노스케의 창기능

 

·나가시노 싸움  
14세에 첫 출진, 타케다분의 기마 무사3기를 베어 떨어뜨린다.

 

·빗츄 칸무리산성공격 
빗츄 타카마츠성의 전초전.키요마사는 성내에 제일 먼저 도착을 완수한다.보면 적측의 호용의 사·타케이 쇼겐은 창을 털어 차례차례로 우시세의 군사를 죽이고 있다.키요마사는 타케이에 일대일 대결을 도전했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키요마사가 창을 버려 발도 해 마침내 타케이를 베어 덮었다.

 

·시즈가타케의 싸움 
 패주 하는 시바타세를 추격 해, 6척넘치는 대창을 터는 적 마사·야마지 마사쿠니와 격투를 펼치고 이것을 짜 덮어 죽였다.또, 이 때 토나미 하야토 되는 적장을 죽였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이 싸움으로 키요마사는 「시즈가타케의 7 개창」의 한 명으로 꼽혀 3000석의 영지가 주어졌다.

 

·카가노이성공격  
 창으로 적병 26명을 한 번에 토벌해 넘어뜨려, 이길 기회를 낳았다.

 

·덴쇼(연호) 시마바라의 난
 영지의 일치 단결세를 다 누를 수 없어진 고니시유키나가를 구원할 수 있도록 출진, 금새 일치 단결세의 제성을 함락 시킨다.호토기리비탈에서는 일치 단결세 제일의 호걸·키야마 율령제하의 감찰기관이 본진에까지 돌진해, 키요마사에 일대일 대결을 도전해 왔다.사투의 스에키요정은 마침내 율령제하의 감찰기관을 죽여, 한층 더 적병 두 명을 찔러 덮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 종군 한 키요마사는 히고의 반국이 주어져 19만 5000석의 영주가 되었다.그리고 문녹원년.주군·히데요시로부터, 전례가 없는 장대한 대외 원정 계획·「당방문」의 선봉을 명할 수 있게 된다.

 

 

 

대륙대모험!

 

 문녹의 역에 대해 키요마사는 10000명을 인솔해 2번대의 주장이 되고, 제일 대 고니시유키나가와 일일로 선진을 맡게 되었다.그러나 유키나가가 빠져 달려 했기 때문에 그와 왕도·한성의 공략을 겨루는 처지가 되어, 유키나가에 반나절 늦게 한성 들어갔다.그 후림츠에의 싸움으로 금명원의 조선군을 물리쳐, 유키나가등과는 별행동을 취해 북상, 해 정창의 싸움으로 한극성 인솔하는 키타노세키의 기병 군단에 대승을 얻어 함경도를 평정.조선의 2 왕자를 포로로 했다.이 때, 2 왕자등은 조선 왕조부터 잠 돌아간 간신·국경인에 의해 잡히고 있었다.키요마사는 왕자 일행이 죄인과 같이 항쇄를 낄 수 있는 창에 밀어넣어지고 있는 것을 봐 「천하지도 귀국의 왕족일 것이다.왜 이러한 처사를 하는 것인가」라고 국경인을 꾸짖어 스스로 줄을 풀어, 본진까지 호송했다고 한다.키요마사는 왕자등에 예절을 다해 대응했기 때문에, 양왕자는 키요마사에 감사장을 주어, 그것은 현재, 기슈 토쿠가와가에 전래하고 있다.

  그 후, 카토세는 현지의 주민들로부터 「오란케를 토벌 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요청을 받는다.요즘, 국경의 저 편에는 오란케(야만인)로 불리는 퉁구스계의 기마민족(여진족)이 내려 조선에 가끔 침입해 납치나 약탈 등 포학의 한계를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키요마사는 현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또 당시 「오란카이」라고 불리고 있던 만주의 땅으로부터 명에의 침입 경로를 찾기 위해, 국경의 두만강을 넘었다.여기서 키요마사는 오란카이 각지에 점재하는 13개소의 사이를 죄다 함락 시켜 다 태웠다.그러나 군량미를 잡히지 않는 불모의 땅이 끝없게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란카이로부터의 명귀향은 단념하고 있다.그 후, 키요마사는 제2차 진주성공격으로 「귀갑차」되는 전차를 사용해 성내에 제일 먼저 도착을 완수해, 견성과 유명한 진주성을 함락 시켰다.키요마사는 조선의 민중으로부터「무서운 상관(도깨비 장군)」와 두려워 하게 되어 있었다.

 

파일:Bunrokunoeki shinro.JPG


 이와 같이 비교없는 큰 공로를 올리고 있던 키요마사였지만, 고니시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등 분지파와의 대립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유키나가, 미나리등은 명과의 조기 강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 주군이어야할 히데요시를 속여, 히데요시가 대아키라 황제의 책봉을 받는다고 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의 평화를 묶으려고 획책 하고 있었던 것이다.이것을 찰지한 키요마사는 독자적인 교섭 루트를 통해서 히데요시가 내거는 강화 조건을 명측에 전하는 등, 우직 날것으로에 히데요시의 본의에 따르려고 했다.그러나 이러한 키요마사의 행동을 꺼림칙하다고 생각한 미나리는, 어느 일인가「키요마사가 강화 교섭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 무근의 중상 모략을 실시했다.키요마사는 격노한 히데요시로부터 경으로의 칩거를 명할 수 있어 모처럼 정복한 토지를 손놓아 귀국해야 했다.이 때, 마시타 나가모리로부터 「미나리와 화해 하면 어떨까」라고 걸 수 있지만, 키요마사는 이것을 끊고 있다.키요마사는 허락할 수 없었다.스스로는 전장에 나오지 말고, 그늘에서 사람을 빠뜨리는 책만 가다듬고 있는 미나리를, 결코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이렇게 하고 면회도 용서되지 않고 후시미에서 칩거 하고 있던 키요마사였지만, 어느 전환기가 찾아온다.1593년 7월 13일, 기나이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후시미성의 천수각은 도괴해 , 피난한 히데요시는 모반을 무서워해 여자용품의 옷(기모노)를 벌, 숨을 죽이고 있었다고 한다.키요마사는 수세를 인솔해 누구보다 빨리 후시미성에 달려 들어 히데요시의 경호를 굳혔다.히데요시는 이 충의를 칭하고 키요마사를 허락해, 게이쵸의 역으로 다시 선봉을 명하는 것에서 만났다.

  1597년, 다시 항해한 키요마사는 우군의 선진이 되어 황스 산성을 함락시켜, 반도 남부 울산의 땅에 거점이 되는 성의 구축을 개시했다.한편, 명군에서는 키요마사를 일본군최강의 무장이라고 생각해 침략군의 상징적 존재가 되고 있던 그를 잡는 것에 의해서, 일본군전체의 사기를 좌후도 생각했다.12월, 5만 7천의 대군이 미완성의 울산성을 포위해, 울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키요마사는 이 때 출장으로 울산에는 없었지만, 급보를 받으면 즉시 수세 500명 정도를 인솔해 작은 배로 울산 죠에 들어온다.이윽고 식량은 바닥나, 말이나 잡초, 벽토까지 먹는 등 성내는 기아 지옥화해, 또 매서운 추위로 동사하는 사람도 속출했다.그러나 키요마사를 기둥으로 하는 성방의 투지는 전혀 쇠약해지는 것이 없다.운하와 같이 밀려 드는 대군을 죄다 격퇴해, 마침내 1월의 원군 도착까지 유지했다.명군은 당황해서 철퇴를 시작하지만, 거기에 원군이 덤벼 들어, 키요마사등 농성병도 성으로부터 출마해 명군을 협공.명군의 사망자는 2만에 이르러, 압도적 대군을 거의 괴멸 시킨다고 하는 공전의 대승리를 거두는 것에서 만났다.

 

 

 

 

 

충렬!최후까지 풍가에 힘쓴다

 

 히데요시의 사후, 키요마사는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코니시령의 제성을 공략해, 그 공으로 히고 52 망고쿠의 대영주가 되었다.시대는 도요토미로부터 토쿠가와로 변천하고 있고, 제영주는 이에야스로부터 혐의를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무서워하고 토요토미히데요리가 있는 오오사카성을 그냥 지나침 하고 에도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그러나 키요마사만은 에도로 향해 가기 전에 반드시 오오사카성에 들러, 수뢰에 인사를 했다.또 니죠성의 회견에서는, 일찌기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단도를 품에 숨겨 임해 수뢰를 지켰다.회견이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하게 종료하면, 키요마사는「조금 타이코의 후운에 수 있을 수 있었다」라고 말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그러나 키요마사는 이 회견으로부터의 귀국의 배에 대해 발병해, 쿠마모토에서 사망한다.50세에 있었다.오오사카의 진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고 불과 3년 후이다.

 

 

 

 

 

 

백성을 사랑한 명군

 

 현재도, 쿠마모토시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청서 넘지 않아」라고 불려 사랑받고 있다.본묘사에는 쿠마모토시거리를 바라보도록(듯이), 미늘 창을 손에 넣은 키요마사의 상이 선다.키요마사는 쿠마모토에서 치수·관개 사업에 힘을 쏟아 하천의 범람을 막았지만, 이 때 베풀어진 토목 기술은 매우 고도의 것으로, 제방이나 수로 등 현재에 이를 때까지 실용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옛날 건축의 잔존물도 적지 않다.키요마사의 보기 드문 축성 기술의 응용일 것이다.그 밖에도 광대한 간척사업에 의해서 작물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선교사가 「일본 제일 궁핍한 나라」라고 부른 쿠마모토를 풍부한 나라에 발전시켰다.천하의 메이죠·쿠마모토성에 축성으로 해도, 노역에 종사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임금을 지불해, 무리한 노동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았다.그의 치세로부터 400년이 지났지만, 지금 더 키요마사는, 쿠마모토의 사람들로부터 부모와 같이 존경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매듭짓고 싶다.

 

메이지천황의 시강을 맡아 폐하의 신임 두꺼웠던 유학자, 모토다 나가자네가 읊은 것이다.

 

 

 

 


영카토공 
~카토공을 영두~

 

6척의 고이라고 맡기는 가능구


햐쿠리의 명이라고 기가능 해


대절에 임해라고 빼앗는 가능으로부터 두


이라고 이 공의 심사를 평가능 해


이 공벌써시일세의 호주


공성 야전 혼자현노


절해 고루 굶어 뼈에 이르는 것도


질타포로를 매도하면 로둔 놓친다


귀래 매춘부 유아에게 바친다


풍가의 존망근에 일모


히수천을 바라봐 옛 주인에게 수


천신 울음인귀도 호구


또한 여력 있어 나라를 거쳐 하는에 감


용무를 절제해 백성을 사랑해 민식은 만족


치수 축성공택을 존두


백세 잊지 않고 공의 위덕을


아 추우유 형염의 절륜만 되지 않아나

 

군자인이나 군자인이든지

 

 

 

 

·

·

·

 

인가의 「논어」에 말할 곳의 「탁고기명」의 장귀는,

 

확실히 키요마사공의 심사를 알아 맞춘 것이다.


키요마사공은 일대의 호용하고, 전장에 임해 탁월의 공을 세워


울산의 농성에서는 기아와 싸워,

 

사납게 출격 해서는,백만의 도적을 둔주 하게 했다.


귀국하고 나서는, 자주(잘) 나이 어린 군주·수뢰를 받들어,도요토미씨의 명맥을 보관 유지했다.

 

인가의 니죠성의 회견에서는,타이코로부터 받은 단검을 품으로 해 수뢰를 지켜,

 

조금 타이코의 후운에 수 있었다고 술회 한 마다 와,

 

그 성충에 누군가 감읍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

 

게다가 대국을 경영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인민의 복리를 증진 하게 했다.


국토를 개발해 견성을 쌓아,

 

그 큰 공택은 후세까지도 칭할 수 있고 있다.

 

아, 키요마사공은 충렬 무쌍이다.


단지 자가 훌륭함, 풍채가 위장이라고 하는 것 만이 아니다.


쓰는 것 마다 나무인이야말로, 군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바야흐로 군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런 가토 기요마사가 입은 요로이를 보자.

 

 

 

 

 

 

 

 

 

 

 

 

 

 

가토 기요마사 소용 
백단도굵은 고리 모양문2매 몸통 도구
(본묘사장)

 

 조선역 때, 키요마사의 대신에 적진에 타 교섭에 임한 가신, 쿠키 시로베 히로타카가 키요마사로부터 배령 한 도구.장대한 까마귀 모자형두가 우선 눈에 들어오지만, 이 두는 당초의의 화도나 불명.2매 몸통에는 카토가의 가문인 굵은 고리 모양문이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풍류를 모름으로 무서움이 전해지는 한 벌이다

 

 

 

가토 기요마사 소용
백단도굵은 고리 모양문금칠한 그림불동도구

(본묘사장) 

 

 이쪽은 앞의 2매 몸통 도구와 비교해서 색채가 밝고, 두에는 취반이 붙어, 소매도 커지고 있다.아마 제작년은 이 쪽이 후일 것이다.금칠한 그림이 베풀어진 매끄러운 불동이 빛난다.

 

 

 

 

가토 기요마사 소용
홍실위주도2매 몸통 도구 

(개인창고)

 

 키요마사가 가신 이시다원개에게 준 것과 전해진다.키요마사의 착령으로서는 수수한 구조로, 두형두에 부속되는 소극적인 크기의 초승달 이외, 이렇다 할 만한 장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가토 기요마사 소용
굵은 고리 모양문장 까마귀 모자형두
 (본묘사장)

 

 키요마사는 까마귀 모자형두를 기꺼이 이용하고 있어 그의 트레이드마크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이러한 까마귀 모자형두는, 일본 종이제의 장현을 보통 두 위에 씌워 만들고 있었다.잘 보면 미비(사주)에는 눈썹도 붙어 있다.

 

 

 

 

가토 기요마사 소용
장오모자형장현두
(토쿠가와 미술관창고)

 

 최초로 소개한 백단도굵은 고리 모양문2매 몸통 도구와 같이, 쿠키 시로베 히로타카가 키요마사로부터 배령 한 것.전체 길이는 75센치나 있어, 표면은 은박압, 주홍옻나무로 일장기가 그려져 있다.장현은, 일설에 의하면 키요마사 직필의 「법화경에 귀의하는 뜻」의 경문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구키 요시타카의 조카에 해당하는 히로타카는 주군을 8도나 바꾼 인물로, 조선으로부터 귀국한 후 카토가를 사라져, 최종적으로는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가신으로서 생애를 끝내고 있다.그 때문에 본품도 기슈 토쿠가와가에 전래했다.쇼와 8년이 되어 오와리 토쿠가와가가 1만엔(현재의 1억엔 상당)이라고 하는 큰 돈을 털어 매입해, 현재는 토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다.

 

 

 

전·가토 기요마사 소용
금소지폐 여러가지권세 한쪽 어깨의 살갗탈동도구
(도쿄 국립 박물관창고)

 

 한쪽 어깨의 살갗탈의 남성을 코끼리괴이한 풍모의 한 벌.두형두에 쿠마게가 심어져 미비나 협당, 몸통의 일부나 바구니손이 고기색에 칠해지고 있다.적병의 눈에는 마치 자기가 된 반나체의 놈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여 필시 공포감을 부추겨진 것일 것이다.절부소지폐나 정강이당, 패순에는 충분하게 금박이 이용되고 있다.에도시대 초기의 작.

 

 

「일본의 사무라이의 요로이」과거의 투고는 이쪽↓

/jp/exchange/photo/list.php?tname=exc_board_53&f=a.j_subject&word=%E6%97%A5%E6%9C%AC%E3%81%AE%E4%BE%8D%E3%81%AE%E9%8E%A7&x=1&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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