秀吉軍は虐げられた朝鮮民衆の解放軍として迎え入れられた。
多数の朝鮮民衆が秀吉軍に従軍したため、秀吉軍の半数が朝鮮イン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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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心怨叛し、わと同心」
(人々は怒りで日本軍に同調した)
「賊兵の数、半ばは我国人というが、然るか」
(敵兵の半分は我が国の人々だ。そんな感じだ。)
『宣祖実録』
「わ奴幾ばくもなし、半ばは叛民、極めて寒心すべし」
(日本人はそれほど多くない。半分は我が国の平民である。なんということか)
『鶴峯集』金誠一
日本軍は朝鮮上陸後わずか二十日間で首都漢城を占領した。
快進撃の背景には日本軍を解放軍として迎えた朝鮮民衆の支援もあったのだ。
景福宮などの焼失は、大部分の韓国の観光案内板によれば、「壬辰わ乱(文禄・慶長の役)の兵によるもの」と書かれているが、それは嘘だ。
李恒福の『白沙集』によれば、秀吉軍の入城前にはすでに灰燼となっていた。
それは、民衆が兵乱と聞けばすぐに蜂起して、宮廷を襲い略奪したからだ。
ことに奴婢は、秀吉軍を解放軍として迎え、奴婢の身分台帳を保管していた掌隷院に火を放った。それが歴史の史実だ。
『宣祖実録』によれば、「人心怨叛し、わと同心」するような社会状況の中で、明軍が朝鮮軍支援にかけつけてみると、「斬る所の首級半ば皆朝鮮の民」(敵の指揮官クラスの半分は朝鮮の民)といったふうだったという。
更に、江戸時代末期に日本で書かれた『征韓偉略』によれば、秀吉の軍隊が京城に入城した時、兵士の半ばは朝鮮の民であったという。
また、韓国の教科書には「文化財の被害も大きかった。景福宮が焼け、実録を保管した書庫が消失した」と書かれているが、火をつけたのは朝鮮の民であり、秀吉の軍隊が京城に入る前に、既にそれらの建物は焼け落ちていたのである。
宣祖の京城脱出と同時に、日頃から怨念を抱いていた民衆が略奪・放火をほしいままにしたのであり、「虐げられた朝鮮の民衆にとって、外敵の侵入はまさに解放軍の到来と映った」との指摘すらある。
すなわち韓国人たちの英雄、李 舜臣は民衆の敵であった、これが真実の歴史である。
히데요시군은 시달린 조선 민중의 해방군으로서 맞아들일 수 있었다.
다수의 조선 민중이 히데요시군에 종군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군의 반수가 조선 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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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원반 해, 원과 동심」
(사람들은 분노로 일본군에 동조했다)
「적병의 수, 반은 우리나라인이라고 하지만, 어떤인가」
(적병의 반은 우리 나라의 사람들이다.그런 느낌이다.)
「선조실록」
「원노기거미 이루어, 반은 반민, 지극히 한심하게 여김 할 것」
「학봉집」김 세이치
일본군은 조선 상륙 후 불과 20일간에 수도한성을 점령했다.
쾌진격의 배경에는 일본군을 해방군으로서 맞이한 조선 민중의 지원도 있었던 것이다.
경복궁등의 소실은, 대부분의 한국의 관광 안내판에 의하면, 「임진원란(문녹·게이쵸의 역 )의 군사에 의하는 것」이라고 쓰여져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항복의 「백사집」에 의하면, 히데요시군의 입성전에는 벌써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민중이 병란이라고 (들)물으면 곧바로 봉기 하고, 궁정을 덮쳐 약탈했기 때문이다.
일로 노비는, 히데요시군을 해방군으로서 맞이해 노비의 신분 대장을 보관하고 있던 장례원에 불을 질렀다.그것이 역사의 사실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인심원반 해, 원과 동심」하는 사회 상황속에서, 명군이 조선군지원에 달려가 보면, 「베는 곳의 수급 반 모두 조선의 백성」(적의 지휘관 클래스의 반은 조선의 백성)이라고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에도시대 말기에 일본에서 쓰여진 「정한위략」에 의하면, 히데요시의 군대가 경성에 입성 했을 때,병사의 반은 조선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선조의 경성 탈출과 동시에, 평소부터 원한을 안고 있던 민중이 약탈·방화를 제멋대로하게 한 것이어,「시달린 조선의 민중에게 있어서, 외적의 침입은 확실히 해방군의 도래와 비쳤다」라는 지적조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