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KJ의 일부 일본ID의 주장에 의하면, 구한말과 경술국치(庚戌國恥/한일합방)당시 일본으로부터 다수 승려가 유입된 상황만을 단편적으로 근거하여

조선시대 불교가 완전히 파괴되어 불교 전통이 절멸되었다는 뉘앙스의 주장을 편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불교는 그렇게 일본으로 유입되어 다시 활성화되고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래 링크 스레에 달린 레스

한국측:  /kr/board/exc_board_9/view/id/2676668/page/3

일본측:  /jp/board/exc_board_9/view/id/2676668/page/3  

 

이에 조선시대 불교와 관련되어 주요 사건과 그 내용을 정리하여,  편협한 오해를 조금 불식시키고자 한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이고 본인도 그 분야의 소양이나 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연대기 형식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1. 정도전(조선개국의 주도자, 고려의 신진사대부 지도자)의  『불씨잡변(佛氏雜辨)』: 불교의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며 불교의 혁파를 강력히 요구

 

2. 태조(太祖) 불교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일부의 불교계의 폐단을 제거하고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을 제한하는 수준으로 마침

 

3. 태종(太宗): 성리학을 공부한 첫번째 조선의 왕 /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 본격화

   - 태종 5년(1405): 국가에서 지정한 사원에만 토지와 노비를 지급, 나머지 사찰들을 혁파

      11개 종단, 242 개 사찰 유지됨 / 사찰당 20~200결(結)4)의 토지와 10~100여 명의 노비가 인정

      그 이외에 불교계가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 모두 몰수(사원전(寺院田) 3~4만 결과 노비 8만 명 정도가 몰수 됨)

   - 태종 7년(1407): 11개 종단이 7개 종단으로 감소, 남은 종단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總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4. 세종(世宗) 초기에는 억불책 더욱 강화

    - 세종 6년(1424): 7개 종단을 다시 선(禪)ㆍ교(敎)의 양종(兩宗)으로 통합 / 사찰의 갯수도 선ㆍ교 각각 18사찰씩 36개만 존속

      국가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던 승록사 폐지, 대신에 불교 자체의 기관으로서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설치

       都城 내부의 내불당(內佛堂) 폐지,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제한



5. 세조(世祖): 사원전(寺院田)을 확대하고 수조권(收租權) 보장하는 등 불교정책 완화, 불교경전 인쇄와 보급을 위한 간경도감 설치 

     사찰과 승려 수 다시 크게 증가

 

6. 성종(成宗)  불교에 대한 억제정책 강화 / 세조대의 불교 정책 완화로 조선 전국 10,000여 곳의 사찰에서 100,000여 명의 승려들이 무위도식하여 나라의 병폐가 된다! / 적극적인 억압정책 추진. 

/ 그러나...대비들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후원으로 금강경삼가해, 천수경, 오대진언, 육조단경 등의 한글로 번역 간행됨 

    - 성종 2년(1471)  :  도성 안의 염불소와 간경도감 폐지
    - 성종 23년(1492): 승려의 신분증인 도첩 발급 중지 / 승려는 환속시켜서 군역에 충당


7. 연산군~ 중종 : 사원의 토지 몰수, 승려 환속, 과거 제도의 僧科를 폐지하여 국가의 불교교단 및 승려 관리 제도를 완전히 혜체
    - 중종 5년(1510) : 다수의 사찰 혁파, 사찰의 토지를 향교(마을단위 성리학 교육기관)에 소속
    - 중종 11년(1516):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의 最高 법전)』에서 승려의 출가를 규정한 도승조(度僧條) 삭제(불교에 대한 공식적 폐불을 상징) 

      승려로서의 신분 보장 철폐,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는 완전히 몰수당할 상황이 됨 

      깊은 산속의 작은 사찰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승려들이 존속 

 

 

8. 명종(明宗)

   - 명종 5년(1550) : 문정왕후가 보우(普雨)를 선종판사로 등용, 선종-교종 양종을 재건 / 과거시험의 승과와 도첩제 다시 실시
   - 명종 20년(1565)에 문정왕후의 정책들이 대부분 다시 폐지, 그러나 이후 불교 부흥의 기틀마련 

      임진왜란의 僧軍 지도자이고 조선 후기 불교계 중심인물인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년),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년)이 승과에 합격하고 중앙 정계에 알려지기 시작함

 

9.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승군 활약

 

10. 사찰의 중수와 경제 기반 (17세기 중반 ~18세기)
    -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승군 활동을 통해 불교계의 위상이 높아짐 / 사찰의 중창불사도 활성화 

       17세기 중반 이래 18세기까지 사찰의 중창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큰 사찰들은 이 때 창건되거나 재건됨

 
   - 선조, 광해군: 중심 전각의 복원 공사

   - 숙종(肅宗)~ 정조(正祖): 사찰 2차 중창 사업 시행 / 법당의 재건, 불상 및 불화조성 크게 증가, 야외 법회에 사용되는 대규모 괘불 다수 조성


   - 왕실이 불교를 보호: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사찰 등장, 특별 우대 조치 시행

     예) 정조:  부친을 추모하는 용주사 창건, 세자 탄생에 대한 감사로 석왕사에 비문을 내리고 토지를 기부


11. 기타

  -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승려들의 계(契) 조직은 사찰을 유지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 마련

   - 17세기 이후에 승려들은 개인 전답 등 사유 재산 소유 / 보사청(補寺廳)을 설치하여 사찰의 경제적 토대 마련

   - 19세기에는 오히려 수취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사찰에 대한 공납과 과세도 과도해져 사회적 문제가 됨

 

 

조선의 기본정책은 숭유억불이었고, 한때 완전히 폐불의 상태까지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net과 KJ 에서는 초기에 성리학자들이 사찰을 불태우고, 승려를 살해했다 라는 극단적 사건만을 마구 떠들며 조선의 억불정책의 폭력성, 잔인성을 부각시키려고 하고 있으나....

실제 조선 500년 동안 상당기간동안 사찰의 재산소유를 인정하고, 과거제도에 僧科를 두어 승려의 신분을 국가가 보장했다. 

물론 士林의 등장으로 억불은 거의 폐불의 지경까지 강화되지만... 

두 차례 戰亂의 僧兵軍 활약으로, 호국불교의 가치가 크게 인정받고

왕실의 적극적인 보호와 지원으로 18세기에 이르러 크게 중흥되고, 17~18세기에는 불교 중흥의 경제적 기반까지 회복됨

이후 19세기에는 오히려 국가의 중요한 공납/과세 대상이 된다. 

 

즉, 일부 일본측의 주장처럼 조선의 불교는 완전히 망해서 명맥만 유지했다 라는 상황은 분명히 fact이나, 약간의 부연 설명이 생략된 것이다.

이에 위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보완되어야 한다. 

“15세기”  조선의 불교는 완전히 망해서 명맥만 유지했다.

 

끝. 

 

불교에서 가장 존귀한 세가지 보물이라는 佛, 法, 僧을 상징하는 한국의 대표적 사찰 3개의 사진

 

1.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 경상남도 양산시 소재):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최초로 안장되었다는 사찰

 

 

 

 

 

2.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 경상남도 합천 소재): 대승불교 경전을 총괄한 팔만대장경 목판이 보관된 사찰

 

 

 

: 팔만대장경이 보존되고 있는 장경각(藏經閣 )

 

3.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 전라남도 순천시 소재) : 三韓(신라, 고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국사(國師)와 고승(高僧)을 배출한 사찰, 지금도 승려들의 교육 및 수도(修道)의 중심 사찰이다.

 

 

 

 

 


朝鮮時代仏教は完全に破壊, 絶滅されたことか?

KJの一部日本IDの主張によれば, 旧韓国末と庚戌国恥(庚戌国恥/韓日併合)当時日本から多数僧侶が流入された状況のみを断片的に根拠して

朝鮮時代仏教が完全に破壊されて仏教伝統が絶滅されたというニュアンスの主張を広げる.

そして現在韓国の仏教はそのように日本に流入されてまた活性化になってその後を引き続いているという主張をしている.

代表的な例が下のリンクスレによるレス

韓国側: /kr/board/exc_board_9/view/id/2676668/page/3

日本側: /jp/board/exc_board_9/view/id/2676668/page/3

ここに朝鮮時代仏教と係わってください事件とその内容を整理して, 偏狭な誤解を少し払拭させようとする.

複雑で, 専門的な分野で本人もその分野の素養や知識も不足だから単純に年代記形式で情報を提供する.

1. 鄭道伝(朝鮮開国の主導者, 高麗の新進士大夫リーダー)の 『仏氏雑弁(仏氏雑弁)』: 仏教の倫理的問題と社会的弊端を指摘して仏教の廃止を強力に要求

2. 太祖(太祖) 仏教を崇拜したから一部の仏教係の弊端をとり除いて僧侶たちに対するひどい特権を制限する水準でたまたま

3. 太宗(太宗): 性理学を勉強した一番目朝鮮の王 / 仏教に対する抑圧政策本格化

- 太宗 5年(1405): 国家で指定した社員にだけ土地と奴婢を支給, 残り査察たちを廃止

11個縦断, 242 個査察 維持される / 査察だ 20‾200きめ(結)4)の土地と 10‾100余名の奴婢が認定

その以外に仏教係が保有していた土地と奴婢皆沒収(寺院田(寺院田) 3‾4万結果奴婢 8万人位が沒収になる)

- 太宗 7年(1407): 11個縦断が 7個縦断で減少, 残った縦断は曹渓宗, 天台宗, 華儼宗, ザウンゾング(慈恩宗), 重臣種(中神宗), 総南宗(総南宗), 始興種(始興宗) など



4. 世宗(世宗) 初期にはオックブルチェックもっと強化

- 世宗 6年(1424): 7個縦断をまた線(禅)・校(教)の良種(両宗)で統合 / 査察の数も線・校それぞれ 18査察ずつ 36個だけ尊属

国家で仏教係を管理したスングロックサ廃止, 代りに仏教自らの機関として禅宗と教宗の都会所(都会所) 設置

都城 内部の内仏だ(内仏堂) 廃止, 僧侶たちの都城出入りを制限



5. 世祖(世祖): 寺院田(寺院田)を拡大して水槽圏(収租権) 保障するなど仏教政策緩和, 仏教経典印刷と普及のための刊経都監設置

お寺と僧侶数また大きく増加

6. 成宗(成宗) 仏教に対する抑制政策強化 / 世祖台の仏教政策緩和で朝鮮全国 10,000余所の査察で 100,000余名の僧侶たちが無駄食いして国の病幤になる! / 積極的な抑圧政策推進.

/ しかし...備えたちを中心にする王室の後援に金剛経ご遠慮して, 千手経, 五大真言, 六朝端境などのハングルで翻訳刊行される

- 成宗 2年(1471) : 都城中の念仏所と刊経都監廃止
- 成宗 23年(1492): 僧侶の身分証である図牒発給中止 / 僧侶はげんぞくさせて軍役に充当


7. 燕山君‾ 中宗 : 社員の土地沒収, 僧侶げんぞく, 過去制度の 僧科を廃止して国家の仏教教壇及び僧侶管理制度を完全にヒェチェ
- 中宗 5年(1510) : 多数の査察廃止, 査察の土地を郷校(村単位性理学教育機関)に所属
- 中宗 11年(1516): 『経国大典(経国大典: 朝鮮の 最高 法典)』で僧侶の出嫁を規定した度僧組(度僧條) 削除(仏教に対する公式的廃ドルを象徴)

僧侶としての身分保障撤廃, 査察に属した土地と奴婢は完全に沒収される状況になる

深い山奥の小さな査察たちを中心に少数の僧侶たちが尊属

8. 明宗(明宗)

- 明宗 5年(1550) : 文定王后が普愚(普雨)を禅宗判事で登竜, 禅宗-教宗良種を再建 / 過去試験の僧科と度牒制また実施
- 明宗 20年(1565)に文定王后の政策たちが大部分また廃止, しかし以後仏教復興の基礎用意

壬辰の乱の 僧軍 リーダーで朝鮮後期仏教係心捧である瑞山休廷(西山休静, 1520‾1604年), 使命有情(四溟惟政, 1544‾1610年)が僧科に合格して中央政界に知られ始め

9. 壬辰の乱と丙子胡乱の僧軍活躍

10. 査察の重水と経済基盤 (17世紀中盤 ‾18世紀)
- 二度の戦乱以後僧軍活動を通じて仏教係の位相が高くなり / 査察の重唱仏事も活性化

17世紀中盤であると言う 18世紀まで査察の重唱が活発に成り立ったし現存する大部分の大きい査察たちはこの時創建されるとか再建される


- 先祖, 光海君: 中心全角の復元工事

- 肅宗(肅宗)‾ 情調(正祖): 査察 2次重唱事業施行 / 法堂の再建, 仏像及び仏画造成大きく増加, 野外法会に使われる大規模掛け仏多数造成


- 王室が仏教を保護: 王室の位牌の面倒を見る査察登場, 特別優待措置施行

例) 情調: 父親を追慕する竜珠寺創建, 王世子誕生に対する感謝でソックワングサに碑文を下げて土地を寄付


11. その他

- 16世紀末から始まった僧侶たちの係(契) 組職は査察を維持する重要な経済的基盤用意

- 17世紀以後に僧侶たちは個人田畑など事由財産所有 / ボサチォング(補寺庁)を設置して査察の経済的土台用意

- 19世紀にはむしろ受取体制が乱れられながら査察に対する貢納と課税も過度になって社会的問題になる

朝鮮の基本政策は崇儒抑仏だったし, ひととき完全に廃ドルの状態まで仏教を弾圧したが....

netと KJ では初期に性理学者たちが査察を燃やして, 僧侶を殺害したという極端的事件のみをでたらめに騷いで朝鮮の抑仏政策の暴力性, 残忍性を浮上させようと思っているか....

実際朝鮮 500年の間相当期間の間査察の財産所有を認めて, 科挙制度に 僧科を置いて僧侶の身分を国家が保障した.

もちろん 士林の登場で抑仏はほとんど廃ドルの地境まで強化されるが...

二度 戦乱の 僧兵軍 活躍で, 護国仏教の価値が大きく認められて

王室の積極的な保護と支援で 18世紀に至って大きく中興されて, 17‾18世紀には仏教中興の経済的基盤まで回復する

以後 19世紀にはむしろ国家の重要な貢納/課税対象になる.

すなわち, 一部日本側の主張のように朝鮮の仏教は完全に滅びて命脈だけ維持したという状況は確かに factや, 少しの敷衍説明が省略されたのだ.

ここに上の主張は次のように補完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15世紀" 朝鮮の仏教は完全に滅びて命脈だけ維持した.

終り.

仏教で一番尊い三種類宝物という 仏, 法, 僧を象徴する韓国の代表的査察 3個の写真

1.仏宝査察(仏宝寺刹) 通度寺(通度寺, 慶尚南道梁山市所在): 釈迦の真身舍利が最初に鞍されたというお寺

2. 法宝査察(法宝寺刹) 海印寺(海印寺, 慶尚南道往川所在): 大乗仏教経典を統べた八万大蔵径木版が保管された査察

: 八万大蔵径が保存している張経閣(蔵経閣 )

3. 僧宝の寺(僧宝寺刹) 松広寺(松広寺, 全羅南道順川市所在) : 三韓(新羅, 高麗, 朝鮮)の歴史をひっくるめて一番多い国史(国師)と上人(高僧)を排出したお寺, 今島僧侶たちの教育及び首都(修道)の中心査察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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