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소개 Relationship

 

세종 6년(1424) 1월 5일 일본 사신 규주와 그 일행이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세종 대왕은 예조 좌랑 김진을 사신들의 관사로 보내 식사하기를 권고했으나, 사신들은 굳이 사양하고 먹지 않았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규주 일행은 단식 투쟁을 계속했다. 왕이 박희중·이예·윤인보를 보내 음식을 먹기 권했으나, 또한 먹지 않았다. 왜 이 외교관들은 세계 외교사에서도 유례없는 단식 투쟁을 했는가?

 

바로 열흘 전인 세종 5년(1423) 12월 25일의 「세종 실록」은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과 선장 구준을 비롯한 135명이 대궐에 들어와 토산물을 바치자, 왕은 이들이 이미 올린 일본 국왕의 글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기록했다.

 

“너희 국왕이 요구한 대장경 판은 우리 나라에 오직 한 본 밖에 없으므로 요청에 응하기 어렵다. 다만 “밀교 대장경 판”과 “주 화엄경 판”, “한자 대장경의 전부”를 보내려고 한다.”

그러자 규주가 대답했다.

 

“저희 왕이 해마다 사람을 보내 대장경 판을 요청해 번거롭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경판을 하사하시면 앞으로는 경판을 청구하는 번거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밀자(산스크리트 문자)는 저희 왕이 원래 해독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한자 본 대장경 판을 하사하신다면, 저희 왕은 반드시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것이며, 신이 사절로 온 것도 함께 영광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 대왕은 다시 거부했다.

 

“한자 판은 역대 왕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 다만 한 본뿐이다. 만약 겹쳐서 여러 벌 있다면, 굳이 아껴 너희 국왕에게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겠느냐.”

 

이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쉽게 포기하는 듯 했다. 규주는 “성상의 하교가 자상하시니 깊이 감사하고 또 깊이 감사하옵니다. 신들도 또한 잘 헤아려서 아뢰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물러났다.

 

사신들을 접견하기 전에 세종 대왕은 일본 국왕이 보낸 글을 보고, “이제 대장경 판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인데 이웃 나라에서 달라고 하니 주는 게 어떤가”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조선 건국 이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국가 정책을 펴 왔으니, 불교 경전을 인쇄하는 데 쓰는 대장경 판이 무용지물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다른 이유로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비록 경판은 아낄 물건은 아니지만, 지금 일본이 계속 요구한다고 해서 일일이 따르다가 나중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요구하면 곤란해집니다. 이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 못 됩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오늘날 국보로 지정된 팔만 대장경이 잠깐이나마 일본으로 건너갈 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일본 국왕이 대장경 판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따라서 두 번째로 거절당한 것이다.

 

규주를 비롯한 일본 사신은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재고를 요청하는 글을 다시 올렸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 그리하여 해를 넘겨 1월 4일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 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단식 투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왕은 1월 6일 박희중·이예·윤인보를 보내 다음과 같은 자신의 말을 전하고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다.

 

너희들이 경판을 얻지 못한다고 음식을 끊고 먹지 않는데, 경판을 얻고 얻지 못하고는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데에 달린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사신으로서 한 가지가 뜻에 맞지 않는다고 경솔하게도 단식을 하며 트집을 부리려 하니, 이 어찌 사신의 체통이라 하겠는가.

 

규주 일행은 이 말을 듣고서야 단식을 풀고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일이 여기서 끝난 건 아니었다. 규주 일행과 함께 온 가하라는 일본 승려가, 규주가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몰래 빼내 조선 관리에게 넘겼다. 가하에게서 그런 편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이춘발이라는 조선 관리가 후한 포상을 약속하며 가하를 부추겼던 것이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지금 조선에 와서 힘써 대장경 판을 요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러니 전함 몇천 척을 보내 약탈해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조선의 조정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에 포로로 갔다가 돌아온 조선 사람의 제보가 미리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듣고 전한 이야기는 이러했다.

 

대마도에 있을 때, 일본 국왕이 도주에게 “이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대장경 판을 구하려 한다.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침략하는 방법을 쓸 것이니, 너희들도 전함을 수리해 따라야 한다”고 통고했다.

 

왕(세종)은 이 보고를 듣고

“비록 저들이 말 못 할 악한 짓을 하려고 해도, 우리는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한편 편지를 빼돌린 가하는 일본 사신들에게 잡혀 감금당했고, 일본 사신들은 가하의 조작극이라며 발뺌했다.

 

이듬해인 세종 7년(1425) 5월 범령은 다른 사신들과 함께 다시 조선을 찾았고, 대장경 판을 요청하는 일본 국왕의 편지를 다시 올리고 또다시 거절당했다. 거듭 실패했는데도 범령은 일본 사신으로서 조선을 계속 방문했다.

 

그리고 세종 14년(1432) 5월 4일 부산포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듣고 세종은 신하를 보내 범령의 빈소에 문상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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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 高麗大藏經](제작 1237~1253년)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고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겉으로는 조선에 海印寺大藏經板를 하사해 달라고 하고 겉으로는 화친을 말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고 물건을 주지 않으면 침략해서 빼앗으려 한 일본..

 

그리고 이 일을 먼저 알고 대비함과 동시에 그런 무례한 사신단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않았던 조선

 

그렇게 여러 차례 왕례하며 부산항에서 일본의 사신이 죽자 빈소를 마련해 문상하도록 배려해준 조선...

 

 

현재 일본에는 자랑하는 新脩大藏經가 있습니다.

 

新脩大藏經 (제작 1912∼1925년)

 

《高麗大藏經》을 모본으로 삼고, 인도의 산스크리트 경전, 팔리어 원전, 중국의 한역 경전을 비교 검토하는 등 학계에 보고된 모든 경전을 수집 정리하여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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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이런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高麗大藏經

 

이것을 빼앗고 싶었던 倭人

 

 

한국인의 눈에 倭人은 어떻게 보였을까?


朝鮮は日本にどんな国だ?

 

世宗 6年(1424) 1月 5日日本住んだギュズとその仲間が断食闘いに入って行った.

 

世宗大王は礼曹判書左とキム・ジンを使臣たちの冠詞に送って食事するのを勧告したが, 使臣たちは敢えて遠慮して食べなかった. 翌日の 1月 5日にもギュズ仲間は断食闘いを続いた. 王がバックフィズング・イイェ・ユンインボを送って食べ物を食べる勧めたが, また食べなかった. どうしてこの外交官逹は 世界外交社でも類例ない断食闘いをしたのか?

 

すぐ十日前の世宗 5年(1423) 12月 25日の 「世宗実録」は 日本国王の使臣ギュズ・汎霊と船長グズンを含めた 135人が大闕に入って来て物産を捧げよう, 王はこれらがもうあげた日本国王の文にこんなに返事したと記録した.

 

“君たちの国王が要求した大蔵経版は我が国にただ一本しかないので要請に応じにくい. ただ密教大蔵経版と株華厳経版, 漢字大蔵経の全部を送ろうと思う.”

するとギュズが答えた.

 

“うちの王が毎年人を送って大蔵経版を要請して煩わしくしないか気づかっています. しかし一番(回)鏡板を下賜すればこれからは鏡板を請求する煩わしさがないだろう. ところで押そう(サンスクリット文字)はうちの王が元々解読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だからもし漢字見た大蔵経版を下賜したら, うちの王は必ず心より感謝して喜ぶはずであり, 神さまが謝絶に来たことも共に栄え栄えしい事になるでしょう.”

 

しかし世宗大王はまた拒否した.

 

“漢字版は歴代王から伝えて下ったのがただ一本だけだ. もし重なって何着あったら, 敢えて惜しんで君たちの国王に与えないという心があるのか.”

 

が時までにしても彼らは易しくあきらめるようにした. ギュズは “星霜の下校が優しいから厚く感謝してまた厚くガムサハ来ます. 神々もまたよく推し量って申し上げるのです”と答えて退いた.

 

使臣たちを接見する前に世宗大王は日本国王が送った文を見て, “もう大蔵経版は私たちに無用の物なのに隣り国で甘いと言ったら株は蟹どうなのか”と臣下たちに聞いた. 朝鮮建国であると言う仏教を排斥して儒教を崇尚した国家政策を開いて来たから, 仏教経典を印刷するのに書く大蔵経版が無用の物ではないかと言うのだ. しかし臣下たちは他の理由で極力反対して出た.

 

たとえ鏡板は惜しむ品物ではないが, 今日本がずっと要求するからといっていちいち従っている途中後で与えることができない品物を要求したら困られます. これは遠い未来を見通すのがならないです.

 

すると王は臣下たちの言葉を受け入れた. 今日国宝に指定された八万大蔵径が少少でも日本に渡るかも知れない危機の瞬間だった. 篤い仏教徒だった日本国王が大蔵経版を要請したことは今度が二番目だった. したがって二番目で断られたのだ.

 

ギュズを含めた日本使臣はそのまま退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れで再考を要請する文をまた載せたが再び断られた. そして年を越して 1月 4日には最後の手段で断食闘いに突入したのだ.

 

断食闘いは長続きしなかった. 王は 1月 6日バックフィズング・イイェ・ユンインボを送って次のような自分の言葉を私はと食べ物を与えなさいと言い付けた.

 

君たちが鏡板を得ることができないと食べ物を切って食べないのに, 鏡板を得て得ることができなくては食べ物を食べて食べないことに走ったのではない. 君たちが使臣として一つが意味に当たらないと軽率にも断食をあげて言い掛かりを使おうと思ったら, このどうして使臣の体統とするのか.

 

ギュズ仲間はこの言葉を聞いてから断食を溶いて食べ物を食べた. しかし仕事がここで終わったのではなかった. ギュズ仲間と一緒に全加えなさいという日本僧侶が, ギュズが日本国王に送る手紙を密かに抜き取って朝鮮管理に突き出した. 加下からそんな手紙があるという話を聞いたイツンバルという朝鮮管理が後漢褒賞を約束して加下をけしかけたのだ. 手紙にはこんなに被せるよあった.

 

今朝鮮へ来て力をつくして大蔵経版を要求したが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だから戦艦幾千尺を送って掠奪して帰るのがどうなのか?

 

 

朝鮮の調整は大きく驚かなかった. 何故ならば日本に虜に行ってから帰って来た朝鮮人の情報提供があらかじめあったからだ. 彼が聞いて伝えた話はこうだった.

 

対馬島にある時, 日本国王が逃走に “もう朝鮮に使臣を送って大蔵経版を求めようと思う. もし承諾しなければ侵略する方法を使うはずだから, 君たちも伝えることを修理して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通告した.

 

王(世宗)はこの報告を聞いて

“たとえ彼らが話せない悪漢仕業をしようと思っても, 私たちは寛大に対するのがどうか”とこれ以上問題視しなかった.

 

一方手紙を引き抜いた加える日本使臣たちにつかまって監禁されたし, 日本使臣たちは加下の造作劇と言いながら言い抜けした.

 

翌年の世宗 7年(1425) 5月汎霊は他の使臣たちとともにまた朝鮮を尋ねたし, 大蔵経版を要請する日本国王の手紙をまたあげて再び断られた. 重ねて失敗したのに汎霊は日本使臣として朝鮮を ずっと訪問した.

 

そして世宗 14年(1432) 5月 4日釜山浦で 死んだ.

 

が消息を聞いて世宗は臣下を送って汎霊の殯所に弔問するよう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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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大蔵経板 [海印寺大蔵経板 = 高麗大蔵経](製作 1237‾1253年)

 

1237年(高宗 24)から 16年間にわたって高麗に侵入したモンゴル君の撃退を発源(発願)して大将図鑑(大蔵都監)と噴射図鑑(分司都監)を置いて作ったのだ.

 

表では朝鮮に 海印寺大蔵経板を下賜してくれと言って表では和親を言って 断食闘いを して品物を 与えなければ侵略して奪おうと 一日本..

 

そしてこの事を先に分かって備えることと同時に そんな無礼な使臣団に対しても問題視しなかった朝鮮

 

そのように何回もワングリェして釜山港で日本の使臣が死のう 殯所を用意して 弔問するように 気配りしてくれた朝鮮...

 

 

現在 日本には誇る 新脩大蔵経があります.

 

新脩大蔵経 (製作 1912〜1925年)

 

《高麗大蔵経》を模本で三考, 引導のサンスクリット経典, パーリー語原典, 中国の漢訳経典を比較検討するなど学界に報告されたすべての経典を収集整理して刊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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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でこんな歴史を教えていますか?

 

 

ユネスコ世界記録遺産に登載されている 高麗大蔵経

 

これを奪いたかった 倭人

 

 

朝鮮人の目に 倭人はどんなに見えただ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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