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이 地圖는 1481년 梁誠之(1415년~1482년)가 제작한 八道總圖이다

이 地圖는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新增東國輿地勝覽(1531년)에 수록되었으며

현존하는 고지도 중에  于山島가 그려진 地圖 중에 제일 오래된 地圖이다

이 地圖에는 于山島와 울릉도가  표기되어 있는데 于山島의 위치가 울릉도의 왼쪽에 있다

 

일본에서는 이 地圖를 근거로 于山島가 울릉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于山島가 독도라는 인식이 확립된 것은 언제 부터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가 于山國을 복속하였다는 기록은 있는데 于山島에 대한 기록은 없다

于山島라는 명칭이 문헌에 나타난 첫번째 기록은

1417년 2월 太宗實錄 제33권이다

 

해석)按撫使 金麟雨가 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 大竹 水牛皮 生苧  綿子  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 곳의 주민 3명을 데리고 왔다

그 섬의 호는 15구이고 남녀 합해 86명이었다

金麟雨가 그 섬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번이나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우의정 韓尙敬 6조 대간에 명하여

于山 武陵島의  거주민을 쇄출하는 것에 의논하게 하니 ...... 

太宗實錄 제33 太宗17년 (1417년) 2월  壬戌條 乙丑條

 

이 기록에서 于山島는 현재의 독도 武陵은 울릉도를 가리킨다

당시 朝鮮조정에서는 동해에 于山 武陵 2개의 섬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于山島=독도, 武陵 =울릉도 라는 인식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于山島 주민 86명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于山島는 현재의 울릉도 라고 봐야 한다  

 

이 武陵 거주민 쇄환 작업 당시 金麟雨의 직책은 (武陵等處按撫使)였다

즉 당시 朝鮮정부에서는 현재의 울릉도를 武陵이라고 인식했으며 武陵 주변의 섬들을 관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 金麟雨의 임무는 武陵(울릉도)주변의 섬들을 살피고 무릉의 거주민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으나

태풍으로 于山島(독도)까지 가지 못하고

于山島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다 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朝鮮정부에서는   金麟雨 데리고 왔던 사람이 3명뿐이었으므로

金麟雨를   다시 (于山武陵等處按撫使)라는 관직을 주고   武陵(울릉도)로 보낸다 2차 쇄환 작업이었던 것이다

 

2차 쇄환 작업에서 金麟雨의 관직이 (武陵等處按撫使)에서 (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바뀌었다

이것은 朝鮮정부에서  于山 武陵 2개의 섬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金麟雨는 세종7년(1425년)에 또 다시  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되어  제3차 쇄환 작업을 담당하였다

 

世宗實錄 券30 세종7년(1425년) 10월 乙酉條의 기록에

 

于山武陵等處按撫使 金인우가 본도에  피난한 남녀 20명을 수색하여 잡아와 복명했다

처음 金麟雨가 병선 2척을 거느리고 茂陵에 들어 갔는데 선군 46명이 타고 있던 船 한 척은 바람을 만나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본도는   현재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또 한자 표기가

武陵이 아니라 茂陵으로 되어 있다( 한자 발음은 같다  )

이 당시 까지 기록자에 따라 여러 명칭이 혼재되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金麟雨의 3차 쇄환을 통해 朝鮮정부에서는 武陵島의    群島의  중심은  武陵島이며 于山島는 武陵島의 부속섬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金麟雨의 3차 쇄환 작업을 前後로 武陵島 즉 현재의 울릉도를  于山島라고 부르는 사례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세종20년(1438년) 쇄환  작업을 맡았던   南盔와  曹敏의 관직이 茂陵島巡審敬差官인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東國文獻備考(1770년)

 

東國文獻備考 輿地考에 의하면

輿地志에 이르기를  鬱陵  于山 모두 于山國 땅인데 于山은  倭가 말하는 松島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17세기 18세기에 于山島를 松島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후 랑코(리앙쿠르) 부르다가

1905년 이후 다케시마 라고 부르고 있다

我國總圖

 

正祖(재위 1776년~1800년)代의 輿地圖에 수록된 地圖이다

울릉도와 于山圖가 표기되어 있다

 

 

我國總圖의 울릉도와 于山이 표기된 부분

 

東國文獻備考에 의하면

울릉 于山 모두 于山國 땅인데 于山은 倭가 말하는 松島다

 

1802년 일본의 고지도

 

추가 ) 朝鮮이 울릉도의 거주민  쇄환 작업을 했던 이유는  

고려말 朝鮮초기에 일본인의 침략 대상이 되었고 또 백성들이 세금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 가는 경우가

빈번했으므로   朝鮮정부에서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여지도 海東與地圖

 

 

 

 

 

 

 

이 地圖는 朝鮮 후기 전국 336개 고을을 그린 郡縣의 地圖 책이다

고을의 정보 묘사는 다른 地圖책에 비해 단순하게 그려졌다

산지는 산줄기를 連峰형태로 표현하였고 황색으로 채색하였다

하천의 경우 청색의 겹선으로  표현했고 郡縣의 경계는 흑색 점선으로 표현하였다  

于山島에는 산 봉오리가 그려져 있다  

 

 

19세기 제작된 海左全圖

 

 

 

 海左全圖의 일부

 鬱陵島와 于山 

 

이 地圖에는 각 읍 도로 역 주요 사찰 鎭 浦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于山島의 위치가 鬱陵島의 동남쪽에 그려져 있다

 

朝鮮시대 地圖에서는 于山島의 위치가 鬱陵島의  서쪽에 표기되고 있기도 하고 또 울릉도의 동쪽에

표기되고 있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鬱陵島의 동쪽으로  표기된 于山島는 독도가 아니라 竹嶼 즉  울릉도의 竹島 라고 주장하고 있다

 

朝鮮시대 18세기에 제작된 海東輿地圖에는 于山島에 산 봉오리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朝鮮정부에서 독도의 지형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산이 없는 울릉도의 竹島라고 보기 어렵다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地圖 海左全圖에는 于山島의 위치가 鬱陵島의 동남쪽으로 그려지고 있어

于山島는 일본이 주장하는 竹嶼 즉 울릉도의 竹島가 아닌 것이다  

 

 

 


于山島が 独島である理由

が 地図は 1481年 梁誠之(1415年‾1482年)が製作した 八道総図だ

が 地図は朝鮮時代人文地理で 新増東国輿地勝覧(1531年)に収録されたし

現存する古地図の中に 于山島が描かれた 地図 の中に一番長くなった 地図だ

が 地図には 于山島と鬱陵島が表記しているのに 于山島の位置が鬱陵島の左側にある

日本ではこの 地図をふまえて 于山島が鬱陵島と主張している

韓国の歴史で 于山島が独島という認識が確立されたことはいつからだろう

三国史記新羅本紀によれば新羅が 于山国を服属したという記録はあるのに 于山島に対する記録はない

于山島という名称が文献に現われた一番目記録は

1417年 2月 太宗実録 第33冊だ

解釈)按撫使 金麟雨が 于山島から帰って来て物産 大竹 水牛皮 生苧 綿子 検樸木 などを捧げたまたその所の住民 3人を連れて来た

その島の号は 15焼き物で男女合わせて 86人だった

金麟雨がその島へ行ってから帰って来る時に二回も台風に会ってやっと暮して来ることができたと言う

右議政 韓尚敬 6兆台諌に命じて

于山 武陵島の居住民をスェツルすることに議論するようにするの ......

太宗実録 第33 太宗17年 (1417年) 2月 壬戌條 乙丑條

が記録で 于山島は現在の独島 武陵は鬱陵島を示す

当時 朝鮮調整では東海に 于山 武陵 2個の島があるというのは分かっていたが

于山島=独島, 武陵 =鬱陵島という認識はまだ確立されないことが分かる

于山島 住民 86人だと言ったがこの時の 于山島は現在の鬱陵島と思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が 武陵 居住民刷還作業当時 金麟雨の職責は (武陵等処按撫使)だった

すなわち当時 朝鮮政府では現在の鬱陵島を 武陵だと認識したし 武陵 周辺の島々を管掌するようにしたことだ

当時 金麟雨の任務は 武陵(鬱陵島)周辺の島々を察して武陵の居住民を連れて来ることだったが

台風で 于山島(独島)まで行くことができずに

于山島 人 3人を連れて来たと表現したはずだ

朝鮮政府では 金麟雨 連れて来た人が 3人だけだったので

金麟雨を再び (于山武陵等処按撫使)という官職を与えて 武陵(鬱陵島)に送る 2次刷還作業だったことだ

2次刷還作業で 金麟雨の官職が (武陵等処按撫使)で (于山武陵等処按撫使)に変わった

これは 朝鮮政府で 于山 武陵 2個の島に対するもうちょっと正確な情報を得るためだったように見える

金麟雨は世宗7年(1425年)に再び 于山武陵等処按撫使に任命されて第3次刷還作業を担当した

世宗実録 券30 世宗7年(1425年) 10月 乙酉條の記録に

于山武陵等処按撫使 金インウが本島に避難した男女 20人を捜索して取って来て復命した

初めて 金麟雨が兵船 2尺を従えて 茂陵に入って行ったが先君 46人が乗っていた 船 一尺は風に会って

の間所が分からなくなったという記録がある

が記録で本島は現在の鬱陵島を示すことか明らかではなくてまた漢字表記が

武陵ではなく 茂陵になっている( 漢字発音は同じだ )

が当時まで記録者に従って多くの名称が混在されて使われたことを分かる

金麟雨の 3次刷還を通じて 朝鮮政府では 武陵島の 群島の中心は 武陵島であり 于山島は 武陵島の部属島という認識が形成された

金麟雨の 3次刷還作業を 前後で 武陵島 すなわち現在の鬱陵島を 于山島と呼ぶ事例は消えるようになった

これは世宗20年(1438年) 刷還作業を引き受けた 南?わ 曹敏の官職が 茂陵島巡審敬差官であるのを通じて分かる

東国文献備考(1770年)

東国文献備考 輿地考によれば

輿地志に至るのを 鬱陵 于山 皆 于山国 地なのに 于山は 倭が言う 松島だと明らかにしている

日本は 17世紀 18世紀に 于山島を 松島と呼んでいた以後ラングコ(リアングクル) 呼んでから

1905年以後竹島と呼んでいる

我国総図

正祖(在位 1776年‾1800年)代の 輿地図に収録された 地図だ

鬱陵島と 于山図が表記している

我国総図の鬱陵島と 于山が表記した部分

東国文献備考によれば

鬱陵 于山 皆 于山国 地なのに 于山は 倭が言う 松島だ

1802年日本の古地図

追加 ) 朝鮮が鬱陵島の居住民刷還作業をした理由は

高麗末 朝鮮初期に倭寇の侵略対象になったしまた民たちが税金を避けて鬱陵島に逃げだす場合が

頻煩したので 朝鮮政府で鬱陵島とその周辺の島々を管理するためのことだった

18世紀に製作された解凍余地も 海東与地図

が 地図は 朝鮮 後期全国 336個村を描いた 郡県の 地図 本だ

村の情報描写は他の 地図本に比べて単純に描かれた

住んだからは山なみを 連峰形態で表現したし黄色で彩色した

河川の場合青色の重船で表現したし 郡県の境界は黒色点線で表現した

于山島には山つぼみが描かれている

19世紀製作された 海左全図

海左全図の一部

鬱陵島と 于山

が 地図には各邑都で駅州です査察 鎭 浦 などの内容が収録されている

于山島の位置が 鬱陵島の東南の方に描かれている

朝鮮時代 地図では 于山島の位置が 鬱陵島の西の方に表記していたりaしまた鬱陵島の東に

表記していたりする

日本では 鬱陵島の東に表記した 于山島は独島ではなく 竹嶼 すなわち鬱陵島の 竹島 と主張している

朝鮮時代 18世紀に製作された 海東輿地図には 于山島に山つぼみが描かれているのに

これは 朝鮮政府で独島の地形を認知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山がない鬱陵島の 竹島と思いにくい

19世紀中葉に製作された 地図 海左全図には 于山島の位置が 鬱陵島の東南方へ描かれていて

于山島は日本が主張する 竹嶼 すなわち鬱陵島の 竹島ではないこと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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