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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의 계절이다. 문화재청은 길고 긴 추석 연휴를 맞아 종묘, 조선왕릉 등과 함께 주요 고궁을 무료로 개방, 심지어 심야까지 개방하였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고궁을 찾아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즐겼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광화문 너머 늠름히 서 있는 경복궁부터 시작해서 구중궁궐이란 말이 실감나는 창덕궁, 그 옆에서 단아한 모습으로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창경궁, 서울시청 앞에서 궁궐인 듯 아닌 듯 근현대사의 온갖 사건들을 지켜봤을 덕수궁, 그리고 비록 모두 복원된 건물이지만 그 위치에 존재한 이유만으로도 반가운 경희궁까지.

모두가 600년 수도 서울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고궁들이지만, 그것들은 특히 나와 같이 서울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특별하다. 어쨌든 많은 기억들이 고궁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경복궁을 뛰어다니던 기억, 창경원에서 동물들을 구경하던 기억, 커서는 애인과 창덕궁을 거닐고 덕수궁 앞에서 촛불을 들었던 기억까지 고궁은 늘 내 옆에 있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고궁들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대상이 너무 가깝게 있어서 오히려 그 가치를 모르는 경우인데, 다행히 이와 관련하여 좋은 길잡이가 등장했으니 그것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이다.

개인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9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하루는 도덕 선생님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오시더니 학생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셨는데 바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었다.

이후 나의 여행은 항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함께 했다.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저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책을 들고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의 발길을 따라 남도와 내포를 걸었고, 경주를 다시 갔으며, 운문사와 부석사에서 예불을 들었다. 가장 최근에는 제주도 편을 들고 관광객들이 가지 않는 곳만 골라 다녔다.

감히 단언컨대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유홍준의 시각으로, 그리고 거기에 나의 시선을 조금 보태 “우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이 “국토”를 체험하여 “국민”을 만들어 나가는 근대 교육의 과정이라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함께 하는 여행은 이 땅에 존재했던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는 과정이요, 고금을 망라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역사를 배웠고, 인문학을 깨쳤다. 여행길에 떨어진 작은 기왓장만 보더라도 그것의 의미를 찾는 것은 순전히 유홍준 덕분이었다. 그는 이 시대의 유능한 가이드로 우리를 전국방방 곳곳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그런 유홍준이 드디어 서울편을 냈다. 저자 자신의 표현대로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서울편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아무리 경주에 문화유산이 많고 남도에 먹고 볼 것이 풍부해도 서울은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서울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이지 않은가.

비록 3편에서 잠깐 서울 내 백제 유적을 다루고, 6편에서 경복궁과 관련된 글을 실었지만 태부족이다. 서울을 그것들로 퉁치기에는 서울은 너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한 현재진행형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과 관련된 수많은 서적들이 서가에 꽂혀있고, 저자 자신이 서울 출신이니만큼 부담감도 더하겠으나, 어쩔 수 없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서울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울 답사기는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권은 종묘와 궁궐, 둘째 권은 한양도성과 자문밖, 셋째 권은 인사동, 북촌 등의 묵은 동네, 넷째 권은 한강과 북한산으로 이번에 출판된 것을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이다.

서울에 관한 책을 쓰면서 저자가 가장 고민한 것은 서울의 역사적 상징이다. 일본 교토가 “사찰의 도시”이고 중국 소주가 “정원의 도시”라면 서울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의 대답은 바로 “궁궐의 도시”이다.


저자는 세상에는 궁궐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꽤 많지만 서울처럼 시내에 고궁이 5개나 있는 곳은 없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 궁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세세히 이야기하며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갔던 공간 곳곳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노라면 경복궁을 피해 창덕궁을 지었던 태종 이방원의 번뇌도, 창덕궁 부용정에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꿨던 정조의 기세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는 우리 궁궐을 이야기하면서 말도 안 되는 비교를 경계한다. 대신 우리의 문화유산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해 주목한다. 비록 규모 등에서는 중국의 자금성 등을 따라갈 수 없지만, 우리의 고궁들은 하나같이 그 땅의 지세에 맞게 자연과 어울릴 수 있도록 가장 인간적인 형태로 지어졌음을 강조한다. 예컨대 창덕궁의 후원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고 단언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는 것은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그것은 이 땅의 문화유산을 관통하는 기조이며, 우리가 앞으로도 잃지 말아야 할 우리의 미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가 서울편의 맨 앞머리에 종묘를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종묘야말로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문화유산의 정수이며,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질을 가장 간결하고 극적으로 잘 드러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종묘가 건축으로서 이런 정밀(靜謐)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조형의지의 발로이기보다는 영원에의 염원이 격조 높은 솜씨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빚어진 일품이다. 조형의지라는 것은 인간적인 한계를 갖지만 어떤 염원이 만든 작품은 그 한계를 초극한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20p

눈을 감고 그리는 서울

서울 첫째 편이 종묘와 궁궐 등 조선시대의 핵심적인 공간을 기술했다면, 서울 둘째 편은 한양도성과 자문밖, 동관왕묘 등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래서 오히려 더 과거 서울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적합한 공간을 서술한다.

예컨대 한양도성은 서울의 상징이자, 서울의 지리적 현현이다. 성벽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많이 철거되어 그 전체적 형태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책에서 보여주는 사진들과 생생한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어렴풋이 그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순성놀이를 했던 선인들과 한양도성 위에서 바라봤을 풍경들.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자문밖에 대한 묘사들이었다. 지금이야 구기터널, 북악터널, 자하문터널 등이 뚫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지만, 과거 자문밖은 북한산부터 시작해서 북악산까지 짙은 수풀이 덮여 있는, 하얀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에 시원한 물이 흐르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으리라. 저 멀리 설악산이나 금강산도 부럽지 않은. 그러니 연산군이 그곳에 탕춘대를 만들고 많은 사대부들이 그곳에 별장을 지을 수밖에.

어쩌면 청와대가 경복궁 뒤에 들어섰던 건 천운인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북악산 주변이 개발의 광풍에서 빗겨나고 아직까지 그나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그곳을 어떻게 보존할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아는 만큼 그곳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보호하게 되겠지. 부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혀 그와 같은 가치가 공유되기를 바랄 뿐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http://v.media.daum.net/v/20171018101705937?rcmd=rn


はやく来なさい, こんなソウルは初めだろう?

古宮の季節だ. 文化財庁は長くて長い秋夕連休に迎え宗廟, 朝鮮王陵などとともに主要古宮を無料で開放, 甚だしくは深夜まで開放した. ここに多い市民たちが古宮を捜して家族たちと共に楽しい時間を楽しんだ.

北岳山を背景で光化門越しヌムルムヒ立っている景福宮から始めて九重宮燕と言う言葉が実感の出る昌徳宮, その横でたおやかな姿で威厳を失っていない昌慶宮, ソウル市役所の前で宮廷であるようにではないように近現代史のあらゆる事件を見守った徳寿宮, そしてたとえ皆復元された建物だがその位置に存在した理由だけでも嬉しい慶喜宮まで.

皆が 600年首都ソウルの歴史を証言している古宮たちだが, それらは特に私と一緒にソウルで生まれた人々に特別だ. とにかく多い記憶が古宮に絡んでいるからだ. 幼い頃ご両親と一緒に景福宮を走り回った記憶, チァングギョングワンで動物たちを見物した記憶, 大きくては恋人と昌徳宮をぶらついて徳寿宮の前で蝋燭を持った記憶まで古宮は常に私のそばにあった.

しかし切ないことは私を含めて多くの人々がそういう古宮たちがよく分からないという事実だ. 対象がとても近くあってむしろその価値が分からない場合なのに, 幸いにこれと関して良い道案内が登場したからそれはユホンジュン前文化財庁長の <私の文化遺産踏査記-ソウルの方>だ.

個人ごとに偏差はあるが 90年代から始めて今まで誰も一度読んで見たユホンジュンの <私の文化遺産踏査記>. 私がこの本を初めて接したことは中学校の時だった. 一日は道徳先生が本一冊を持って来たら学生たちに必ず一度読んで見なさいと勧めたがまさに <私の文化遺産踏査記>だった.

以後私の旅行は常に <私の文化遺産踏査記>とともにした. "分かる位感じるだけであり, 感じただけ見える. 愛すれば分かるようになって, 分かればボイナだから, あの時見えることは前のようではなかろう"と言う著者の言葉を証明でもするように私は本を持って全国あちこちを歩き回った.

彼の足に付いて南道と内包をかけたし, 競走をまた行ったし, 雲門寺と浮石寺で礼仏を持った. 一番最近には済州島肩を持って観光客たちが行かない所だけ選んで通った.

敢えてダンオンコンデそれは私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作って行く過程だった. ユホンジュンの視覚で, そしてそこに私の目を少し加えて "私たち"を思うようになった. 高等学生たちの修学旅行が "国土"を体験して "国民"を作って行く近代教育の過程なら, <私の文化遺産踏査記>とともにする旅行はこの地に存在した先人たちの息づかいを感じる過程であり, 古今を網羅した共同体を作って行く過程だった.

私は <私の文化遺産踏査記>を通じて歴史を学んだし, 人文学を悟った. ヨヘングギルに落ちた小さな瓦屋根だけ見てもそれの意味を捜すことは純然とユホンジュンおかげさまだった. 彼はこの時代の有能なガイドで私たちを全国放榜あちこちで案内した.

ところでそんなユホンジュンがいよいよソウルの方を出した. 著者自分の表現どおり "繰り返えして回って今こそソウルに帰って来た" のだ. 事実 <私の文化遺産踏査記>のソウルの方は遅れた行くことがある. いくら慶州に文化遺産が多くて南道に食べてみることが豊かでもソウルは越え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だ. 彼の言葉通りソウルは大韓民国の自尊心と同時に世界屈指の高度ではないか.

たとえ 3編でちょっとソウル内百済遺跡を扱って, 6編で景福宮と係わる文を載せたがひどく足りない. ソウルをそれらでトングチギにはソウルはとても長年の歴史を持っているし, また現在進行形の都市だからだ.

もちろんソウルと係わった幾多の書籍たちが本棚にささっていて, 著者自分がソウル出身であるほど負担も加えるが, 仕方ない. <私の文化遺産踏査記>でソウルを読むというのはまた他の楽しみであるしかあるか.

ソウル踏査記は皆の圏で構成されている. 第一圏は宗廟と宮廷, 二番目圏は漢陽都城とザムンバック, 三番目圏は仁寺洞, 北村などの泊った町内, 四番目圏は漢江とブッカン山に今度出版されたことを一番目と二番目本だ.

ソウルに関する本を書きながら著者が一番悩んだことはソウルの歴史的象徴だ. 日本京都が "査察の都市"で中国焼酒が "庭園の都市"ならソウルはどんなに規定することができるか? その質問の返事はすぐ "宮廷の都市"だ.


著者は世の中には宮廷を持っている都市がかなり多いがソウルのように市内に古宮が 5個もある所はないことを指摘する. そしていつもそうだったようにその宮廷でどんなことがあったのかを細細しく話して私たちがただすれちがった空間あちこちに生命を吹き入れる. 彼の目に付いて行っていたら景福宮を避けて昌徳宮を建てた太宗異邦院の煩悩も, 昌徳宮芙蓉亭で朝鮮のルネサンスを夢見た情調の勢いも分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だ.

も彼は私たちの宮廷を話しながら話にならない比較を警戒する. 代わりに私たちの文化遺産が持っている価値に対して注目する. たとえ規模などでは中国の資金性などに付いて行くことができないが, 私たちの古宮たちは一様にその地の地税に当たるように自然と似合うように一番人間的な形態で建てられたことを強調する. 例えば昌徳宮の後援位美しい所はないと言い切る.

ゴムイブルでファイブルチ(倹而不陋 華而不侈), すなわちつましいがむさくるしくなくて, 派手だがぜいたくではないことは朝鮮王朝の美学で韓国人の美学だ. それはこの地の文化遺産を貫く基調であり, 私たちが今後とも失ってはいけない私たちの美徳でもある.

このような脈絡で著者がソウルの方のもっぱら前髪に宗廟を位したことは決して偶然ではない. 宗廟こそ朝鮮王朝 500年が残した文化遺産の定数であり, 私たちの文化が持っている特質を一番簡潔で劇的によく現わす空間だからだ.

"宗廟が建築としてこんな精密(静謐)の空間を作り出したということは驚きべきだ. これはどんな造形意志の発露利己よりは永遠への念願が格調高い腕前を通じて自然にもたらした一品だ. 造形意志というのは人間的な限界を持つがどんな念願の作った作品はその限界を超極するという事実を雄弁している." -20p

目をつぶって描くソウル

ソウル第一偏移宗廟と宮廷など朝鮮時代の核心的な空間を記述したら, ソウル二番目便は漢陽都城とザムンバック, 東関王廟などその間私たちが忘れていた, それでむしろもっと過去ソウルの姿を想像するのに相応しい空間を敍述する.

例えば漢陽都城はソウルの象徴と同時に, ソウルの地理的燎現だ. 城壁は日帝強点期と産業化を経りながらたくさん撤去されてその全体的形態を想像しにくいが, 本で見せてくれる写真と鮮やかな話を総合して見ればぼんやりその姿が描かれたりする. 巡城遊びをした先人たちと漢陽都城の上で願った風景.

特に個人的に一番触れる部分は自問しか大韓描写たちだった. 今は球技トンネル, 北岳トンネル, 紫霞門トンネルなどが抜けて全然想像もできないが, 過去ザムンバックはブッカン山から始めて北岳山まで濃い茂みが覆われている, 白いお影石岩で成り立った谷に冷たい水が流れるまことに美しい所だったろう. あの遠く雪岳山や金鋼山も羨ましくない. だから燕山君がその所にタングツンデを作って多くの士大夫たちがその所に別荘を建てるしか.

もしかしたら青瓦台が景福宮後に立ち入ったのは天運かも知れない. そのおかげさまで北岳山周辺が開発の狂風でビッギョナでいまだにそれさえも昔の姿をそのままおさめているの. 今後ともその所をどんなに保存するかは現在を生きて行っている私たちの分け前であるでしょう.

著者の言葉通り私たちは分かる位その所を愛するようになって, 愛する位保護するようになる. なにとぞ <私の文化遺産踏査記>が多い人々に広く読ませてそのような価値が共有されるように願うだけだ. ユホンジュンの <私の文化遺産踏査記-ソウルの方>はまだ終わらなかった. 幸いだ.

http://v.media.daum.net/v/20171018101705937?rcmd=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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