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는 이미 1019 년에 전함을 이끌고 가서 화포를 앞세워 日本을 정복한 나라다.
태풍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일본의 주장이고 사실이 아니다.
日本의 《백련초》에는 997 년 高麗가 日本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
(九州)를 침공 했다고 하며, 5 백여 척을 앞세운 고려군高麗軍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쇼유키(小右記)에는 통상을 요구했다고 했지만, 통상 요구야, 19 세기 메국(米國)과 잉글랜
드 등이 한 것이고, 속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미 375 년에 黃海를 건너 韓半島 상륙작
전을 실시한 우리나라다. 高麗 말은 우리나라가 水戰이 아니라 海戰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
휘한지도 천 년이나 된 시점이다.
高麗軍은 海戰에 능숙해서 1 차 麗蒙遠征 때에도 日本軍과의 전투를 도맡았다. 몽고습래회
사(蒙古襲來繪詞) 에서도 蒙汗軍은 언제나 高麗軍 뒤에 숨어 있다. 高麗軍에 쫓긴 日本軍은
규슈(九州) 다자이후(大宰府 : 奈良)로 후퇴해서 농성전을 펼치며 高麗軍이 물려가기만을
기다렸다.
高麗의 항해술과 조선술이 막강함은 元史에도 나온다.
元나라의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부서졌으나, 高麗의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
2 차 원정 당시의 기술이다. 침몰한 것은 蒙汗의 배였던 것이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당시) 고려는 대선 300 척을 포함, 900 척의 배를 불과 4 개월 만에
만들어낼 수 있는 고도의 조선술이 있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축적된 기술이 아니었다(역사스
페셜 6권)
高麗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新羅 에게서 물려 받았다. 新羅는 375 년 당시 중국 동부에서 黃海를 건너 百
濟 땅 韓半島를 침공, 성공적으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끝내 百濟를 韓半島 에서마저 구축해 日本에 웅거
하게 만든 海上帝國이다.
<도화견문지> 6권 고려국 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일본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
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高麗はもう 1019 年に伝えることを導いて行って火砲を先に立たせて 日本を征腹した国だ.
台風で失敗したということは日本の主張で事実ではない.
日本の 《白蓮初》には 997 年 高麗が 日本が継続的な通常要求を断ると 3次要求以後には九州
(九州)を侵攻したと言って, 5 百余尺を先に立たせた高麗軍高麗軍の侵攻記録を残していたりする.
ショユキ(小右記)には通常を要求したと言ったが, 通常要求よ, 19 世紀メグック(米国)とインググルレン
ドなどがしたことで, 属国にするためだ. もう 375 年に 黄海を渡って 韓半島 上陸作
私はを実施した我が国だ. 高麗 言葉は我が国が 水戦ではなく 海戦で卓越な能力を足
フィしたのも千年もなった時点だ.
高麗軍は 海戦に上手で 1 次 麗蒙遠征 の時にも 日本軍との戦闘を引き受けた. モンゴル襲来回
死(蒙古襲来絵詞) でも 蒙汗軍はいつも 高麗軍 後に隠れている. 高麗軍に追い回された 日本軍は
九州(九州) 多者以後(大宰府 : 奈良)で後退して座り込み前を広げて 高麗軍がムルリョがギのみを
待った.
高麗の航海術とゾソンスルが莫強することは 元史にも出る.
元国の電線たちは皆突風にこわれたが, 高麗の伝えることは大部分無事だった
2 次遠征当時の技術だ. 沈んだことは 蒙汗の滲まれたのだ.
(ヨモングヨンハブグンの日本遠征当時) 煮こもうとする大統領選挙 300 尺を含み, 900 尺の船をわずか 4 ケ月ぶりに
作り上げることができる高度のゾソンスルがあった. これは一瞬に蓄積された技術ではなかった(ヨックサス
ペショル 6冊)
高麗の航海術とゾソンスルは 新羅 から受け継いだ. 新羅は 375 年当時中国東部で 黄海を渡って 百
済 地 韓半島を侵攻, 成功的に足場を用意して, 結局 百済を 韓半島 でさえ構築して 日本に雄拠
するようにした 海上帝国だ.
<桃花見聞誌> 6冊高麗国には次のように出る.
倭国は日本国だ. 倭という元々名前を恥ずかしがったが, 極東にあると真書 自らが日本だと部
ルンダ. 高麗の属国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