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방위청 방위 연수소 전사실 「전사 총서 히시마 공략 작전」(조운신문사)의 인용입니다.

 

 

【필리핀에서의 미군 포로】

 

「항복시 바타안 반도의 미국 필리핀군과 유랑민의 상황은, 사기는 완전히 쇠약해져 식료의 부족과 말라리아의 유행과의 싶은

극도로 쇠약하고 있었지만, 코레히드르 공략전을 목전에 앞둔 군으로서는, 그 준비나 방첩상의 관점, 야

미국 필리핀군의 포폭격에 의해서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때문에)라도, 이러한 포로나 주민을 원위치에 둘 수 있는거야

샀다.

 게다가 미국 필리핀군의 항복이 이외로 빨랐기 때문에, 이것들 포로에 대한 식료, 수용 시설, 수송 등에 관계해 준비

(을)를 행할 여유도 없었다.당시 , 군자체가 식료 및 수송력의 부족에 고심하고 있는 상태였다.했지만

라는 이것들 포로도 자연히 비교적 식량등을 보급하기 쉬운 지역에, 도보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

에 있었다.

(중략)

「죽음의 행진」에 관계되어 와치 참모장은,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래 바타안 반도는 마라리야가 횡행하는 지대이다.그런 만큼 적 아군 모두 마라리야에 걸려, 그 외에

뎅그열이나 이질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어 완전히 피곤했다.

 바타안의 히시마군의 포로는 5만이었지만, 그 외 일반 시민으로 군과 함께 바타안에 도망친 것이 약

2~3만은 셀 수 있어 합계8만에 가까운 포로가 있었다.1월부터 4월까지, 이럭저럭 3개월반도, 바타안

의 산중에 히 들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말라리아 그 외의 환자에 걸리고 있었다.그 그들을 후방에 낮추지 않으면

들 없었다.왜냐하면 군에게는 아직 코레히드르 공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이다.

 포로는 제일선으로부터 도보로 산페르난드에 보내졌다.호송하는 일본병도 함께 걸었다.수통 하나의 포

포로에게 비교해 배낭을 짊어져 총을 한편 있어로 걸었다.전행정 약 60수 킬로 남짓, 그것을 4~5일에 걸려 걸었다

이니까 소가 걷는을 닮은 행군이었다.지쳐 자르고 있었기 때문에이다.남국이라고 해도밤이 되면 쌀쌀해져

그리고, 일본병이 모닥불을 해, 식사 공급을 해 그들에게 식사를 주어 그리고 자신등도 먹었다.우연히 지나간 보도반

원이 보기 힘들어서 식료를 준 적도 있다.할 수 있으면 트럭으로 수송해야 했지.그러나 빈약한 장비의

일본군에 그 만큼의 트럭이 있을 리도 없었다.차기 작전, 즉 코레히드르섬공략 준비에도 호랑이

크는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였던 것이다.

(중략)

 물론 도중에서 푸드득 그들은 넘어졌다.그것은 그러나 말라리아 환자가 대부분이었다.한층 더 하나 더 붙어라

더하면, 그들은 트럭으로 이동하는 것을 상으로 해, 도보 행군에 길들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실태는 이상같습니다.말라리아에 걸린 포로를, 트럭에도 싣지 말고 5일정도 걷게 하면 넘어져 죽음

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가, 이 상황을, 장비가 갖추어지고 있는 미군측이 본다고 하면, 포로 학대와

말하도록(듯이) 옮겨 버리겠지요.일본군으로서는 포로를 학대하려는 의도는 없었겠지요가, 결과적으로

학대라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バターン死の行進の真実

防衛庁防衛研修所戦史室「戦史叢書 比島攻略作戦」(朝雲新聞社)の引用です。

 

 

【フィリピンでの米軍捕虜】

 

「降伏時バタアン半島の米比軍と流民の状況は、士気は全く衰え、食料の不足とマラリアの流行とのため

極度に衰弱していたが、コレヒドール攻略戦を目前に控えた軍としては、その準備や防諜上の観点、およ

び米比軍の砲爆撃によって傷つけないためにも、これらの捕虜や住民を原位置に留めておくことはできな

かった。

 しかも米比軍の降伏が以外に早かったため、これら捕虜に対する食料、収容施設、輸送などに関し準備

を行なう余裕もなかった。当時、軍自体が食料および輸送力の不足に苦慮している状態であった。したが

ってこれら捕虜もいきおい比較的食糧などを補給しやすい地域に、徒歩で移動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事情

にあった。

(中略)

「死の行進」に関し和知参謀長は、要旨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元来バタアン半島はマラリヤのはびこる地帯である。それだけに敵味方ともマラリヤにかかり、その他に

デング熱や赤痢に倒れる者もあって全く疲れていた。

 バタアンの比島軍の捕虜は五万であったが、その他一般市民で軍とともにバタアンへ逃げ込んだのが約

二〜三万は数えられ、合計八万に近い捕虜があった。一月から四月まで、かれこれ三ヶ月半も、バタアン

の山中にひそんでいたためほとんどがマラリアその他の患者になっていた。その彼らを後方にさげねばな

らなかった。なぜなら軍にはまだコレヒドール攻略が残っていたからである。

 捕虜は第一線から徒歩でサンフェルナンドへ送られた。護送する日本兵も一緒に歩いた。水筒一つの捕

虜に比し背嚢を背負い銃をかついで歩いた。全行程約六十¥数キロあまり、それを四〜五日がかりで歩いた

のだから牛の歩くに似た行軍であった。疲れきっていたからである。南国とはいえ夜になると肌寒くなるの

で、日本兵が焚火をし、炊き出しをして彼らに食事を与え、それから自分らも食べた。通りかかった報道班

員が見かねて食料を与えたこともある。できればトラックで輸送すべきであったろう。しかし貧弱な装備の

日本軍にそれだけのトラックのあるはずもなかった。次期作戦、すなわちコレヒドール島攻略準備にもトラ

ックは事欠く状態だったのである。

(中略)

 むろん道中でバタバタと彼らは倒れた。それはしかしマラリア患者が大部分だった。さらにもう一つ付け

加えれば、彼らはトラックで移動することを常とし、徒歩行軍に馴れていなかったことである。」

 

 実態は以上のようです。マラリアにかかった捕虜を、トラックにも乗せないで五日も歩かせれば倒れて死

ぬ者が出るのは当然でありますが、この状況を、装備の整っている米軍側からみるとすれば、捕虜虐待と

いうようにうつってしまうでしょう。日本軍としては捕虜を虐待する意図はなかったのでしょうが、結果として

虐待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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