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406/1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6과 #7이 앨런 코벨의 글). 비록 20여 년 전 씌어진 글이지만 오늘날 일본의 행보를 정확하게 내다봤을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제3국 학자의 냉철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1]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자민당 내 헌법조사위원회는 현행 헌법에 대한 다양한 개정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을 서슴지 않고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이 삭제된다는 것은, 1920년대 전후에 그러했듯이 군부 세력의 득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현행 일본헌법 제4조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준다. 현행 일본헌법 4조는 ‘천황은 국가적 문제에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日王’의 부활?

1920~30년대에 ‘신성 천황’ 개념은 일본 군부가 녹슨 칼 휘두르듯 내세우던 구호였다. 천황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던 군부는 ‘만세일계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이름으로 각종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금(1982년) 그런 것처럼, 교과서 내용을 왜곡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국신화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청동기 문화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화내용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일본보다 더 일찍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석기시대 일본으로 이주해 가면서 우수한 무기와 건국신화도 따라서 이동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현상으로, 앞선 문화와 앞선 기술의 무기를 가진 민족은 늘 그보다 못한 민족을 정복했다.

역사왜곡 또한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보다 정직한 미술사를 선호한다. 중국 역사가들이 남긴 전형에서 보듯, 새 왕조를 연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전 왕조를 비난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를 아예 사상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는데, 옛 소련이나 북한이 책을 정직하게 기술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에 비해 일본과 서독은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민주국가라는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이나 난징 대학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독일이 히틀러를 영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왕에게 아무 권력도 없던 중세에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팽창정책에 천황이 이용되면서, 일본의 교과서는 선전도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자민당은 일왕을 상징적 존재 이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 그 실현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본인들은 이를 ‘국내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다. 불행하게도, 수백만명이 그것이 일본 내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임을 알고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한때 아시아 8개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여타 국가에도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세계의 문제’였다.

악명 떨치던 일본 경찰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곤국가이던 1920년대에도 군국주의의 대두는 그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세계 제2의 부국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는 백배 더 가공할 사태를 불러올 것이다. 한때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경찰을 두려워했다. 한낱 동네 경찰이라 해도 일본에서조차 1930년대의 양식 있는 시민에게는 막강한 군부세력의 말단조직원으로 진정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여행길에 배의 상갑판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천황의 초상화를 싣고 가는 배의 상갑판에 올라간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억지로 내려서야 했다. 또 말이 날뛰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일왕비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남자는 ‘신성한’ 왕비의 비단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일본은 정말 ‘신성’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히로히토 천황이 취미인 물고기 표본에 심취하는 팔순의 멋진 노인으로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란다.

[#2]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잇달아 2년간 한국식 솔직함과 일본식 편의(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거짓말하는 것)의 차이를 경험할 기회가 왔다. 하와이대에서 1975년 여름에는 일본 후류(風流) 연구여행을, 1976년에는 한국의 풍류 연구여행을 지원한 것이다. ‘후류’와 ‘풍류’ 모두 한자로 ‘風流’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풍류’라는 말을 격하시켰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해도 지식인층에서 맥이 이어졌다.

미학적이며 심리적인 이 단어의 첫 글자는 ‘바람’이라는 뜻이고, 다음 글자는 ‘흐른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후류를 연구하는 동안 중국 시인 왕웨이(王維), 타오위안밍(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시를 읽었다. 그 시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떠나 매화나 달의 아름다움을 찾는 선승의 검박한 생활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속물적인 도락이었다.

또한 후류 연구를 위해 일본에서 가장 섬세하다는 음식점 몇 군데를 소개받았다. 모두 후류의 자부심을 뽐내는 곳이었는데, 아름다운 솔밭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가에 앉아 조그만 히바치(화로) 위에 끓여낸, 한입거리도 안 되게 적은 세 숟갈의 생선요리를 먹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눈으로 즐기기 딱 좋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너무도 적은 양이었다. 그들은 그것은 ‘대단한 후류’라고 설명했다.

다음해인 1976년 여름에 접한 한국의 풍류는 보다 명확해 보였다. 풍류는 엘리트를 위한 절묘한 음식맛이 아니라 시인 김삿갓이나 기생 황진이가 그런 것처럼 솔직하고 매인 데 없이 사물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에는 ‘인생은 흘러가는 것, 머잖아 죽음이 올 테니 우리는 살아가야지’ 하는 실존적 느낌의 움직임이 가득했다.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작의성(Contrivance) 또는 호벤, 솔직함이 없고 자연스러움도 없는 이 기질은 일본인의 성격에 배어난다. 그러니 일본 교육부가 나서서 (교과서 왜곡을 두고) 사죄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떻게 해야 일본인들이 솔직해질까. 1300여 년에 이르는 한일관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어떻게 해야 그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솔직해질 것인가.

교과서 왜곡과 전쟁 징후

나는 일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신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사이러스 피크 교수는 원자폭탄의 끔찍한 경험이 겨우 일본헌법의 전쟁금지 조항을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썼다. 이후 신세대가 성장했고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는 데 힘입어 일본의 1인당 소득수준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이제(1982년 현재) 세계인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파워가 서서히 고개 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이 일반 일본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 또한 일생을 이중적 얼굴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한국인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사회규범은 엄격하기 짝이 없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자민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신군국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 뻔하다. 그것도 점점 더 대담하게 말이다.

아무도 고등학교 교과서 쓰인 몇 줄 글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곧 군인 적령기가 된다. 노골적으로 군을 미화하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일본 당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나설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3] 조지 샘슨에게 배운 일본사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곡옥,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1920~30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내가 샘슨 경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로 불리던 일왕 중에도 15세기에는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씨를 써서 팔아 연명하던 사람도 있다.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14세기에는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적통 장자의 후손은 지금(1982년 현재)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西洋史学者が見た韓日関係 1

“韓国は親, 日本は親捨てた親不孝子”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406/1


日本がずいぶん前から韓国文化の産物を日本国籍の物で欺瞞して歴史を歪曲して来た事実を暴露した西洋学者がある. アメリカの東洋美術史学者ゾーンカーターコベル(1912‾96) 博士がその主人公.


コロンビア大で日本美術史研究で博士の学位を受けた彼は白人最初の日本学博士でもある. 彼は日本文化を研究している途中その根源である韓国文化に凝って深みのある研究活動をした. 1978‾86年には韓国にとどまって韓国美術, 韓国仏教, 韓日古代史, 陶磁器などに対する 1000余偏移過ぎるコラムを書いたし, ‘韓国が日本文化に及んだ影響; 日本の隠された歴史’ ‘朝鮮ホテル 70年史’ ‘根’ など 5冊の韓国文化関連著書を発行した. 彼の息子, エーロンコベル博士も付与族を研究して韓日関係に対する多い文を書いた.


次の文は 1982‾83年ゾーンとエーロンコベルが韓国と日本歴史的真実に対して書いたコラムを要約したことだ(#6と #7がエーロンコベルの文). たとえ 20余年私は被せられた文だが今日日本の歩みを正確に眺めただけなく日本の歴史歪曲に対する第3国学者の冷徹な視覚をうかがうことができる.


[#1] 歴史歪曲は 712年からつながった

日本人が書いた文には韓日関係を偽りで記録したのがとても多いのに, 韓国人たちは早いゴッイゴッどおり受け入れる. ヒトラーは “嘘が大きければ大きいほど人々はよく信じる. 嘘でもしきりに繰り返せば遠からず多い人が真実で受け入れる”と言った.

一番目歪曲は 1300余年私は被せられた初日本歴史書で起きた. 当時奈良(奈良)の倭(倭) 支配者たちは一応の学者たちに四書編纂を依頼した. 編纂目的は当代の日王たちが伝統性を持った支配者なのを立てるためのことだった.

日本史家たちは 369年伽揶付与族のどうして征伐であると言う 700年まで韓国が政治・文化的に日本を全面的に支配したという事実を完全に隠した. ヒトラーが言ったように, 嘘は大きいほど人々を欺きやすいのだ. そうして日本私邸たちは歴史を覆して伽揶から来た付与族がなぜを征腹したのではなくなぜが伽揶を征腹したと書いた.

‘日本から来て伽揶と新羅を征腹した’と知られた有名な神功(神功)王后は事実は船団を導いてなぜを侵略して征伐した強靭な意志の韓国王女だった. 369年の誤診王からゲイタイ王以前まで(または日本史に登場する 15代天皇から 25台まで)は全然日本人ではない, 純粋韓国人血統の倭王だった.

日本建国者で知られた招待日王神武は 4世紀付与人たちが日本を征伐した事実を反映するだけだ. 海衣女神である天助代わり(天照大臣)は巫子であり, 彼女のお兄さんスサノ−オノ−米してからも(素尊)は新羅人だ. しかし 8世紀史家たちはこの二人の人物に着物を着せた. 20世紀に来てこれらの正体が現われるまで, 史家たちは人々を欺く所期の目的を果たしたわけだ.

年を取った親を捨てる親不孝子話がある. 日本人たちは二つの世代の前韓国人たちに韓国文化は劣等なことだからであり日本語と日本名前, 日本式制度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権した. 韓国の幾多の書冊が火に燃えて消えて芸術活動も禁止された. 多い宝物が国外で積まれて行った. 石窟庵を解体して石一つ一つを日本でオムギリョゴまでしたが成功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日本は嘘と捏造を通じて韓国人に対する文化的ホロコーストを敢行した. しかし真実は日本が初期歴史から 8世紀に至るように韓国が浮かんでくれる食べ物を受け取って育った子供だったということだ.

本当に恩知らずした人々だ. 彼らはもう韓日強制合邦が ‘韓国のための選択’であったし, ‘韓国人たちが恨み仕事’と嘘をついて歴史を再構成しようと思う.

日本が起こした今の(1982年) 教科書波動は初段階に過ぎない. 次の段階は日本憲法の戦争禁止條項を削除して, 三番目段階へ行ってはチォンファングがを ‘神聖なグォンリョックチェ’でいかすと言うのが日本の下心だ. これが実現可能だか.

第2次世界大戦で敗れた以後集権与党になった自民党はその名前とはへだたるように保守性と商業性を追い求める政党で君臨した. もう自民党は象徴的な存在である日王を実在的な国家元首に育てたがる.

自民党内憲法調査委員会は現行憲法に対する多様な改正案を用意しておいている. 日本の歴史教科書が歪曲を躊躇しないで憲法で戦争禁止条項が削除されるというのは, 1920年代前後にそうだったように軍部勢力の得勢を言い表すのだ. その次の段階で現行日本憲法第4条を削除しようとする試みは情勢がどんな方向に動いているかどうかを決定的に言ってくれる. 現行日本憲法 4条は ‘天皇は国家的問題に決定権がない’と言うのだ.

‘神聖な 日王’の復活?

1920‾30年代に ‘神聖天皇’ 概念は日本軍部がさびた刀振り回すように立てた掛け声だった. 天皇を手の内に入れて操った軍部は ‘万歳日計のヒョンインシン(現人神) 天皇’の名前で各種軍私組織を強化した. 当時日本政府は今(1982年) そんなように, 教科書内容を歪曲した.

韓国と日本の建国神話の時代的背景は皆青銅器文化時代にあたる. だから神話内容が等しいしかない. 韓国の建国神話は日本よりもっと早くできた. 韓国人たちが石器時代日本で移住しながら優秀な武器と建国神話もしたがって移動した. これは世界どこでも共通された現象で, 先に進んだ文化と先に進んだ技術の武器を持った民族は常にそれよりできなかった民族を征腹した.

歴史歪曲も人間が歴史を記録し始めた以来で幾多の国で行われた事だ. そうだから筆者はより正直な美術史を好む. 中国史家たちが残した典型で見るように, 新しい王朝を開いた開国の功臣たちはいつも私は王朝を責めた. 共産主義国家は歴史を初めから思想の宣伝道具で活用したが, 昔のソ連や北朝鮮が本を正直に記述するのを期待するということは無理だ. それに比べて日本と西ドイツは民主国家を標榜する. 民主国家という日本が韓日強制合邦や南京大虐殺という明白な事実を否認したらドイツがヒトラーを英雄だと正当化することや違うのがない.

日本の王にどんな権力もなかった中世には歴史が比較的正確に記述された. しかし日本軍部がアジアを侵奪する膨脹政策に天皇が利用されながら, 日本の教科書は宣伝道具になってしまった. 最近自民党は日王を象徴的存在以上に作ろうと努力していてその実現は時間問題のような虫が知られる.

日本人たちはこれを ‘国内問題’だとするでしょう. どんな面ではそうだ. 不幸にも, 数百万名がそれが日本内問題ではない世界の問題’であることを分かってからも言えなくなった. 死んだからだ. 彼 ‘問題’はひとときアジア 8ヶ国に悽惨な結果をもたらしたしそのほか国家にも言えない影響を及ぼした ‘世界の問題’だった.

悪名ふるった日本警察

日本が相対的に貧困国家だった 1920年代にもミリタリズムのつけておくそれ程深刻なのだった. もう日本は世界第2の富国で経済的に繁栄する国家で成長した. したがってミリタリズムは百倍もう加工する事態を呼んで来るでしょう. ひととき韓国人たちは誰も日本警察を恐れた. ただたんに町内警察と言っても日本でさえ 1930年代の良識ある市民には莫強した軍部勢力の末端組織員で本当恐ろしい存在だった.

日本にとどまる時の事だ. 付くヨヘングギルに配意上甲板に上がっていた. あの時 “天皇の肖像画を載せて細いお腹の上甲板に上がったことは不敬罪にあたったら今すぐ下りなさい”と言って無理やりに降り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また言葉が暴れ狂うせいで危険に処した日王費に跳びこんで命を救ってくれたどの男は ‘神聖な’ 王妃の絹の服に手を出したという理由で手首が切られたという話を聞いた.

よく ‘歴史は繰り返される’と言う. 日本は本当 ‘神聖’の時代に帰る中か. ヒロヒト天皇が趣味である魚標本に凝る八旬の素敵な年寄りで残っているのを私は望む.

[#2] 日本人は率直になることができない

1980年私はユネスコ講堂で 3代の映写機でカラースライドをビツォがであり韓国・中国・日本の芸術形態を通じて極東の三つの国を比べる講演をした. 三つの国の特性を一言で要約する言葉を捜している途中英語の C字で始める単語を思い浮かんだ. 中国は統制(Control), 韓国は無情(Casual), 日本は作意的(Contrived)と. こんな備えは三国の陶磁器を比べて見ると明らかに現われる.

中国陶磁器はお御輿と上薬の使用を徹底的に管理した結果特に陶磁器で完壁の境地を成した. 韓国の陶工はいつも自然きわまりなくて無情で, これらが作り出した陶磁器には陶工の気質と火がどんなに作用したのかがそのまま反映される.

日本人たちは 15世紀イドダとは戦争で見るように, このような韓国的無情さを高く酔って過度に発展させたあげく, 彼らの陶磁器は自意識が盛られた作意的なことになった. 日本人たちはお御輿で焼いた花瓶の一耳をわざわざ曲げるとか覚めてしまうことで韓国陶磁器が持つような ‘無情’のミールを与えようと思う.

アメリカ人が見るのに韓国陶磁器のこんな無情さは率直さと通じる. 私が日本の京都よりソウルでもっと楽に過ごす理由は至極なほほ笑みに一貫する京都人々より相対的に率直なソウル人たちがもっと自然に感じられるからだ.

私は 10余年の間毎年夏と冬を京都大徳社(大徳寺)の有名な先査察真珠癌で送ったが, その頃私は方丈さんと生において ‘率直’が何やらする問題でよく争ったりした. 面前で言うことと背中の後ろで言うことが他の日本人の二重性に対して指摘すれば彼はそうしてこそすることで正当化したりした. それがちょうど ‘ホベン(方便)’, すなわち便宜というのだった.

日本では率直さが通用しないという話を何回聞いた. 自分の感情を外で表現する方法を学ぶ日本人たちはどんな状況でもそこに当たる顔をして見せることができる. 彼らが本気に感じる感情はの中で抑制されて代わり ‘作意的顔’で外部に知られるのだ. 日本人に人生はもうずいぶん前に意図されたとおり付い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から誰でも自分をそこ合わせて暮さなくてはならない予想にない仕業で混乱するようにしてはいけない.

真珠癌は日本歴史上たぶん唯一に 100% 率直だった人物を奉ずる漬けるから私はそんな概念を特別にもっと欺満的と思った. 表では独身を立てながら後ではあらゆる乱雑な事をすべてやらかす代わりに僧侶イッキュ(一休)は憚りなく女達と楽しんだしそれによって戒律で厳格に禁止されたものなどに対してよく分かった. このためにイッキュはホベン, あるいは ‘便宜上の嘘’を生の方便に政党の時する査察で奉ずる人物になった.

真珠癌からこういう問題でひとしきり論争が起ればお坊さんが通例言うことが “そう, あなたが賛成. イッキュは率直な人で私たちもそれでこそだがここは日本です. イッキュのように正直なのはアメリカでは大丈夫だが日本では当たらないです”.

私は日本にあるお寺が皆そんな式というのが分かったから ‘嘘が生きている’ 真珠癌で過ごした. 少なくともイッキュを追慕する査察であるこちらには美しい庭園があって壁には纎細な水墨画がかかっていた. それはここでの標準概念である ‘生きている嘘’からの逃避でもあった.

韓国的無情さと日本的作意性

相次いで 2年間韓国式率直さと日本式便宜(結果的に正当だと思って嘘つくこと)の差を経験する機会が来た. ハワイ大で 1975年夏には日本フリュ(風流) 研究旅行を, 1976年には韓国の風流研究旅行を支援したのだ. ‘フリュ’と ‘風流’ 皆漢字で ‘風流’と書く. 中国では唐の時 ‘風流’という言葉を格下げさせたが韓国と日本ではその意味がちょっと違ったりしても知識人層で脈がつながった.

美学的で心理的なこの単語の初字は ‘風’という意味で, 次の字は ‘流れる’と言う意味だ. 日本でフリュを研究する間中国詩人ワングウェイ(王維), タオウィアンミング(陶淵明)と ‘竹林七賢(竹林七賢)’の詩を読んだ. その市たちは世俗の富裕栄華を去って梅や月の美しさを捜す禅僧の倹朴した生活とよく似合うものと言った. しかしこれも俗物的な道楽だった.

もフリュ研究のために日本で一番纎細だという飲食店何箇所を紹介受けた. 皆フリュの自負心を威張る所だったが, 美しいソルバッの間でちょろちょろ流れる物価に座ってやや小いヒヴァするの(火鉢) 上に沸かし出した, 一口距離(通り)もならなく少ない三さじの魚料理を食べた. それは非常に美しくて目で楽しみぴったり良かったが虚飢をなぐさめるにはあまりにも少ない量だった. 彼らはそれは ‘すごいフリュ’と説明した.

翌年の 1976年夏に接した韓国の風流はより明確に見えた. 風流はエリートのための絶妙の食べ物の味ではなく詩人キムサッカーや芸者ファン・ジニがそんなことのように率直で縛られたのになしに事物を楽しむ態度を言うのだった. 風流には ‘人生は流れること, 遠からず死が来るはずだから私たちは生きて行かなくてはならない’ する実存的感じの動きが一杯だった.

書道でも韓国的無情さと日本的作意性は差がある. 私が持っている韓国と日本の有名な禅僧たちの筆文字どれもそういう差異を現わす. 韓国の書道は字が自然に流れて無情な境地を見せる. 日本書道では作意性が覗き見える.


このような作意性(Contrivance) またはホベン, 率直さがなくて自然なこともないこの気質は日本人の性格に染み出る. だから日本教育省が出て (教科書歪曲を置いて) 謝罪するからといって状況が変わると思えば計算違いだ. どのようにすると日本人たちが率直になるか. 1300余年に至る韓日関係歴史を歪曲している日本. どのようにすると彼らが歴史歪曲を直して率直になろうか.

教科書歪曲と戦争兆し

私は日本が絶対そうするわけない確信する. アメリカコラム非我大学のサイロスピーク教授はアトミックボムの無惨な経験がやっと日本憲法の戦争禁止条項を導き出しただけだと書いた. 以後新世代が成長したし国防費を出費しないことに負って日本の 1人当り所得水準はおびただしいのがなった. 今(1982年現在) 世界人は日本でミリタリズムパワーが徐徐にもたげることを実感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もちろんこれが一般日本人たちの過ちではない. 彼らも一生を二重的顔で生きて行かなくても良かったら, 韓国である位率直に感情を表現しながら生きて行くことができたら喜ぶでしょう. ところが日本の社会規範は厳格きわまりなくてそこで数え出る方法がない. 自民党がずっと集権したら新ミリタリズムを持続的に強化することがそらぞらしい. それもますますもっと大胆に言葉だ.

誰も高等学校教科書使われた何与える文を置いて戦争が起こってほしくない. しかしこれはこれから戦争で走り上げることができる兆しを見せてくれるのだ. しかし本質的に率直ではない人々に何を期待することができるか. 歪曲された歴史教科書を学ぶ青少年たちはすぐ軍人年ごろになる. 露骨的に軍を美化する政策が持続したら日本政府は自分たちがやらかした侵略と戦争の跡をとり除くのに出るでしょう. 時間が経って真相が分かる人々が皆死亡してからはその次はどうなろうか.

[#3] ジョージセムスンに学んだ日本史

イギリス史学者たちは馬鹿ではない. イギリスで日本史の権威者に知られたジョージセムスン軽銀コラム非我大学在学時代師匠でもあった. 彼は私の博士の学位論文を審査した 9人の委員の一人で, 日本政府が与える勲章を受けた. 長年の期間日本から暮して来たジョージセムスンは著書 ‘1334年までの日本史’に ‘出雲フドキ(出雲 風土記)に伝わる日本古代史のおもしろい伝説’に対して書いた.

‘出雲フドキ’は 713年に出た本だ. 当時ゲンメイ(元明) 女王は各現にその地方の歴史と地理, 稀な事などを記録しておくように指示した. そうして 3箇所記録が今日まで伝えるのに, なかでも一つが新羅から来た韓国人たちが定着して暮した出雲(出雲)に関するのだ. 出雲は少なくとも 2‾4世紀当時には日本で一番発展した地域だったろう. 次はセムスンがフドキで引用した句節だ.

‘神さまがある日よく見たら韓半島南部に地がとても広かった. それで新羅地を少し引き離して海向こうでひいて来て出雲席に付けた.’

‘地クルオがギ’は科学的に不可能な事で氷河時代の指標移動は遥かな昔の仕事だ. セムスン軽銀 “これは残った地が移動したのではなく多くの人が移住したことを民間説話で表現したこと”と解釈した. これは侵入したのではなく移住して来たことで見なければならない. すなわち新羅人々が大規模出雲で移住して行ったことを志すのだ. 石器時代日本には人口がとても少なかったので, 多くの韓国人が今日アメリカ移民を去るように新しい可能性を捜して当時日本に行って定着したことはとても自然な現象だった.

天助代わりアマデラスのお兄さんで日本の歴史書に ‘猛烈な男性’に記録されたスサノ−オノ−は日本で移住した韓国人の中にもとてもエネルギッシュな男だったようだ. ‘彼は金海から海向こうで金と銀を送った’と言う. また新羅地域人たちの巫俗的リーダーでフィンマルに乗ったと伝わる.

ヒロヒト天皇も 1930年代挙動する時フィンマルに付いた. 1973〜74年天馬塚古墳で白華マルダレに巫俗的治者のフィンマルを描いた 5世紀頃新羅の天馬島が発掘された. 賢い日本人たちは韓国から入って来た巫俗思想にフィンマル, 勾玉, 王冠とその他などを連携させた. 1920‾30年軍国勢力が膨脹する時治者崇拜思想が蘇った.

私がセムスン頃から学んだ日本史には ‘日本の神聖な治者’と呼ばれた日王の中にも 15世紀にはとても貧しくてただ字を書いて売って食いつないだ人もいる. どんな王は葬礼支払うお金がなくて何月間も売場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軍事力を掌握した権力者や将軍たちが王位をわがまま建ててさんだつした. 14世紀には次男が長男系列を押し出して王権を占めた. 嫡統長子の子孫は今(1982年現在) 大阪で貧しく暮しているし, 次男で王座に上がった人の子孫は今東京の王宮で過ご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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