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그렇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712년에 씌어진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9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4] “일본을 좋아하나 신뢰하진 않는다”

“매켄지. 그도 한때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그가 쓴 장문의 글이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고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사하는 사설이 실린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일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황색 저널리스트’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랜슬럿 로슨의 ‘극동의 제국들’ 중에서)

“매켄지는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 중 유일하게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짓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E. J 해리슨)

매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글을 남겼던가. 그야말로 일본이 새로 내놓은 역사책이 거짓투성이임을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도우려고’ 저지른 한일강제합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본 교과서 논쟁이 한참인 오늘날(1982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여기 인용해 본다.

“일본은 한국인을 억누르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식민정치를 시작했다. 민(民)과 융합하지 않고는 훌륭한 행정을 도모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통치하고 모욕을 주는데 융화는 불가능하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국가적 이상을 파괴하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과 양식을 뿌리뽑으며, 얼마든지 거저 부려먹을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한국인을 과소평가했다. 외교와 사회분야에서 일본은 전세계를 마치 어린애인 양 취급했다. 일본인은 한껏 미화하고 한국인은 무능력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본 문명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한국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저 노동력 착취 대상인 열등인간으로 대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을 전시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건축물을 공들여 세우고 철도를 부설해 국가 경제력은 무시한 채 시설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것들로, 오직 일본인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을 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잊었다. 미성년자들은 때리고, 성인들은 감옥에 보내고 엄벌을 내려 몰아세움으로써 황국신민이 되라고 충성을 강요했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이 반역자들을 키워왔음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에 한국문화를 깡그리 섬멸하고 일본어를 선뜻 배우려들지 않는 한국인들을 족쳤다.”

매켄지는 일본 순사가 어떤 집이든 멋대로 수색하고 누구든 재판 없이도 벌주는 데 대해 썼다. 그들은 사람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물리적 고통의 한계가 ‘하루에 태형 30대(대나무 두 개를 묶어서)씩 사흘 연속 90대’이고 그 이상은 고통이 극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계산을 해냈다. 1916년의 공식 보고서에는 8만2121명이 그런 체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후에는 이런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3만2830명이 감옥에 갇혔다.

불온사상, 코끼리 이야기

일본이 이른바 ‘불온사상’이라고 간주한 사례 중에는 영국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한 키플링의 유명한 코끼리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는 두 번째 주인을 따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이것을 한국의 아이들에게 두 번째 주인인 천황을 받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은 한국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도구였다. 조선은행은 모든 종류의 통화를 관장하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을 마련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땅을 파는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은 자들에게 이전 가격의 20%밖에 안 되는 헐값에 땅을 넘겼다. 이렇게 땅의 원 경작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일본은 ‘농업을 개량’했다.

난징 대학살도 일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일본은 후손에게 일본인들이 갸륵한 이타심을 발휘해 황인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사회 저변을 발전시킬 소명을 떠안았던 것이라고 가르치려나 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극동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 점이다.


나는 1930년부터 일본어와 그 문화, 역사를 연구해왔기에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나는 1930년 이래 일본예술사를 진작시킨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쓰공이 주는 메달과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시코쿠섬이 해군기지인 것을 모르고 카메라를 갖고 그곳에 갔다가 가택연금되면서 동전의 다른 면도 잘 알게 됐다.

나는 시코쿠섬을 멀리 떨어진 연인들의 소풍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 섬에 발 디딘 나를 그들이 매우 수상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 헌병은 내가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감시하고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따라왔다(프라이버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인을 아주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쓴 일본은 그들의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5] 1930년대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가

1930년대에 나는 일본에 살면서 과거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어와 일본 예술, 문화를 더 공부했다. 일본사회에 나 자신을 투영해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학의 대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느라 기모노를 입고 다비와 조리를 신었다. 서양식으로 발달한 내 신체에 이런 차림으로 도쿄 요코하마간 급행열차를 타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던 시절은 악몽 같다.

일본에 있는 동안 두 분의 스승을 알게 됐다. 나보다 갑절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지만 모두 영어가 유창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문기자였는데 천조대신 신사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 해서 불경죄로 심한 처벌을 받고는 기자직을 버리고 ‘안전한 직업’인 사업가가 됐다. 그는 지금 다이마루백화점의 사장이 되어 이를 서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다른 스승 후쿠이 리키시로 교수는 1920년대에 ‘15세기 일본의 유명한 수묵화가 중 몇 사람은 사실 한국인이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나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예술사에 박학한 그는 도쿄대학의 최고 교수직을 맡고 있었지만 그 발표 이후 이단으로 몰려 북동부 센다이의 도호쿠대학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의 연구발표는 일본학계에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때 그의 문하생 중 보수파 한 사람은 도쿄박물관장이 됐고, 서양인 문하생인 나는 그의 진보적 가르침을 좇는 미술사가가 되어 지금 서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자 일본 태생의 한국인 학생 하나는 내 강의를 ‘아집’으로 간주했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1930년대 일본에서 살았고 당시의 지배적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그때와 똑같은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군국주의, 또는 네오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은 같은 것이니까. 선량한 일본사람들은 1930년대의 그러한 군국주의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 밤, 나는 일본공보관에서 다몬 마에다 관장과 얘기를 나눴다. 미국 FBI 관계자가 1시간 전쯤 그곳에 와 있다가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관장은 책상 유리판 위에서 무슨 서류를 태우고 있었다. 관장은 한마디로 충성스런 일본인이었다. 그는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패전 후 유일하게 그가 도쿄시장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관장과 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았다.

“이건 무서운 실수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군부가 저 잘났다고 그러는 거요. 시민은 그 사람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20~40년대의 정신을 되풀이하려는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과연 군부의 도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극동문제의 중심축은 한국

처음에 나는 이번(1982년) 교과서 왜곡파동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리라고 봤지만, 자세히 검토하면서 의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을 없애기 위해 홍보해왔다. 현행 일본헌법은 그 골자를 사이러스 피크 교수가 작성한 것으로 서구적 이념의 소산이다. 피크 교수는 자신이 전쟁금지 조항을 삽입하도록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레이건은 할리우드 배우였을 뿐 아시아 문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레이건은 막강한 세계적 파워를 지닌 대통령으로, 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년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냐 마냐의 문제는 나이든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거리다.

정직이 통하지 않고 계속 핍박당한다면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단순히 교과서 왜곡이나 전쟁금지조항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패전 이후 집권한 일본 자민당은 개헌위원회를 만들어 일본 천황이 상징적 존재가 아닌 국가기관이 될 것을 제의해놓은 상태다.

이는 바로 과거의 전쟁 주동자들이 했던 짓이다. 그들은 천황을 국가기관으로 이용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천황이 국가문제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군부 인물들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 일왕이 권력주체로 나온다면 일본에 1930년대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내겐 ‘천황폐하’가 교토시내를 지나간다는 이유로 방문과 대문을 모두 걸어 잠가야 했던 기억이 있다. 1971년 자유시대에는 도쿄역 호텔에서 천황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일본은 어째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 일본은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덕분에 이제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세계 제2의 부국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인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고통을 들쑤시는가. 일본은 또다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는가.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 전쟁을 금지한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군부를 그 옛날처럼 파괴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법안에 서명하는 것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일본은 자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이 있어야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6]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일본인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일본인’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한국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西洋史学者が見た韓日関係 2


そうだ. 私がコラム非我大学で学んだ日本史の中でどんな部分は今日本政府の認可を受けて出版された歴史教科書では見られない内容だ.

セムスン驚異芸術文化史分野の師匠で思った人がすぐ東北(東北)大学の福井リキチで(深井陸次郎) 教授だ. 福井教授は “15世紀足利幕府時代のすぐれた水墨画が大部分が韓国人だ. 彼らは朝鮮時代の仏教弾圧でお寺が逼迫受けるとこれ以上お寺に寄り掛か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あげく日本に渡って来た韓国の仏教美術家”という大胆な主張を広げた学者だ.

私はこのイギリス人日本史学者から日本歴史の非常に敏感な部分である初期古代史と 1910年以後戦争を含んだ現代史過程を学んだ. 現代史部分はまだその時を証言する人々が生きている. ところで初期古代史は 1930年代日本が世界の征服者を夢見てミリタリズムを膨脹させた基底に活用されただけ重要な部分だ. したがって日本政府は 2次世界デジョン寺をまた書く瞬間にも自国の建国基礎になった古代史で目をはなすことができないのだ.

712年に被せられた ‘古事記’は過去文字記録が不可能だった時歴史の中王の政治功績と英雄談を子子孫孫下がって歌のように覚えて歌った内容を編集したのだ. 韓国のパンソリのような類型だ. 日本が過去どうして韓国のパンソリを抹殺しようと思ったのかを見当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文字に記録された最初の歴史は 620年成徳太子と彼の叔父と同時に権力家である蘇我牛馬して(蘇我馬子)の合作に編纂された. 蘇我牛馬してからは韓国人子孫で日本内最高軍事権力者が出来た人だ. しかし 645年蘇我家門が権力を失うようになると彼が書いた歴史書たちも不吉の中に投げられた. 伝える話ではその本の一部が不吉の中で引き上げられたと言う.

二番目歴史編纂はデンム(天武) 日王の時試みされた. 当時長年の歴史を皆憶える臣下が一人いた. 彼が憶える昔話を皆字で記録しなさいという任務が学者に与えられた. しかし天皇がすぐ死んで次の台に移るようにどんな進捗がなかった. 結局 712年に来てからこそ口伝歴史を古事記で編纂したしこれが実存する最古(最古)の日本歴史書になった.

が本はわき目にもしまりがなく見える. それでもこの本で韓国人たちの驚くべきな威力を立証する跡を捜すことができる. 韓国が日本に及ぼした影響はあまりにも圧倒的なのだからこれを完全に隠すことは不可能だったのだ. 臣下一人が憶えて解いておいた昔話は多分純粋日本語だったろう. それから 29年の作業結果出た古事記は純粋漢文で被せられたのだった. その作業がいくら難しかったのか充分に見当がつく. またいくら不正確なことかも見当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

[#4] “日本が好きだが信頼しない”

“メケンジ. 彼もひとときは日本に友好的だった. 彼が書いた張お問い合わせ文が東京の新聞に報道されて彼のすぐれた能力に感謝する社説が載せられた事がある. ところで彼が朝鮮が処した暗たんたる現実を悟るようになった以後日本でそれに対する評価は一朝一夕に ‘黄色ジャーナリスト’という軽蔑的なことに変わった.”(レンスルロッロスンの ‘極東の帝国たち’ 中で)

“メケンジは宣教師ではない外国人中唯一に日本のヨシチァル人物になってソウルから田舍でスムオドルオッヌンデ, その所で日本人たちがやらかす仕業を自分の目で直接確認するようになった.” (E. J ハリソン)

メケンジが二つの目で直接見たことは何で何だと文を残したのか. まさに日本が新たに出した歴史書が偽りだらけなのを確信するようにしてくれるのだ. 日本が ‘韓国を助けようと’ やらかした韓日強制合邦に対する彼の批判は日本教科書論争がしばらくである今日(1982年) おもしろい読み物だ. ここに引用して見る.

“日本は韓国人を押えつけて馬鹿にすることで殖民政治を始めた. 民(民)と融合しなくては立派な行政をはかることができない. 頑なに統治して侮辱を与えるのに融化は不可能だ. 日本人たちは韓国人の国家的以上を破壊して, ずいぶん前から伝われた慣習と様式を根を絶って, いくらでもただでこき使うことができる劣等な存在で作るのに熱をあげた.

ところで日本は自分を過大評価して韓国人を過小評価した. 外交と社会分野で日本は全世界をまるで子供であるように扱った. 日本人は精一杯美化して韓国人は無能力な人種で思うように洗脳した. 窮極的に日本政府の教育を受けた人々は日本文明が世界一番だと信じるようになった. 韓国人はどうにもこうにも益体もなくてただ労動力搾取対象である劣等人間で対した.

そうして日本は朝鮮を展示場で作る計画を立てた. 建築物を功たちよ立てて鉄道を敷設して国家経済力は無視したまま施設を支えて行った. しかし大部分の韓国人たちは利用することができないものなどで, ただ日本人だけが接近可能とか外国人たちに誇示するためのことだった. 日本は韓国人が考えをして魂を持った存在という事実も忘れた. 未成年者たちは殴って, 大人たちは監獄に行かせて厳罰を下げて責め立てることで皇国臣民になりなさいと忠誠を強要した.

1919年 3・1運動は日本が反逆者たちを育てて来たことを自覚するようになったきっかけだった. ここに韓国文化をすっかり殲滅して日本語を気経に学ぼうとしない韓国人たちをしめつけてへこました.”

メケンジは日本巡使がどんな家でも勝手に捜索して誰でも裁判なしも罰するに対して使った. 彼らは人の身が耐えることができる物理的苦痛の限界が ‘一日に苔刑 30台(竹二つを縛って)ずつ三日連続 90台’でその以上は苦痛が極まって耐えることができずに死ぬようになるという計算をやりこなした. 1916年の公式報告書には 8万2121人がそんな体形を受けたと記録されているのにその後にはこんな報告書が出版されなかった. のような日に 3万2830人が監獄に閉じこめられた.

不穏な思想, 鼻どうし話

日本がいわゆる ‘不穏な思想’と見做した事例の中にはイギリス宣教師ゲールがハングルで翻訳したキプリングの有名な鼻どうし話もあった. ‘鼻同士は二番目主人に付かなかった’は句節があるのに日本政府はこれを韓国の子供達に二番目主人である天皇を奉じないでねと教えることで思った.

銀行は韓国人の土地を強奪する道具だった. 朝鮮銀行はすべての種類の通話を管掌しながら韓国人の土地を無価値なことで作った. 税金を出そうとすれば現金を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仕方なく地を売る朝鮮人たちは日本政府から補助金を支援受けた者等に以前価格の 20%しかならない捨値に地を越した. こんなに地の丸耕作者たちを追い出すことで日本は ‘農業を改良’した.

南京大虐殺も日本歴史に記録されないみたいだ. たぶん日本は子孫に日本人たちが殊勝な利他心を発揮して黄人種の問題を解決して韓国社会底辺を発展させる召命を引き受けたことだと教えるかなより.

何年の間私はコラムを通じて日本の美術私邸たちがもう極東の芸術社を自分の意味どおりまた使ったし, それによって韓国人が作った芸術品多数が日本芸術の範疇に編入されてしまったと主張した. 日本が韓国に対してやらかした過ちの中でも最悪の物は韓国文化を抹殺して韓国人が過去に対する自負心を失って自分を卑下じるようにした点だ.


私は 1930年から日本語とその文化, 歴史を研究して来たから日本人がどんな人々なのかよく分かる. 私は 1930年以来日本芸術社を振作させた功労でヒロヒト天皇の弟(妹)ダカマスゴングが与えるメダルと名誉を受けた. しかし四国島が海軍基地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くてカメラを持ってその所へ行ってから自宅軟禁されながら小銭の他の剃りよく分かるようになった.

私は四国島を遠く離れた恋人たちの遠足先位に分かっていた. しかし白人女性では二番目でその島に足踏んだ私を彼らが非常に疑わしがるということを気づいた. 日本憲兵は私が食事する時もそば席に座って見張ってはなはだしくはトイレ行く時も付いて来た(プライバシーは眼中になかった). しかしこれはまた他の話であるだけだ. 私は日本人をとても高位層から下流層まですべて分かっている. 私は彼らが好きではあるが, 信頼しない. 歴史をまた使った日本は彼らの本能をもう一度確認させてくれた.

[#5] 1930年代ミリタリズムに帰るか

1930年代に私は日本に住みながら過去コラム非我大学で学んだ日本語と日本芸術, 文化をもっと勉強した. 日本社会に私自分を投映して日本をもっと深く理解した後アメリカに帰って日本学の大家になりたかった. そうするために着物を着て多肥と料理をはいた. 洋式で発達した私の身体にこんな身なりで東京横浜間急行列車に乗ろうと小づまを飜りながら走った時代は悪夢みたいだ.

日本にいるうちにお二人様の師匠が分かるようになった. 私より倍で年歳が多い方々だが皆英語が上手で開かれた考え方を持っていた. 一人は新聞記者だったが天助代わりジェントルマンで帽子を脱がなかった真書不敬罪でひどい処罰されてからは記者職を捨てて ‘安全な職業’である事業家になった. 彼は今多異床デパートの社長になってこれを西欧化する努力を傾けている.

また他の師匠福井Rikiの時で教授は 1920年代に ‘15世紀日本の有名な水墨画が中何人は実は韓国人だ’と言う内容の文を発表してから地方で追い出されて苦しんでいた. 日本芸術社に博学した彼は東京大学の最高教授職を引き受けていたがその発表以後異端に追われて北東部仙台の東北大学に下がっていた. 彼の研究発表は日本学界にまことに衝撃的なことだった. あの時彼の門弟の中で保守派一人は東京博物官長になったし, 西洋人門弟である私は彼の進歩的教えることを従う美術私邸になって今ソウルでこの文を書いている.

しかし日本内には ‘良いことは無条件仕事をしたこと’という事故がまだ(1982年)も広まるしている. 一例で彼らは真偽可否は選り分けないで, 7世紀飛鳥仏教美術品たちもただ日本博物館に所長されているという理由だけで韓国のではない日本のだと心に刻んでおく. しかし私はボブリュングサを中心にした日本飛鳥時代仏教芸術品が韓国から始まったことなのを力説して学生たちにそれほど教えて来た. すると日本生まれの韓国人学生一人は私の講義を ‘我執’で見做した.

芸術私邸である私は高慢な日本美術私邸たちが 7世紀日本の重要な国宝級美術品たちが韓国的真髄が盛られた, 韓国人手で作られたことなのを認めないようとするということをよく分かる. 問題はそれよりもっと深刻だ. 私は 1930年代日本で住んだし当時の支配的精神がどんなことなのかを分かる. 私を驚愕するようにすることはあの時とまったく同じな精神が蘇っているという事実だ. 友達は国株の, またはネオミリタリズムと呼んでも良い. 本質は同じのだから. 善良な日本の人々は 1930年代のそういうミリタリズムにどんな抵抗もできなかった.

1941年 12月7日日本が真珠のみを攻撃した日夜, 私は日本公報館でダモンMaeda官長と話を交わした. アメリカ FBI 関係者が 1時間の前ほどその所へ来ていてから帰ろうとするところだった. 官長は机ガラス板の上で何の書類を焼いていた. 官長は一言で忠誠な日本人だった. 彼は思想が自由な人なのでマッカーサー将軍は日本敗戦後唯一に彼が東京市場に出ることを阻まなかった.

官長と私二人皆日本が戦争に巻きこまれることを願わなかった. 私たちは涙を流してお互いに抱えこんだ.

“これは恐ろしい間違いです.”

彼はずっとそのように言った.


“軍部が私偉かったとそうなことです. 市民はその人々をやめさ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

日本はミリタリズムが支配した 1920‾40年代の精神を繰り返そうとするのか. 健全な常識を持った市民たちは果して軍部の挑戦的な動きを阻むことができないことか.

極東問題の中心軸は韓国

初めに私は今度(1982年) 教科書歪曲波動が湯飲みの中の台風に止むと見たが, 詳らかに検討しながら疑問が出始めた. 日本は自国憲法で戦争禁止条項を無くすために広報して来た. 現行日本憲法はその骨子をサイロスピーク教授が作成したことで西欧的理念の所産だ. ピーク教授は自分が戦争禁止条項を挿入するようにしたと私に言ったことがある. 当時レーガンはハリウッド学んだだけアジア問題に対する認識がほとんどなかった. 今日レーガンは莫強した世界的パワーを持った大統領で, アジアがいくら複雑な所なのか分かり始めたようだ.

率直に私は中東が世界問題の中心だと見ない. 石油は重要なことだが世界は去る数千年間石油なしも過ごしたしこれから代替燃料を捜し出すでしょう. 私が見るのに極東問題こそ重要なことで韓国はそこで中心軸役目をしている. したがって日本のミリタリズムが復活するのか長芋なのかと問題は年を取った韓国人たちが心配する感情的次元を越した世界的問題距離(通り)だ.

正直が通じないで引き続き逼迫されたらどんなに平和が維持されることができるか. 単純に教科書歪曲や戦争禁止条項だけが問題になるのではない. 敗戦以後集権した日本自民党は改憲委員会を作って日本天皇が象徴的存在ではない国家機関になることを申し入れておいた状態だ.

これはすぐ過去の戦争主動者たちがした仕業だ. 彼らは天皇を国家機関で利用して天皇の名前で命令を下した. しかし実際に天皇が国家問題に直接的な権限を行使したことではなかった. 彼は野心満満した軍部人物たち手に浮気をするようになった絡繰り人形だっただけだ.

歴史上日本天皇血統に対する徹底的な研究が必要だ. 日本歴史教科書に書いておいたように日本王統が立つ前 660年に始まったのではない. 4世紀に入って初めてできた日本王家は正しく優秀な武器と騎馬兵を導いて船に乗って海を渡って来た韓国付与族だ.

505年に一時的に入れ替えされたが付与族はずっと重要な支配階層で君臨している途中 6世紀後半に行っては統治権を掌握した. このような事実が日本教科書に載せられているか. ない. 絶対それほど記述していない.

今になって日王が権力主体で出たら日本に 1930年代のミリタリズムが復活す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もない. 私には ‘天皇陛下’が京都市内を通り過ぎるという理由で訪問と大門を皆かけて閉ざ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記憶がある. 1971年自由時代には東京駅ホテルで天皇の写真を撮ることができたことも憶える.

日本はどうしてじっといることができないか. 日本は軍事費を出費しないおかげさまでもう 1人当り国民所得備え世界第2の富国になった. ところでどうして日本は韓国と中国, 東南アジア人たちがまだ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苦痛をそそのかすか. 日本は再び ‘大東亜共栄圏’を夢見ているか.

こんな状況が繰り返されてはいけない. 戦争を禁止した日本憲法の平和條項はそのまま守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 軍部をその昔のように破壊的に力強くする法案に署名するような事があってはいけない. 日本は自分を力強く批判する勢力があると自らを求めることができる.

[#6] 14世紀日本 大画家 80%は韓国人

歴史歪曲が問題だ. どうしてすべての人が日本が歴史的事実を歪曲するに対してそれ程あまりにも嫌いなのか. 日本は過去 500年以上歴史を歪曲して来たし, 大部分の人がこれをそのまま受け入れる. しかし私が勉強した韓国の古代史と考古学によればまさに韓国人たちが古代のリーダーたちだったし当時中国人に一寸法師たち, あるいは倭寇に知られた今の日本人これこそ先進文明をありがたさ受け入れた受恵者なのを確信するようにするのだ.

日本は ‘一寸法師’ ‘倭寇’ のような単語がとても嫌で 7世紀からこの単語を書かなかったが, 事実上倭人たちはただ百済使臣たちを通じて先進文明を接することができた.

これを証明する良い資料が私は駐日米国大使エドウィンライシャワーが翻訳した ‘イェンニン(円仁)の日記-入党旧法(入唐求法) 巡礼行期’だ. 僧侶イェンニンは “韓国人海上王長補高の統治の下あった中国内韓国植民地新羅坊が自分に施してくれた思いやりではなかったら中国で日本に帰って来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と書いた. 仏教徒であるイェンニン仲間が訪問した 840年頃中国は仏教を弾圧していた. イェンニン仲間は中国人にわいろを与えて韓国人にも贈り物を与えて中国から脱して金剛経を日本に持って入って来た. すべての船便は韓国を経由したし配島皆韓国滲まれた.


今日日本がやらかす歴史歪曲の脈絡でなら遠からず秀吉の軍事たちが韓国人陶工を ‘招請’して来て ‘日本に派遣勤務’するようにしてこれらに ‘無料交通と宿泊を提供’して ‘彼らが技術をこちらに伝えた’と言うかも知れない. 当時日本の陶磁器技術は 5‾6世紀に韓国人たちが日本に伝えたスエキ土器水準にそのままとどまっていた. その間 1000余年の間日本陶工たちは韓半島から来た陶磁器基本に付いて陶磁器を作って来たが 16世紀に入って彼らは朝鮮陶磁器産業の新しい血を輸血する必要性を感じた. 新しい被疑輸血はすぐれた技術革新を持って来てくれたことだから以後日本の陶磁器は韓国的思いつきに負って発展を成した.

韓国占領が自慢の種?

1923年東京と横浜を襲った関東大地震の時の韓国人は人名と財産被害で狂暴になった日本人たちの見代わりになって打撃を受けた. 教科書が被せられた 1930年代は韓国人たちが集まって住む貧困地域を ‘ニンニク食べる朝鮮人’らが住む所と呼んで日本人たちが忌避する地域に追いたてた.

アメリカ政府は 2次大戦当時狂奔したアメリカ人から楽しさ日本人たちを保護するために彼らを日程地域に避難させたルージュベルト大統領の措置を教科書に収録するように要求するかも知れない. それから数十年が去る今日(1982年)に来て日本資本家たちはあの時失った地と事業をいつでもその気になれば賠償受け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ところで日本はこのような措置を韓国人たちに酔ったのか.

ない. 日本人たちは過去韓国に害悪をかけた事実に対して恥辱を感じるどころかむしろそれを生意気な自慢の種で思って数十年の前と変わったところない差別と歪曲を事としている. 日本軍部は 2次大戦でどんな教訓も得る事ができなかったんだからか. 見掛に彼らは確かに反省の気配がない.

ところで日本文化史で韓国の影響を皆とり除いたらナムアナはのがほとんどない. 少なくとも立つ前 3世紀から 8世紀まではそうだ. 純粋な日本固有文化が成ったと言う 10世紀に来ても日本大闕で開く一番楽しみがわく事中の一つは大闕人々の中で誰が一番韓国の踊りをよく踊るのか選り分けて抜く行事だった.

日本が非常に誇らしくここは 14世紀新しい水墨画の技法は実は朝鮮で先にできたのだ. 日本の水墨画を描いた画家たちの中に朝鮮出身の水墨画家だった禅僧(禅僧)らをすべて選び出したら日本の威張るに値する部分はほとんどない. 少なくとも日本が立てる 14世紀水墨画対価の 80%は日本人ではない韓国人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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