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오후 9시 50분에, 요코타 부부는니가타현경에 수색원을 낸다. 수색원을 받은니가타현경이 수색을 개시한다. |
| ●11월 22일에는, 공개 수사를 단행해, 「니가타 일보」나 「마이니치 신문」으로 보도된다. 1년간에 총계 3000명의 수사원을 동원하고 수사를 하지만, 행방의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
| ●아무 단서도 없는 가운데에서, 사키강은, 신문의 군중 사진이나 잡지의 그라비아 등에딸(아가씨) 은혜와 닮은 여성이 비치고 있으면, 신문사에 문의하거나 사진의 여성이 있는 장소를 방문하거나 조차 하는 만큼, 각지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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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쇼와 55년) 1 세월본해 연안을 중심으로 일어난,치무라 야스시, 하마모토 후키 메구미,이치카와 슈이치, 마스모토루미꼬등의 증발 사건에는, 외국의 정보 기관이 관여하고 있는 혐의가 강하다고 쓴 신문 기사를 요코타 부부가 읽어, 산케이신문 니가타 지국의 지국장에 면회해, 딸(아가씨)의 실종 사건과의 관련성을 물었지만, 관계성은 부정되었다. |
| ●1984년(쇼와59년)에일본 동맹 기독교단 이가라시 크리스트교회에서TEAM의 마크다니엘 선교사보다세례를 받고딸(아가씨)를 위해서 계속 빈다. |
| ●1988년 8월, 납치 피해자의 아리모토 케이코씨의 부모님은 일본 사회당 위원장 도이 타카코의 사무소(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상담.당초 도이는 아리모토 부부에게 동정하는 자세를 보여 따뜻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아리모토 부부는 안심했지만, 그 후 도이 사무소에서는 대답은 없어져, 모두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이 때문에 아리모토 부부는 상경해 자유민주당의 정치가에게 도움을 요구할 것을 결정해 1988년 9월,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다쵸의 중의원 의원 회관에 자유민주당 간사장의 아베 신타로우를 방문한다.아베는 부부의 호소를 들어 보내 당시 비서였던 차남아베 신조에 부부를 외무성과 경찰청에 안내하도록(듯이) 명해 부부는 여기에 이르고, 일의 나름을 외무성·경찰청에게 전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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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리모토 부부는 아베 부자에게 연락하게 되어, 아베 부자는 이 문제에 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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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몇년전, 요코타 메구미씨의 부모님이 납치 해결의 가두 서명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조선 학교의 학생으로부터 날달걀이 부딪힌이야기는 아침해는 결코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
●그 때 요코타 부부는 외무성의이이구라 공관에 모아져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 (당시 )(와)과우에타케 시게오 외무 부대신(당시 )보다, 장녀 은혜가 사망해 있다고 하는 북한의 정보가 선고된다.결혼하고, 딸(아가씨)김·헤골을 낳았다고도전해진다.여기로부터 매스컴의 차가운 반응이 바뀌었다고 한다.
●2006년(헤세이18년) 4월 28일 죠지·W·부시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과 회담. 딸(아가씨)의 구출을 호소한다.
그 후도 지금 현재까지, 요코타 메구미의 사망설을 부정하고, 남편과 함께 딸(아가씨)를 포함했다 납치 피해자의 탈환 유익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요코타자(무성하다)2020년 6월 5일:열망한 우리 딸(아가씨)와의 재회는 당해 내지 않고, 노쇠 때문에,카와사키시내의 병원에서 사망.87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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