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의한 강제 연행론
이승만 정권은1959년7월 1일에 「재일 한인의 북송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서,일본 정부에 대해서 이하를 주장했다[102]
- 「일본이 식민지로서 한국을 점령한1905년부터 1945년의 기간중, 약 200만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이주하는 것을 강요 당했다」←(거짓말)
- 「1942년부터 1945년에도달하는 동안에서만으로도약 52만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데리고 가져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거짓말)
- 「1939년에 961,591명이었던 그들 재일 한인은, 1944년에는 1,936843사람에게 증가했다.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약 134만명의 한국인이 현재의 대한민국의 땅에 송환되었지만, 그들은 과거 몇 년간의 강제 노동의 대가나 재산상의 손실, 또는 그들이 받아 온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어떤 보상도 받게 되지 말고 송환되었으므로, 남는 약 65만명의 한국인은 일본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거짓말)
- 「재일 한인은이주를 강요 당해 또강제 노동자로서 이용되었던 것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출생 한 일본인과 동등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 일본은 그들을 일본국민으로서 간주했다」 「1952년 일본이 독립을 회복한 후에, 그들은 특별히 우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도 관계없이, 일본 정부는 오히려 고용, 교육, 후생, 법률 적용, 일반 사회 생활 그 외, 모든 면에서 일부러차별대우를 했다」←(거짓말)
- 「일본은1923년의도쿄 대지진때, 수십만의 한국인을 대량 학살했다」←(거짓말)
- 「죄명도 재판도 없고, 또 언제 석방된다고 하는 희망도 주지 않고,수많은한국인을강제 수용소에 가두었다」←(거짓말)
朝鮮人の徴用期間はわずか7か月間1939年末日本内地に居住していた朝鮮人の総数は約100万人。1945年終戦直前には約200万人に達した。この間に増加した約100万人のうち、約70万人は「自から内地に職を求めてきた個別渡航と出生による自然増加による」。「残りの30万人の大部分は工鉱業、土木事業等による募集に応じて自由契約にもとづき内地に渡来したもの」であった[74][73]。 元来、国民徴用令は朝鮮人(当時は日本国民)のみに限らず、日本国民全般を対象としたもので、日本内地では1939年7月に施行されたが、「朝鮮への適用は、できる限り差し控え、ようやく1944年9月に至つて、はじめて、朝鮮から内地へ送り出される労務者について実施」され、1945年3月(関釜間の運航が杜絶したため)までの短期間であった[74][73]。 終戦後、在日朝鮮人の約75%が朝鮮に引揚げた。
韓国による強制連行論
李承晩政権は1959年7月1日に「在日韓人の北送問題に対する政府の立場」で、日本政府に対して以下のことを主張した[102]
- 「日本が植民地として韓国を占領した1905年から1945年の期間中、約200万人の韓国人が日本に移住することを強要された」←(嘘)
- 「1942年から1945年に至る間でだけでも約52万人の韓国人が日本に連れて行かれ、軍需工場で強制労役に従事した。」←(嘘)
- 「1939年に961,591人だった彼ら在日韓人は、1944年には1,936,843人に増加した。1945年日本が降伏した後約134万名の韓国人が現在の大韓民国の地に送還されたが、彼らは過去数年間の強制労働の代価や財産上の損失、または彼らが受けて来た不当な待遇に対して何の補償も受けられないで送還されたので、残る約65万人の韓国人は日本に残る道を選んだ」。←(嘘)
- 「在日韓人は移住を強要され、また強制労働者として利用されただけでなく、日本で出生した日本人と同等の地位を付与しなかったのに、日本は彼らを日本国民として看做した」「1952年日本が独立を回復した後に、彼らは特別に優待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にも拘わらず、日本政府は却って雇用、教育、厚生、法律適用、一般社会生活その他、すべての面でわざと差別待遇をした」←(嘘)
- 「日本は1923年の東京大震災の時、数十万の韓国人を大量虐殺した」←(嘘)
- 「罪名も裁判もなく、またいつ釈放されるという希望も与えず、数多くの韓国人を強制収容所に閉じ込めて置いた」←(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