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한국의 역사 인물 3.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의미는? 서기 374년, 고구려 왕실에서는 큰 경사가 났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의 동생인 이련(伊連)이 아들을 얻은 것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라고 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담덕(談德)은 왕실에서 더욱 소중한 아이였다. 담덕(談德)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남이 얕잡아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384년에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죽자 왕위 계승 제1순위자인 이련(伊連)이 왕위에 올라 고국양왕(故國壤王)이 되었다. 이제 11세가 된 담덕은 왕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담덕(談德)은 자신이 다음번 국왕이 될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높은 이상을 꿈꾸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은 386년에 13세의 담덕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고구려(高句麗)에서 국왕이 태자를 책봉하는 나이는 대체로 성인의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15세를 전후로 한다. 고국양왕이 담덕을 그보다 일찍 태자로 책봉한 것은 그가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재주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담덕은 태자 시절에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백제(百濟), 후연(後燕)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용병술을 익혔다. 그의 용맹과 지략은 백제를 비롯한 이웃나라에게도 알려졌다. 그가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백제를 공격하러 직접 출정했을 때에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은 그의 용병술이 뛰어남을 알고 감히 대적하지도 못했다. 이때 담덕의 나이가 19세였으니 그가 십대 태자 시절에 얼마나 많은 전공(戰功)을 쌓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담덕(談德)은 391년 18세의 나이로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뒤를 이어서 고구려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곧 고구려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불세출의 대지존(大至尊),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인 것이다. 그가 서거한 후에 고구려인들이 그를 부른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 말은 "넓은 영토를 개척하여 국력을 신장(伸張)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했던 위대한 제왕(帝王)"이라는 뜻이다. 그의 업적이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고구려인들은 그를 넓은 영토를 개척한 제왕일 뿐만 아니라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훌륭한 통치자로 기억했던 것이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412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쉬운 것은 그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중국의 역사서 가운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재위기를 다룬 진서(晉書)는 그들의 역사전통과는 다르게 고구려(高句麗)에 관한 별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 대한 기록이 매우 간략하다. 따라서 그가 누구와 결혼했고 자녀는 얼마나 두었으며 왜 그렇게 일찍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을 보좌하여 고구려를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던 문무현신(文武賢臣)들이 대체 누구며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다큐멘터리를 보듯 그의 행동만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비극과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할아버지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그는 광개토호태왕이 태어나기 전인 371년에 백제의 걸출한 제왕 근초고왕(近肖古王)이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오자 평양성(平壤城)에서 응전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전쟁 중에 국왕이 죽은 이 사건은 고구려인에게는 최고의 수치였다. 미천왕(美川王)이 개척했던 황해도 지역 또한 백제에게 빼앗겼기에 고구려인들이 백제에게 가진 원한은 깊었다. "아버님의 원수인 백제(百濟), 백제에 맺힌 한을 내가 반드시 풀고야 말리라." 그의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이러한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소수림왕은 375년과 376년, 377년에 연이어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는 담덕(談德)이 태어난 직후였다. 처음 말을 배우고 사물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담덕이 본 것은 고구려 군사들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는 장면들이었다. 어린 담덕에게 고구려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적이 백제라는 사실은 뇌리에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담덕은 고국원왕의 비극에 대해서는 숙부인 소수림왕(小獸林王)과 부친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비극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와 방향설정의 지표가 되었다. 백제만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의 비극은 또 있었다. 그것은 모용씨선비족(慕容氏鮮卑族)이 건국한 나라인 전연(前燕)이 대규모의 군사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훼손하고 태후(太后)를 끌고 가는 바람에 이를 돌려받기 위해 13년 동안이나 저들에게 질질 끌려다녔던 아픈 경험이다. 고국원왕 자신은 전연에게 제대로 복수를 하지 못했다. 전연이 370년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모용씨선비족(慕容氏鮮卑族)은 한동안 나라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기에는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모용씨선비족(慕容氏鮮卑族)은 384년에 다시 후연(後燕)을 세워 짧은 시간 내에 전연(前燕)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고구려의 이웃나라가 되었다. 고구려(高句麗)는 당연히 과거를 기억해냈다. 384년에 왕위에 오른 고국양왕(故國壤王)은 다음해 군사 4만여명을 파견하여 후연을 공격하도록 했고,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玄途郡)을 빼앗고 1만여명의 포로를 붙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 후연의 반격을 받아서 요동군과 현도군을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는 386년과 389년 후연과 거듭된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담덕(談德)은 태자 시절에 직접 후연을 상대해 보았고, 고구려가 제대로 승리하지 못했던 한계도 익히 보아 왔다. 따라서 그가 왕위에 오른 후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거듭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고국원왕의 수모를 씻어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소수림왕(小獸林王)과 고국양왕(故國壤王)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두 전왕(前王)이 백제, 후연과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무엇보다 내치(內治)에 힘써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신장(伸張)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소수림왕은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안으로는 내치(內治)에 힘썼다. 화북 지역의 패자(覇者)인 전진(前秦)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서쪽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고구려 내부의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무엇보다 율령을 제정하여 고구려 체제를 한층 정비했다. 고국양왕(故國壤王) 역시 내치(內治)에 힘써 고구려를 주변국들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공정한 조세 수취, 진대법(賑貸法)의 시행 등으로 농민들이 잘 산다는 소문이 퍼져서 후연의 백성들이 대거 이주해 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늘어난 인구는 고구려의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국력을 증강시켰다. 이러한 두 선대왕(先代王)의 노력이 있었기에 광개토호태왕은 즉위하자마자 밖으로 적극적인 팽창정책(膨脹政策)을 추진할 수 있었다. ◆ 백제를 굴복시킨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소수림왕(小獸林王)과 고국양왕(故國壤王)에 비해 가장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 그의 군사적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위한 다음해 7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친히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10여개 성을 빼앗아 한 강 유역까지 밀고 내려갔다.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은 광개토호태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 싸울 생각을 못했다. 광개토호태왕은 9월에 북쪽의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고, 다시 10월에 백제의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했다.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고구려군은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일곱 군데의 방향으로 성을 공격했다. 결국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라고 믿었던 관미성은 전투 개시 20여일만에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관미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게 되자 백제는 크게 동요했다. 서해의 지배권이 고구려에게 넘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이 곧 고구려의 침략 위협에 노출된 것이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백제를 몰아붙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이러한 가운데 진사왕(辰斯王)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조카인 아방(阿芳)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백제 제17대 국왕인 아신왕(阿莘王)이었다. 아신왕(阿莘王)은 393년에 관미성을 수복하기 위해 친히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출정했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을 깨뜨리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어나는 피해를 입었다. 아신왕은 관미성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다음해에 황해도 지역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직접 정예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 백제군을 격파했다. 아신왕은 다음해 8월에 진무(眞武)에게 병력을 안겨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했다. 그러자 광개토호태왕은 병사 7천여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에서 전투를 벌여 백제군 8천여명을 참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백제가 설욕전(雪辱戰)을 위해 고구려를 계속 공격했지만 거듭된 패전(敗戰)으로 국력이 쇠퇴해지고 민심마저 흉흉해지자 396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58개 성과 7백여개 부락을 점령하고,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에 입성하여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백제 왕족과 대신 10명을 불모로 잡아 국내성(國內城)으로 개선하였다. 이렇게 백제를 굴복시킨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황해도와 인천을 중심으로 서부 해안지역, 한강 이북의 경기도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 신라를 구원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백제(百濟)는 비록 고구려(高句麗)에게 항복했지만 결코 쉽게 굴복할 약소국이 아니었다. 백제는 재기를 꿈꾸며 왜(倭) 가야(伽倻)와 합세하여 먼저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당시 고구려의 신국(臣國)이 된 나라였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려는 백제의 속셈이었다. 399년에 신라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은 급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고구려에게 복종하고 있던 신라를 공격한 것은 백제가 곧 고구려에게 저항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음해에 광개토호태왕은 보병과 기병 5만여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신라가 백제, 일본, 가야의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자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은 이미 391년에 신라에서 고구려에 인질을 본면서 고구려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때까지 경상도 일부 지역에 자리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신라가 고구려를 섬기는 제후국(諸侯國)이기에 도와준 것이기도 하지만, 만일 백제가 신라를 복속시키면 다시 강국으로 성장할 것을 우려해서 지원군을 파견했고 또한 이 기회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고구려군은 신라에 침범한 왜군을 격퇴시키고, 이어서 가야 지방까지 쫓아가 왜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금관가야(金官加耶)가 고구려군에 의해 멸망당해 김해 지역에서 일본 열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군사들은 경남 해안지방에서 일시 주둔하여 신라를 보호하며, 경주에도 따로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를 완전히 복종시켰다. 신라는 이후 100여년간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신라는 이 기간 동안 군사제도, 무기제조, 법률, 수공업 기술 등 많은 부분을 고구려로부터 배웠다. 신라가 장차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높은 문명을 배워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주의 호우총에서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 대한 제사에 사용된 제기(祭器)가 출토되었고, 서봉총에서는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연호가 새겨진 은그릇이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철저한 속국으로 존재했음을 알려 주는 유물들이다. 울산에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인 적석총(積石塚)이 있다. 이는 그곳에 주둔했던 고구려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이 군사작전의 성공으로 남해안까지 세력을 뻗었다. 광개토호태왕이 일본 열도까지 군대를 보내 공격했던 흔적도 있다. 반면 백제는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았다. 백제는 일본의 군사력을 지원받아 고구려에 몇 번 더 저항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고구려의 거듭된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백제는 이후 수십년간 고구려에 저항하지 못했다. ◆ 북방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남벌(南伐)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북쪽으로 눈을 돌려 거란(契丹)을 공격했다. 거란족은 요하 서쪽의 사라무롄강 유역에 사는 유목민족이었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과거 선비족이 살던 곳으로 고구려가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거란족은 378년 고구려 변방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잡아간 적이 있었다. 광개토호태왕은 그 일도 그 일이지만, 장차 모용씨선비족(慕容氏鮮卑族)이 세운 후연(後燕)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거란을 굴복시켜야 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393년에 친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거란을 공격하여 5백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이때 거란족이 영유하던 지역에는 거란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거나 흉년 등을 피해 이곳에 온 고구려인 1만명이 살고 있었다. "짐은 그대들의 조국 대고구려(大高句麗)의 태왕(太王)이니라. 그대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고구려에서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면 풍족히 먹고 살 수 있도록 땅을 나누어 줄 것이다. 백성이 있고 난 후에 임금이 있는 것이 아니냐. 짐을 믿고 조국으로 돌아가서 대제국 고구려, 살기 좋은 고구려를 함께 만들어 보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그곳에 살던 고구려 출신의 주민들을 설득해 귀순시켰다. 광개토호태왕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군주였다. 정복전(正服戰)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작업도 충실히 했던 것이다. 395년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다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부산(富山) 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족과 600~700여개의 유목민 마을을 정복하고 우마(牛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축을 빼앗아 왔다. 광개토호태왕은 정벌을 마치고 수레를 돌려 북풍 등을 지나 고구려의 국경지대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광개토호태왕이 간 염수 지역은 시라무롄강 유역으로 요하를 건너 한참 서북쪽으로 간 곳이다. 돌아올 때 국경지대를 시찰한 것은 장차 후연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동북방의 숙신(肅愼)에 대한 지배권도 강화하였다. 숙신은 서천왕(西川王)대 이후 고구려에 복속된 무리들이다. 398년에 대군을 파견하여 숙신 땅을 시찰하고 포로를 잡아오자 숙신의 무리들이 신하의 예를 다한 선물을 바치고 복종하였다. 또한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원정하였다. 동부여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광개토호태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의 수도를 공격했다. 그러자 동부여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했고, 동부여의 귀족들이 자진해서 항복하여 64개의 성과 1천 4백여개의 마을을 장악하였다. 부여는 494년 문자명왕(文咨明王) 때 고구려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지지만, 이미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대에 고구려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 후연을 멸망시킨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수행했던 정복전쟁(正服戰爭)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일이다. 광개토호태왕은 백제를 굴복시킨 후 402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후연 공략을 시작했다. 첫 목표는 후연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募容歸)가 있는 숙군성(宿軍城). 이곳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과 얼마 되지 않은 곳으로 현재의 조양시 부근이다. 광개토호태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숙군성을 공격하자,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의 대승(大勝)이었고, 후연은 수도방위가 위태로워졌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404년에 기병과 수군을 동원하여 후연의 연군을 공격했다. 후연의 후방을 공격한 것은 후연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405년 후연의 국왕 모용희(募容熙)는 군사 3만여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요충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기동력에 말려들어 패퇴하였다. 다음해에 모용희는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 후연의 북쪽에 위치한 거란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군과 거란족에게 3천리나 쫓겨다녔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후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407년에 5만 대군을 동원하여 사방합전(四方合戰)으로 후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광개토호태왕이 친솔(親率)하는 군대가 후연의 수도인 용성을 동남쪽인 북경지역에서 공격하고, 북쪽에서는 거란의 군대가 밀고 내려오며, 서북쪽에서는 고구려의 정예군이 쳐들어갔으며, 서남쪽에서도 고구려군이 공격했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군은 유주성전투(柳州城戰鬪)에서 후연의 십만 대군을 격퇴시키고 적군의 갑옷 1만여벌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후연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이렇게 되자 후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풍발이란 자가 고구려 사람인 고운(高雲)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북연(北燕)이란 나라를 세운 것이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북연을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인정하고 고운을 후왕(候王)으로 책봉했다. 광개토호태왕은 후연 지역이 한족(漢族)과 선비족(鮮卑族) 등 이민족이 많은데다가 중원의 여러 나라와 자주 다툼을 벌여야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직접 지배를 하지 않고, 이처럼 고구려에 복종하는 제후국을 세우고 철수한 것이다. 북연은 철저히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다가 435년 북위(北魏)에게 멸망당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북연은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장수태왕(長壽太王)은 군대를 보내 북연의 국왕과 백성들을 고구려 땅으로 데려왔다. 북연의 수도였던 용성, 즉 오늘날의 조양 지방은 고구려가 중원의 세력들과 그 힘을 겨루었던 완충지역이었다. ◆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면모를 알려 주는 유물들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은 408년에 죽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신하였던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무덤이다. 무덤 내부에는 고구려 귀족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벽화와 함께 그가 고구려에서 국소대형(國小大兄)을 비롯해서 여러 벼슬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13개 군(郡)을 관찰하는 유주자사를 했음을 알려 주는 글이 쓰여 있다. 그의 부하들이 다스린 13개 군은 모두 그 위치가 오늘의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고구려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때 북경 지역을 다스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 진이 다른 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가 북경 지역까지 세력을 뻗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재위기에 고구려는 이처럼 크게 영토를 확장시켰다.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만주의 집안시에 가 보면 높이가 무려 6.39m나 되며 무게만 해도 37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고구려 건국에서 광개토호태왕에 이르는 역사, 광개토호태왕의 정복전쟁, 그리고 광개토호태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대한 규정 등이 담긴 1775자의 글귀가 있다. 이것이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인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아들인 장수태왕(長壽太王)이 414년에 부왕(父王)의 무덤을 만들면서 함께 새긴 것이다.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은 그 크기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비문내용도 뛰어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비석을 직접 만나 보면 거대한 석비를 만든 고구려인의 힘과 문화능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영락(永樂)이란 광개토호태왕이 생전에 사용하던 연호이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무덤은 집안시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장군총(將軍塚)은 장수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군총은 높이 12.4m, 바닥 한 변의 길이가 31.6m이지만 태왕릉은 높이 30m에 바닥 한 변의 길이가 65m로 장군총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 광개토호태왕은 이 무덤이 산처럼 튼튼하게 만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랬지만, 현지에 가 보면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파괴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 웅장한 무덤의 규모는 여전하다. ◆ 나라를 잘 다스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전쟁만 잘 수행한 제왕은 아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호태왕을 영토를 넓힌 정복 군주만이 아닌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던 제왕으로 기억했다.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에 적힌 고구려인들의 평을 살펴보자. "태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태왕의 위력은 사해(四海)에 떨치셨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고구려인의 평가이기에 과장된 면도 있지만,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얼마나 백성들의 칭송을 많이 받은 임금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광개토호태왕은 백성들이 편안히 살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고구려의 국토를 개발하고 정비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먼저 고구려인의 정신적 단결을 위해 하늘 신과 조상들에게 제사하는 국사와 종묘를 수리하여 고유한 신앙체계를 정비했다. 또 새로 전래된 불교를 믿는 자를 위해 절을 9개나 짓는 등 다양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배려했다. 보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행정제도도 개편했다. 지방 행정조직을 세분화하고 새로운 벼슬도 만들었다. 또한 군사제도도 정비하여 힘있는 귀족들이 거느린 사병들을 줄이고 국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 국가의 직접 관할하에 있는 군대를 증가시켰다. 또한 군대도 고구려의 자랑인 철갑기병대를 주축으로 하는 외에 강력한 수군을 육성하여 백제와 일본, 후연을 공격할 때 활용했다. 이외에도 왕실과 관련된 법령도 정비하고, 무덤을 관리하는 사람들인 수묘인(守墓人)에 대한 규정도 정비했다. 광개토호태왕은 거대한 영토만을 개척한 것이 아니라 그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여러 제도까지 함께 개혁했던 것이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개척한 지역의 평지는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땅으로 개발되었다. 그가 개척한 거대한 영토는 더욱 많은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상업과 해외무역이 함께 발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윤택해졌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모두 고구려의 직접, 간접적인 지배하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비록 한민족(韓民族)의 국가들이 완전 통일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나라에 고구려의 선진문화가 전파됨으로써 서로간의 문화적 일체감이 강화되고, 민족의식이 생겨난 것은 차후 신라의 삼국통합에 기반이 되었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성을 쌓는 기법이나 토기제작 기법, 무덤의 형태, 건축술, 무기와 갑옷, 여러 제도 등이 두 나라에 전파되어 5세기 이후에는 삼국간의 문화적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 고구려(高句麗) 중심의 문명권을 건설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위대한 것은 결코 영토를 크게 넓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광개토호태왕 이전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국에 불과했을 뿐 진정한 대국(大國)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개토호태왕 이후 고구려는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거대왕국이 되었다. 당시 중원대륙에는 황하 유역에 북위(北魏), 양자강 유역에 송(宋)이 자리잡고 남북조(南北朝)라 일컬으며 대립하고 있었다. 또 몽골 초원에는 유연(劉淵)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만리장성과 대흥안령 산맥 동쪽 지역을 모두 관할하는 고구려와 함께 4강에 의한 국제질서를 만들었다. 이러한 4강체제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 의해 길이 열리고 장수태왕(長壽太王)과 문자명왕(文咨明王)을 거쳐 평원태왕(平原太王) 시기까지 이어졌다. 4강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았던 북위는 송나라 등과 수시로 전쟁을 치렀고, 북쪽의 유연과도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켰다. 고구려는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해 유연과 친하게 지내며, 유연과 송나라가 외교관계를 맺도록 연결시켜 주었다. 따라서 북위는 여러 나라에게 포위되는 것이 두려워서 대항하지 못하고 고구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였다. 게다가 6세기 초반에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누어졌다. 덕분에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이후 550년까지 큰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화북 지역의 백성들은 평화로운 고구려로 수없이 이주해 왔고, 고구려는 평화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명을 건설했다. 장안성을 비롯한 거대한 건축물, 고분벽화를 비롯한 위대한 예술품이 이때에 만들어졌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그의 위대함은 단지 정복전쟁(正服戰爭)의 연승(聯勝)으로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한 것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위대한 문명을 건설할 토대를 만든 것이다. 더욱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정복전쟁 덕택에 삼국이 점차 하나의 일체감을 갖게 된 점은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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