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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남정북벌(南征北伐). 몽골 대평원에서 사할린까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고구려 제19대 국왕이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374년에 태어나 391년 아버지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 시기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대격변기였다. 4세기 들어 흉노(匈奴), 갈(鞨), 선비(鮮卑), 저(低), 강(羌) 등 북방의 이민족들이 대거 중원 대륙에 진출해 각기 국가를 세우고 난립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라고 한다.

중원 대륙이 이처럼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高句麗)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팽창 정책을 꾀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대외 정복은 바로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수 있다. 호태왕비(好太王碑)를 중심으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생전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거란족(契丹族) 정벌.

395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패려(牌麗)의 3부락 600~700영(營)을 공파(攻破)하고 수많은 우마(牛馬)를 노획했다. 패려는 거란족(契丹族)을 구성하던 8부 가운데 하나인 필혈부(匹頁部)를 가리킨다.

유목민족인 거란은 나중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勃海)를 멸망시키고 요(遼)를 건국하는 민족이다. 일찍이 거란은 소수림왕(小獸林王) 때부터 변경을 침입해 고구려에 피해를 입혔다. 때문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즉위 초부터 거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즉위한 해인 391년 북쪽의 거란을 쳐서 적병 5백여명을 포로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과 고구려의 공격에 격파당한 거란은 원래 거주지인 내몽골 흥안령산맥 남쪽의 시라무롄강 유역을 떠나 난하 상류의 염호로 이동하던 거란족의 일부로 추측된다. 시라무롄강 유역은 후연(後燕)의 수도인 용성(龍城)의 북서쪽으로 이는 고구려가 거란을 공격해 후연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행한 공략이었다고 할수 있다. 곧 고구려는 후연이 거란과 연결해 고구려를 압박할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먼저 거란을 정벌함으로써 후연과 거란의 연결을 차단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대에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 인물인 고운(高雲)이 북연(北燕)의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여러차례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는 후연을 견제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내몽골 초원 지대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했다. 내몽골 지역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의 세력권이 북서 지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나는 가축을 획득해 경제적 이익도 챙길수 있었다. 특히 정복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재원이었던 기마병의 구성을 위해 질 좋은 말(馬)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고구려는 거란을 공략하고 내몽골 초원지대로 진출해 이를 해결했던 것이다.

왜군(倭軍) 격퇴.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신묘년(辛卯年, 391년) 이래 바다를 건너 침입해온 왜군을 격퇴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비문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으로, 조작설이 제기된 구절이기도 하다. 이 부분의 해석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를 왜(倭), 곧 일본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비석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임을 생각할 때 당연히 비문의 주체는 고구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신라를 침입하자 고구려의 군대가 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후에도 백제(百濟)는 왜(倭)와 연합해 신라(新羅)를 침입했다. 399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순시차 평양에 갔을때 신라 국왕이 왜군이 쳐들어왔음을 고하고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인 400년에 보병과 기병이 포함된 군사 5만명을 파견, 신라를 돕도록 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해 임나가야(任那伽倻)와 아라가야(阿羅伽倻)까지 진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체를 해체하고 왜군을 궤멸시켰다.

이 시기 한반도에 건너와 신라를 괴롭히던 일본인는 독자적으로 활동한 세력이라기보다 백제(百濟)의 요청에 의한 일종의 용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04년에도 대방계(帶方界)에서 일본인를 궤멸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방지역이 고구려와 백제 간의 경계 지역임을 생각할 때 이 일본인 역시 백제의 요청으로 출병했다가 고구려군에게 섬멸당했다고 할수 있다. 곧 백제는 일본의 지배 세력에게 선진문물을 전수해 정치적 후원을 하는 대신 군사력을 제공받아 당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백제의 행동은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을 초래했다.

백제(百濟) 공략.

앞서 비문에 등장하는 왜군의 실체를 백제의 요청으로 출병한 일종의 용병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왜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백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군사를 일으켜 백제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비문에 의하면 396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을 건너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 제17대 국왕인 아신왕(阿辛王)은 남녀 1천여명과 가는베 1천필을 바치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게 굴복하고 고구려의 영원한 신국(臣國)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는 백제의 고구려에 대한 항복이었다. 이때 고구려군은 백제의 58개 성과 700여곳의 마을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의 아우 및 대신 10여명을 불모로 삼아 돌아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후에도 백제는 왜군을 동원해 공공연히 고구려에 적대적인 행동을 했다. 이데 대해 고구려는 군사작전을 적극적으로 결행하여 일본인를 격퇴하는 동시에 백제를 응징했다. 비문 가운데 407년의 기록은 공격 대상이 확실하지 않아 이를 후연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기도 하고, 백제에 관련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이 해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군사 5만여명을 보내 적을 소탕하고 헤아릴수 없이 많은 군수품과 장비를 노획했다. 고구려군은 돌아오는 길에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사구성(沙口城)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백제의 사구성(沙口城)으로 보면 이 407년의 기사는 백제 공략과 관계된 기사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남진 경영에 힘썼고, 이에 맞서 백제는 일본인까지 동원해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신라를 공격해 고구려의 침입을 초래했다. 이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고구려와 이를 적극 저지하려는 백제의 이해가 상충하면서 발생한 충돌이었다고 할수 있다.

동부여(東夫餘) 정벌.

410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부여를 정벌해 64성과 1400여개의 촌락을 함락시켰다. 이 동부여(東夫餘)의 위치에 대해서는 길림성 일대로 보기도 하나 목단강에서 두만강 유역의 연해주 일대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비문에 기록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정복 지역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 동부여 정벌 기사는 전방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 영토 확장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한편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398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군대를 보내 숙신(肅愼) 지역을 순시하게 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숙신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다. 숙신을 강원도 일대에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보기도 하고, 백두산 이북의 길림성 일대 또는 송화강 유역에 거주했던 주민으로 보기도 한다. 숙신에 대한 기사는 정복지가 아니라 지배 지역에 대한 순시라는 점에서 정복 기사와 구분된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정복을 통한 지배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이미 복속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것을 알수 있다.

대(對) 후연(後燕) 전쟁.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비문의 기록 중에는 보이지 않는 후연과의 전쟁 기사가 여러차례 나와 있다. 이는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구려와 후연이 세력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충돌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에서 고구려의 거란 정벌 역시 후연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음을 이미 언급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요하를 건너 요서지역까지 진출해 후연을 위협했다. 401년 고구려가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자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또 진서(晉書)의 기록에 의하면 403년에도 고구려는 후연의 연군을 공격했다. 후연의 고구려 침입도 있었지만 407년 내부의 반란으로 후연이 멸망하고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도 막을 내렸다.

고구려 역사상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통치 시기는 전방위에 걸쳐 정복전쟁이 실시되어 고구려의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장된 시기였다. 북으로 내몽골, 서로 요서지역, 동으로 연해주 지역에 걸쳐 지배 영역을 확대하고 남으로 신라와 백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업적과 위대함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출처; 범우사 版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역사, 중국에는 없다." (2003년)

해설; 강선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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