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紹介 Relationship

(韓国国定教科書・99年度版・明石書店、日本語訳) http://members.tripod.com/textbook_korea/fr_2.htm


民族抹殺統治
    1920年代後半、世界的に吹きあれた経済恐慌の難局を打開するために、
日帝は日本本土と植民地を一つに結びつける経済ブロックを形成した。
これによって韓半島の労働力と資源は日帝によって徹底的に収奪された。

その後、日帝は満州を占領し、さらに中日戦争を挑発して(1937年)、     
本格的に大陸侵略を強行するとともに、韓国を大陸侵略の兵站基地にした。
そして、植民政策を強化し、わが民族をさらに弾圧し、あらゆる分野にわたって
植民地収奪政策を強化した。 日帝はこれにとどまらず太平洋戦争を挑発した後、
戦争遂行のために韓国の人的・物的資源収奪に狂奔した。それだけでなく、
わが民族の文化と伝統を完全に抹殺し、韓国人を日本人に同化しようとあらゆる手段と方法を動員した。

 わが民族は日帝の内鮮一体、日鮮同祖論、皇国臣民化のような荒唐無稽な
スローガンのもとで、わが国の言葉と歴史を学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また、皇国臣民の誓詞暗誦、宮城遥拝、神社参拝はもちろん、
はなはだしくはわれわれの姓名までも日本式に変えるように強制した。
日帝はこれを拒否する人に対しては投獄、殺傷までも躊躇せず
このような政策に従わない宗教系統の学校は閉鎖された。

また、わが民族は戦争に必要な食糧と各種物資を収奪され、
わが国の青年は志願兵という名目で、また徴兵制と徴用令によって、
日本、中国、サハリン、東南アジアなどに強制動員され、命を失い、
女性まで挺身隊という名で強引に連行され日本軍の慰安婦として犠牲になった。

このような日帝の植民地政策は韓国の自主的近代化と発展に莫大な支障をきたした。
あらゆる政策が日帝の植民統治のための手段として計画され執行され、
施設の設備投資もやはり同じ目的で行なわれたために、わが民族には何の役にも立たなかった。


赤字で書いた点は、あきらかな間違いです。


(1)1937年の盧溝橋事件を指してるようにみえますが、現在でも日中どちらが仕掛けたか
  不明の事件です。共産党の陰謀説もあります。当時の日本は国民党と対立してました。
  その事件を、『挑発』と、描くのは問題があるかと思います。むしろその前の関東軍の独断の話を
  描写すべきかと思います。『きっかけに』と描くなら問題無いと考えます


(2)ハングルを禁止した?
   1910年の併合以来、http://photo.jijisama.org/hg.html このような教科書も作成し、
   小学校・中学校でもハングル語の授業が行われました。末期には、学校の授業も
   廃止されましたが、ハングルを系統だてて、学習する機会を作ったのは、朝鮮総督府です。
   『国語の常用』を(日本語)推進したという歴史事実は、ありますが、ハングルを禁止したという
   公文書は、一切見つかっていません。道や県ごとによっても対応が様々だった事実があります。
   
   併合前は、公立の普通学校( 小学校
)は、100校に満たなかったが、総督府のもとで、
   全土でおよそ5000校の小学校が、つくられました。当初は義務教育ではなかったので
   就学率は、16%程度だったものを、末期は60%以上にまであげています。

(3) 太平洋戦争を挑発した
   真珠湾攻撃をさしてるように見えます。先制攻撃をしたのは
   事実ですが、アメリカや、オランダ、中国、イギリス、等々に貿易封鎖された事が原因です。
   最終的に、アメリカの国務長官から、ハルノートというものを通告され、無理難題を押し付けられたのが  
   きっかけです。『つまり、挑発はしていません』
   
(4)韓国の人的・物的資源収奪に狂奔した
  1944年戦争末期の頃には、鍋や釜まで、集められた話がありますが、日本も同様でした。
  末期の物資が足りない時期になってからの話なので、全ての時代を通して描くのは、正しくないように思います。
  志願制度が出来たのは、1938年以降。徴用・徴兵があったのは、1944年以降つまり、多くの人々は、
  自らの意思で、日本の為に働いていたという事です。

(5)女性まで挺身隊という名
  挺身隊とは、工場で従事する女性の事をいいます。慰安婦とは、別の行為でした。
  朝鮮半島の場合も、工場等での徴用はありましたが、それと慰安婦は別の話です。

(6)慰安婦として強制連行
  2009年現在でも、日本軍が女性を無理やり、連行したなどという証拠は、何ひとつ見つかってません。
  多くは仲介業者によるもので、韓国政府も調査した結果、軍が関与していた話は、未だに見つかってません。
  また、慰安婦の給与明細が残っており、当時の給料からは考えれない高給な仕事でした。

(7)創氏改名
 無理やり、日本式の名前に、変更したとありますが、2割の人は元の朝鮮式の名前のままでした
 朝鮮総督府での公文書でも、無理やり改名を指示したような証拠は、一切見つかってません。
 創氏=名字の設定で、改名は任意でした。名前を変える場合料金の徴収してます。
  
 政治的な件で、逮捕されるような例は、あったようですが、殺害したという話はありません。
 朝鮮名のまま、日本軍として戦ってる兵士の例や、日本の国会議員になった人物まで存在します。
 研究を掘り下げる必要があるとは、思いますが、全てが強制だったと決め付けるのは歪曲です。

(8)
わが民族には何の役にも立たなかった。
  現在残ってる、ソ¥ウル駅は、日帝が作った物です。半島全域の鉄道路線も、現在ベースの物と
  変わりありません。 ダム、湾口建設、学校・病院。日帝が立てた、施設やそれに関わるものは、
  例をあげたらきりがありません。ソ¥ウル大学の前身は、京城帝国大学といい、日本にある帝国大学より
  先に作られました。
 

(9)
韓国の自主的近代化と発展
 併合前の時代は身分制度が、解体されてまもなかったです。人口の多くは没落両班の人達でした。
 李朝の末期には、6割以上が両班だったのです。主な産業は農業・水産業くらい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
 財政困難だった、李朝や大韓帝国は、林業・漁業・炭鉱の採掘権、鉱山の採掘権、鉄道の施設権を、次々と
 外国の売り飛ばし、もはや破産寸前の国家でした。 日清戦争や、日露戦争で韓国を保護化した日本が
 それらの権益を戦争で得たり、併合後に買い戻しています。 自主近代化とは無理であったと考えます。


人口の推移 収奪や圧政にあえいでいたなら、なぜこれだけ人口が増えたのか、謎です。

朝鮮半島人口の推移

   

    1753年: 730万人

    1850年: 750万人

    1906年: 980万人(第二次日韓条約により、1905年より朝鮮は日本の保護国へ)

    1910年:1312万人(日韓併合条約により、1910年より朝鮮は日本の一部となる)

    1920年:1691万人

    1930年:1968万人

    1940年:2295万人

    1944年:2512万人(1945年、日本の敗戦により総督府の統治権は米軍へ移譲)

   













한국의 교과서·왜곡 투성이입니다.

(한국 국정교과서·99년도판·아카시 서점, 일본어 번역) http://members.tripod.com/textbook_korea/fr_2.htm


민족 말살 통치
    192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 불어 거칠어 진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일제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에 묶는 경제 블록을 형성했다.
이것에 의해서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제에 의해서 철저하게 수탈 되었다.

그 후, 일제는 만주를 점령해, 한층 더중일 전쟁을 도발하고(1937년),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을 강행하는 것과 동시에,한국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했다.
그리고, 식민 정책을 강화해, 우리 민족을 한층 더 탄압해, 모든 분야에 걸쳐서
식민지 수탈 정책을 강화했다. 일제는 이것에 머무르지 않고태평양전쟁을 도발한후,
전쟁 수행을 위해서한국의인적·물적 자원 수탈에 광분 했다.그 만큼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하게 말살해, 한국인을 일본인에 동화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우리 민족은 일제중센이치체, 일선 동조론, 황국 신민화와 같은 황당 무계인
슬로건의 아래에서,우리 나라의 말과 역사를 배울 수 없었다.
또, 황국 신민의 서사 암송, 미야기 하루카배, 신사 참배는 물론,
심하지는 우리의 성명까지도일본식으로 바꾸도록(듯이) 강제했다.
일제는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투옥,살상까지도 주저 하지 않고,
이러한 정책에 따르지 않는 종교 계통의 학교는 폐쇄되었다.

또, 우리 민족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각종 물자를 수탈 되어
우리 나라의 청년은지원병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또 징병제 징용령에 의해서,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시아 등에 강제 동원되어, 생명을 잃어,
여성까지 정신대라고 하는 이름으로 억지로 연행되어일본군의 위안부로서 희생이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와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모든 정책이 일제의 식민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서 계획되어 집행되어
시설의 설비 투자도 역시 같은 목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우리 민족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적자로 쓴 점은, 명확한 실수입니다.


(1)1937년의 노구교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게 보입니다만, 현재에도 일중 어느 쪽이 걸었는지
  불명의 사건입니다.공산당의 음모설도 있습니다.당시의 일본은 국민당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도발」과 그리는 것은 문제가 있을까생각합니다.오히려 그 전의 관동군의 독단의 이야기를
  묘사해야할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계기로」그린다면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2)한글을 금지했다?
   1910년의 병합 이래, http://photo.jijisama.org/hg.html 이러한 교과서도 작성해,
   초등학교·중학교에서도 한글어의 수업을 했습니다.말기에는, 학교의 수업도
   폐지되었습니다만, 한글을 계통 일부러라고, 학습할 기회를 만든 것은, 조선 총독부입니다.
   「국어의 상용」을(일본어) 추진했다고 하는 역사 사실은, 있습니다만, 한글을 금지했다고 한다
   공문서는, 일절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길이나 현 마다 따라도 대응이 여러가지였던 사실이 있습니다.
   
   병합전은, 공립의 보통 학교(초등학교 )(은)는, 100교에 못 미쳤지만, 총독부의 아래에서,
   전 국토에서 대략 5000교의 초등학교가, 만들어졌습니다.당초는 의무 교육은 아니었기 때문에
   취학률은, 16%정도였던 물건을, 말기는 60%이상으로까지 주고 있습니다.

(3)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진주만 공격을 찌르고 있는 것 같게 보입니다.선제 공격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미국이나, 네델란드, 중국, 영국, 등등에 무역 봉쇄된 일이 원인입니다.
   최종적으로, 미국의 국무장관으로부터, 헐 노트라는 것이 통고되고 생트집을 강요 당했던 것이  
   계기입니다.「즉, 도발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4)한국의인적·물적 자원 수탈에 광분 했다
  1944년 전쟁 말기의 무렵에는, 냄비나 솥까지, 모아진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기의 물자가 부족한 시기가 되고 나서의 이야기이므로, 모든 시대를 통해 그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원 제도를 할 수 있던 것은, 1938년 이후.징용·징병이 있던 것은, 1944년 이후 즉,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사로, 일본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하는 일입니다.

(5) 여성까지 정신대라고 하는 이름
  정신대란, 공장에서 종사하는 여성의 일을 말합니다.위안부란, 다른 행위였습니다.
  한반도의 경우도, 공장등으로의 징용은 있었습니다만, 그것과 위안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6)위안부로서 강제 연행
  2009년 현재에도, 일본군이 여성을 억지로, 연행했다는 등이라고 하는 증거는, 무엇 하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많게는 중개업자에 의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도 조사한 결과, 군이 관여하고 있던 이야기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 위안부의 급여 명세가 남아 있어 당시의 급료에서는 생각없는 고급인 일이었습니다.

(7)창신개명
 억지로, 일본식의 이름에, 변경했다고 있습니다만,2할의 사람은 원래의 조선식의 이름인 채였습니다.
 조선 총독부에서의 공문서에서도, 억지로 개명을 지시한 것 같은 증거는, 일절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창씨=성씨의 설정으로, 개명은 임의였습니다.이름을 바꾸는 경우 요금의 징수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건으로, 체포되는 예는, 있던 것 같습니다만,살해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조선명인 채,일본군으로서 싸우고 있는 병사의 예나, 일본의 국회 의원이 된 인물까지 존재합니다.
 연구를 파고 들 필요가 있다는 것은, 생각합니다만, 모두가 강제였다고 단정짓는 것은 왜곡입니다.

(8)
우리 민족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현재 남고 있다, 소울역은, 일제가 만든 것입니다.반도 전역의 철도 노선도, 현재 베이스의 물건과
  서로 바뀝니다. 댐, 만구 건설, 학교·병원.일제가 세운, 시설이나 거기에 관련되는 것은,
  예를 들면 송곳이 없습니다.소울 대학의 전신은, 경성 제국대학 이라고 하여,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보다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9)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와 발전
 병합전의 시대는 신분 제도가, 해체도 없었습니다.인구의 상당수는 몰락 양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조의 말기에는, 6할 이상이 양반이었습니다.주된 산업은 농업·수산업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재정 곤란했던, 이조나 대한제국은, 임업·어업·탄광의 채굴권, 광산의 채굴권, 철도의 시설권을, 차례차례로
 외국의 팔아 치워, 이미 파산 직전의 국가였습니다. 청일 전쟁이나, 러일 전쟁으로 한국을 보호화한 일본이
 그러한 권익을 전쟁으로 얻거나 병합 후에 되사고 있습니다. 자주 근대화와는 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인구의 추이 수탈이나 압정에 맞을 수 있는 있어로 아픈들 , 왜 이만큼 인구가 증가했는지, 수수께끼입니다.

한반도 인구의 추이

1753년: 730만명
1850년: 750만명
1906년: 980만명(제2차 한일 조약에 의해, 1905년부터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에)
1910년:1312만명(한일합방조약에 의해, 1910년부터 조선은 일본의 일부가 된다)
1920년:1691만명
1930년:1968만명
1940년:2295만명
1944년:2512만명(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의해 총독부의 통치권은 미군에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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