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最近jpnは倭寇狩りばかりしていて、チョソ¥狩りをしなくなったとお嘆きの皆様へ

今日は久々にkudara70狩りです。
 
「大陸百済」「大百済帝国」などの妄想を見たEnjoyKoreaユーザーは多いと思う。
端から妄想であるのは百も承知なのだが、最近活きのいいチョソ¥もいないので、いわゆる大陸百済説というものの骨幹となる「百済は遼西を攻略し、百済郡を設置した」という言説についてマジスレでも立ててみようと思う。

 元ネタは、言わずと知れたpolalisのいわゆる「イヤ論文」。polalisのイヤ論文といっても、polalisが書いた論文ではない。
 
 論文の名称は「百済略有遼西記事初探(On Records of Peakche¥“s Advance Towards Liaoxi)」金憲淑(延辺大学社会科学基礎部,吉林 延吉 133002)という朝鮮_族の研究者が書いた論文である。この論文には、EnjoyKorea上で見られる、いわゆる大陸百済説の基礎となる主張のほとんどが含まれている。以下にその要約を挙げる。
1 論文冒頭で論者は、百済が遼西を領有したとする説には肯定論と否定論があることを認めた上で、自らが肯定論の立場をとっていることを表¥明している。
2 史料として採用したのは「宋書」「梁書」「南史」であり、これはEnjoyKoreaのいわゆる「百済厨」が挙げる史料に同じである。
 
 史料1 (宋書)百濟國 、本與高驪倶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略有遼東、百濟略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史料2  (梁書)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史料3  (南史)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千余里晉世句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凡例:紫色=宋書と南史共通 =梁書と南史共通 =3者に共通)
 
 論者は上記の史料を提示した上で、宋書において史書に百済伝が初めて記載されたとし、宋代には百済が国際社会の舞台で活躍した証拠とした上で、宋書の記述は信頼するに足るとしている。
 
 次に梁書、南史の記述の類似性を指摘し、南史の記述は梁書の転載であるとしており、その記述と三国史記百済本紀534年の記述の双方に、百済が梁に朝貢した記録があり、その記述の一致から、梁書及び南史の遼西支配の記述は信頼できると結論づけている。
 

 最後に百済が遼西を支配した可能¥性に言及し、「西晋当時のいわゆる五胡十¥六国の時代、北方が混乱した隙に乗じて百済が遼西を攻略したはずだ」としている。論者によれば、この当時遼東では鮮卑と高句麗が戦っていたとしている。

 
 
 
 さらに、百済がこの鮮卑と高句麗の戦争に参戦し、晋書咸康八年の記述を持ち出して「遼西に百済が進出した根拠」としている。

 また、百済が北魏と戦い、これを撃破したとする史書の記述により、北魏の数十¥万の騎兵が朝鮮半島南西部にまで侵攻することは高句麗に阻まれ陸路では不可能¥であり、北魏の海上輸送能¥力から海路も不可能¥である、故にこれは大陸の遼西で戦われた戦争に違いないとしている。これもEnjoyKorea上でしばしば見かける論法である。
 
 最後に「百済は晋の時代に限らず大陸の一部に領有権を持っていた」と締めている。
 
以上のような要旨のイヤ論文であった。

 
じゃあ反論♪
普通にこれを見れば百済の国力なんか解るだろw
とは言わずに滾々と説明♪
 
Aへの反論
 中国の史書の列伝に記述されることが、とりもなおさず国際社会での地位を示すという考えであれば、倭国は百済の遙か以前から中国と外交関係を樹立し、国際的な舞台で活躍していたことになる。このことは、4世紀前半以前の百済は、特に記述する価値もない、国際的には無力かつ矮小な存在だったことを示す。つまり、中国大陸の一部を領有するような有力な勢力ではなかったと、この学者自らが認めているのである。百済の国際社会へのデビューが倭より遅かったと証明してくれてありがとう。
Bへの反論
 梁書と南史に見られる百済が朝貢した記録が、三国史記と一致するから、梁書及び南史に見られる「朝貢」が歴史的事実であろうと推測することには諸手をあげて賛成できる。その根拠は、異なる二ヶ所において、双方の当事者が書いた記録が一致しているからである。しかしながら、梁書と南史に見られる「百済の遼西支配」は三国史記に記述はない。つまり、両者の記述は一致しておらず、梁書と南史の記述は信用するに足りないということを自ら証明した自爆である。
Cへの反論
 五胡十¥六国の時代、百済が大国として中国大陸の遼西から華北に進出したのなら、五胡十¥六国に百済が加わり、五胡十¥七国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つまり、百済など進出していなかった証拠が「五胡十¥六国」という名称に現れていると言って良いのである。
Dへの反論
 晋書咸康八年記述には、どこにも百済が遼西に新出したと書いておらず、なんら百済の遼西支配の根拠にはなり得ない。ここでも「書いていないものが読める民族」の面目躍如です。
Eへの反論
 いつも言うように、南朝の記録には宋書を原典とする記述が見られるが、遼西を実際に支配していた北朝の記録には当該記述はない。韓国人は往々にして「自国の敗北を隠蔽したはずだ」とするが、晋書には異民族に対する晋の敗北に関する記述も普通に見られ、百済に対する敗北を隠蔽する必然性も蓋然性も存在しない。
 また、海上から朝鮮半島への輸送が出来ず、陸上からは高句麗に阻まれて軍を送れないとする条件は、北魏だけでなく百済にも等しく科せられる条件であり、百済が飛び地である遼西へ大軍を派遣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ことを示す。まあ、輸送力や輸送経路に言及したのは自爆ですよね、ということで。
Fへの反論
 晋の時代に限らないとすれば、具体的に西暦何年ころから、何年頃まで、どこを領有したのか、当該地域の支配体系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かということは全く説明できないのである。つまり、ただ言っているだけで根拠は全くない。要するに
「いつもながらの妄想」
 
 
結論:やっぱりバカ学者( ´H`)y-‾‾
 
 
 
 ちなみに、同じ延辺大学の歴史学教授 劉子敏は、当該論文を評して「筆者は少しでも中国遼西の歴史的な沿革を知っている者であれば、百済がかつて遼西を支配したなどという記述が信用できるものであるなどとは信じることが出来ず、この問題は根本的に議論の対象にさえならない」と一刀両断している。
 
 その後、金憲淑から劉子敏に対する明確な反証があったとは寡聞にして聞き及んでいない。もしも金憲淑及びその賛同者が、未だに明確な反論をできていないとすれば、「百済略有遼西記事初探(On Records of Peakche¥“s Advance Towards Liaoxi)」という論文の主張は、学術的には「既に死んだ説」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H`)y-‾‾
 
それでは、反論がある方は史料と論理に依拠した意見の開陳をどうぞ。スレッド本文で論破済みの内容を10000回書き込んでも何も解決いたしません。(嘲笑 
 
まあ、広西省の百済県が大陸百済の証拠なんていうバカは生きている価値がないよね♪


(쿠다라)백제의 성실하다는 것은입니까?

 

최근 jpn는 일본인 사냥만 하고 있고, 쵸소사냥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탄의 여러분에게

오늘은 오래간만에 kudara70 사냥입니다.
 
「대륙 (쿠다라)백제」 「대(쿠다라)백제 제국」등의 망상을 본 EnjoyKorea 유저는 많다고 생각한다.
구석으로부터 망상인 것은 백도 용서지만, 최근 살아의 좋은 쵸소도 없기 때문에, 이른바 대륙 (쿠다라)백제설이라는 것의 골격이 되는「(쿠다라)백제는 료서를 공략해, (쿠다라)백제군을 설치했다」라고 하는 언설에 대하고 마지스레에서도 세워 보려고 한다.

 원재료는, 말하지 않고와 알려진 polalis의 이른바 「아니 논문」.polalis의 아니 논문이라고 해도, polalis가 쓴 논문은 아니다.
 
 논문의 명칭은 「(쿠다라)백제략유료서기사 첫탐(On Records of Peakche"s Advance Towards Liaoxi)」금헌숙(연변대학 사회과학 기초부, 요시바야시 연제 133002)라고 하는 조선_족의 연구자가 쓴 논문이다.이 논문에는, EnjoyKorea상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대륙 (쿠다라)백제설의 기초가 되는 주장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다.이하에 그 요약을 든다.
1 논문 첫머리에서 논자는, (쿠다라)백제가 료서를 영유 했다고 하는 설에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있는 것을 인정한 다음, 스스로가 긍정론이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표명 하고 있다.
2 사료로서 채용한 것은 「송서」 「량서」 「남사」이며, 이것은 EnjoyKorea의 이른바 「(쿠다라)백제주」가 드는 사료에 같다.
 
 사료 1 (송서) 백제국 ,본여고려구 재랴오둥지동천여리, 기 후략유랴오둥, 백제략료서.백제소치, 위지진헤이군진평현.
 사료 2  (량서) 기국본여구려 재랴오둥지동,진세구려기략유랴오둥, 백제역거유료서,진평2군지의, 자치백제군.
 사료 3  (남사) 기국본여구려 재랴오둥지동천 요리,진세구기략유랴오둥,백제역거유료서,진평2군지의, 자치백제군.
(범례:보라색=송서와 남사 공통 =량서와 남사 공통 파랑=3자에게 공통)
 
A 논자는 상기의 사료를 제시한 다음, 송서에 대해 사서에 (쿠다라)백제전이 처음으로 기재되었다고 해, 송대에는 (쿠다라)백제가 국제사회의 무대에서 활약한 증거로 한 다음, 송서의 기술은 신뢰하는에 충분하다고 하고 있다.
 
B 다음에 량서, 남사의 기술의 유사성을 지적해, 남사의 기술은 량서의 전재이라고 하고 있어, 그 기술과 삼국사기 (쿠다라)백제본기 534년의 기술의 쌍방으로, (쿠다라)백제가 대들보에 조공 한 기록이 있어, 그 기술의 일치로부터, 량서 및 남사의 료서지배의 기술은 신뢰할 수 있다고 결론 짓고 있다.
 
C 마지막에 (쿠다라)백제가 료서를 지배한 가능성에 언급해, 「서진 당시의 이른바 5호10육국의 시대, 북방이 혼란한 틈을 타 (쿠다라)백제가 료서를 공략했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논자에 의하면, 이 당시 랴오둥에서는 선비와 고구려가 싸우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D 게다가 (쿠다라)백제가 이 선비와 고구려의 전쟁에 참전해, 진서함강8년의 기술을 꺼내 「료서에 (쿠다라)백제가 진출한 근거」라고 하고 있다.

E 또, (쿠다라)백제가 북위와 싸워, 이것을 격파했다고 하는 사서의 기술에 의해, 북위의 수십만의 기병이 한반도 남서부에까지 침공하는 것은 고구려에 방해되어 육로에서는 불가능이며, 북위의 해상운송능력으로부터 해로도 불가능인, 고로 이것은 대륙의 료서로 싸워진 전쟁이 틀림없다고 하고 있다.이것도 EnjoyKorea상에서 자주 보이는 논법이다.
 
F 마지막에 「(쿠다라)백제는 진의 시대에 한정하지 않고 대륙의 일부에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잡고 있다.
 
이상과 같은 요지의 아니 논문이었다.

 
자반론♪
보통으로 이것을 보면 (쿠다라)백제의 국력은 알겠지 w
(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뚝뚝 설명♪
 
A에의 반론
 중국의 사서의 열전에 기술되는 것이, 새도 더 좌도 국제사회로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하는 생각이면, 야마토국은 (쿠다라)백제의 요나 이전부터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해,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것이 된다.이것은, 4 세기 전반 이전의 (쿠다라)백제는, 특히 기술하는 가치도 없는, 국제적으로는 무력하고 왜소한 존재였던 일을 나타낸다.즉, 중국 대륙의 일부를 영유 하는 유력한 세력은 아니었다고, 이 학자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쿠다라)백제의 국제사회에의 데뷔가 야마토보다 늦었다고 증명해 주어 고마워요.
B에의 반론
 량서와 남사로 보여지는 (쿠다라)백제가 조공 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일치하기 때문에, 량서 및 남사로 보여지는 「조공」이 역사적 사실이어도 추측하는 것에는 양손을 들어 찬성할 수 있다.그 근거는, 다른 2개소에 있고, 쌍방의 당사자가 쓴 기록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량서와 남사로 보여지는 「(쿠다라)백제의 료서지배」는 삼국사기에 기술은 없다.즉, 양자의 기술은 일치하고 있지 않고, 량서와 남사의 기술은 신용 할 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자폭이다.
C에의 반론
 5호10육국의 시대, (쿠다라)백제가 대국으로서 중국 대륙의 료서로부터 화북에 진출한 것이라면, 5호10육국에 (쿠다라)백제가 더해져, 5호10나나쿠니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즉, (쿠다라)백제 등 진출하지 않았던 증거가 「5호10육국」이라고 하는 명칭에 나타나고 있다고 해 좋은 것이다.
D에의 반론
 진서함강8년 기술에는, 어디에도 (쿠다라)백제가 료서에 신출 했다고 쓰지 않고, 어떤 (쿠다라)백제의 료서지배의 근거로는 될 수 없다.여기에서도 「쓰지 않은 것이 읽을 수 있는 민족」의 면목약여입니다.
E에의 반론
 언제나 말하도록(듯이), 남조의 기록에는 송서를 원전으로 하는 기술을 볼 수 있지만, 료서를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북조의 기록에는 해당 기술은 없다.한국인은 때때로 「자국의 패배를 은폐 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진서에는 이민족에 대한 진의 패배에 관한 기술도 보통으로 볼 수 있어 (쿠다라)백제에 대한 패배를 은폐 하는 필연성도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해상에서 한반도에의 수송을 하지 못하고, 육상에서는 고구려에 방해되고 군을 보낼 수 없다고 하는 조건은, 북위 뿐만이 아니라 (쿠다라)백제에도 동일하게 부과되는 조건이며, (쿠다라)백제가 뚝 떨어진 영토인 료서에 대군을 파견할 수 할 수 없었던 것을 나타낸다.뭐, 수송력이나 수송 경로에 언급한 것은 자폭이군요, 라고 하는 것으로.
F에의 반론
 진의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서기 몇 년무렵부터, 몇 년무렵까지, 어디를 영유 했는지, 해당 지역의 지배 체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라고 하는 것은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즉, 단지 말하는 것만으로 근거는 전혀 없다.요컨데
「평상시의 망상」
 
 
결론:역시 바보 학자( ′H`) y-~~
 
 
 
 덧붙여서, 같은 연변대학의 역사학 교수류자민은, 해당 논문을 평가해 「필자는 조금이라도 중국료서의 역사적인 연혁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쿠다라)백제가 일찌기 료서를 지배했다는 등이라고 하는 기술을 신용할 수 있는 것인 등이라고는 믿지 못하고,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논의의 대상으로마저 안 된다」라고 일도양단 하고 있다.
 
 그 후, 금헌숙으로부터 류자민에 대한 명확한 반증이 있었다고는 과문으로 해 들어서 알지 않았다.만약 금헌숙 및 그 찬동자가, 아직도 명확한 반론을 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 「(쿠다라)백제략유료서기사 첫탐(On Records of Peakche"s Advance Towards Liaoxi)」이라고 하는 논문의 주장은, 학술적이게는「이미 죽은 설」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H`) y-~~
 
그러면, 반론이 있는 분은 사료와 논리에 의거 한 의견의 개진을 부탁합니다.스렛드 본문으로 논파 끝난 내용을 10000회 써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습니다.(조소  
 
뭐, 꽝시성의 쿠타라현이 대륙 (쿠다라)백제의 증거라고 하는 바보는 살아 있는 가치가 없지요♪
 


TOTAL: 8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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