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ソグィゾング(徐貴鐘) 私は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第1戦闘分隊長 ¥”照尺がなかった. 1発飛ばして, 2発, 3発, 4発飛ばしたのが後尾に落ちるのだから... 5足目殴ったがそれが日本警備艇後尾に当たった.¥”

韓半島で 6.25 戦乱(戦乱)が終わる頃, 東地の果て独島(独島)ではもう一つの戦争が起っていた. 戦争の混乱を乗じて日本はよく独島上陸を試みたし独島が自分たちの地と言いながら返還を要求して出た. 行政的, 軍事的に空白期だったあの時に独島を守り出したことは軍人たちではなかった. 6.25 戦乱(戦乱)に参戦した鬱陵島青年たち... すぐ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だった.

庭園も(丁元度) 私は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第2戦闘分隊長 ¥”独島が者で 倭やつら地だと立て札を持ってからさしてするからそれで私たちが出たんです.¥”

現在生存している隊員たちの証言を通じてその頃交戦状況をいきいきと伝えて聞くことができた.

ソグィゾング(徐貴鐘) ¥”あの時後尾まで入って来て挑発する時にはあ, これ上陸を目的にするのではないか... これで私たち生命の脅威を感じて...¥”

第1戦闘分隊長ソグィゾング(徐貴鐘)さんを含めて第2戦闘分隊長庭園も(丁元度)さんも一緒に戦闘に参加した.

庭園も(丁元度) ¥”飛行機も離陸して... あの時巡視船がそばにまで全ゴルがジで鉄砲をブリッジにうって迫撃砲もお腹の上に減らされて...¥”

正式軍人たちでもなかったしひたすら私の地を守ろうと遂行した勇ましい戦闘... 彼らは命をかけて彼らの基盤を守った.

ホングスンチル(洪順〓) 私は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大将の否認朴英煕(朴英喜) ¥”完全に命を出したけんかだった. 死ぬのを覚悟して... そちらは飛行機も離陸するの, 軍艦みたいなことが来て覚悟しなさいと言って...¥”

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もし彼らが守り出さなかったらこの地は果して誰の地になっただろうか? 彼らが守り出した独島は一点燈台ドルを灯して完全な大韓民国の領土として東地の果て民族の地でにょっきと湧いた.

東京中心で会った日本人たちは独島を竹島で分かっているし彼らの固有領土で認識していた.

韓国人記者 ¥”竹島だと聞いて見たんですか?¥”

東京市民 1 ¥”だね, このごろ問題になっていますね.¥”

韓国人記者 ¥”どの国の領土でご存じですか?¥”

東京市民 1 ¥”私は日本人だから当然日本のだと言わないと.(笑い)¥”

東京市民 2 ¥”当然日本領土ですね.¥”

韓国人記者 ¥”根拠は何ですか?¥”

東京市民 2 ¥”それは分からないですね.¥”

東京市民 3 ¥”マスコミやニュース報道を通じて日本領土だと認識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太平洋戦争敗北の痛みを洗い出して今の成長を成した日本. しかし独島を自分たちの地だと主張する日本の姿で過去侵略と収奪及び虐殺を事とした日本帝国主義の姿が照らされている. 絶え間ない彼らの他国領土に対する野望が今日独島の姿でそのまま現われている.

韓国側主張 ¥”独島は日本の占有が成立されたことが一度もない.¥”

日本側主張 ¥”国際司法裁判所へ行けば日本が有利だ.¥”

韓国側主張 ¥”日本の領土という考えは減らず口主張だ.¥”

日本側主張 ¥”韓国が独島の領有権を主張するに値する根拠はない.¥”

韓国国民なら誰も独島が大韓民国の領土というのを疑う人は誰もいないだろう. しかし私たちは果して独島に対していくら分かっているか? 独島の歴史は鬱陵島を漏らしてからは話すことができない. 早くから鬱陵島は独島を抱いて島国于山国(于山国)を建設した. こちらで発見された装身具などが新羅支配層の物と一致することを見る時古代島王国は新羅と活発な交流があったことを分かる. 西紀 512年新羅長寿引っ越し部(異斯夫)によって滅亡された于山国は1行の歴史記録だけで残っている. (三国史記(三国史記)... 新羅長寿引っ越し部(異斯夫)が鬱陵島と独島を服属させた後韓国の歴史に現われた鬱陵島と独島) しかしこれがちょうど独島が韓国歴史に現われた一番目記録だ. 鬱陵島と独島を一緒にした于山国(于山国)が 512年新羅に編入されながら独島は 1500年の歳月を続いて来た私たち固有の地になった.

ShimojoMasao日本タクショクデハック教授 ¥”実際に韓国の文献を読んで見れば韓国側の主張どおり歴史的に韓国の領土だったと果して言えるのか分かりたい.¥”

独島が韓国の領土なのを証明する一番明確な文献で世宗実録地理誌(世宗実録地理志)を指折ることができる. ¥”東海真ん中傘, 武陵二つの島があり... 天気が清明ならばお互いに見られる.¥”は記録だ.

林影幀東国大学教授 ¥”一説に日本人学者たちはそれがちょうど鬱陵島(鬱陵島) 横に付いている竹刀(竹島)ではないかする主張をする人もいるものの, それではない. 清明な天気だけだけではなく霧立ち込める日, 雨降る日にも竹刀はいつでも見える. 清明な天気に鬱陵島で見える島と言えば独島外にはない. その独島を傘も(于山島)と世宗実録地理誌(世宗実録地理志)は記録しているのだ.¥”

日本側の論理は文献に出る独島(独島), すなわち傘も(于山島)に関する記録を否定することから出発する.

ShimojoMasao教授 ¥”世宗実録地理志(世宗実録地理志), 東国輿地勝覧(東国輿地勝覧) の中の傘も(于山島)を皆竹島(独島)と解釈している. それは鬱陵島の付属島嶼(属島)というので鬱陵島が新羅の領土になった時から竹島は自国の領土だと主張する.¥”

¥”傘島は鬱陵島だ. (傘も(独島)を否定して韓国は独島の存在が分からなかったという主張)¥”

日本は私たち文献に出る記録を歪曲解釈しながら彼らの主張を裏付ける. その主張の核心は傘も(于山島) 非存在説. 傘島は独島ではなく鬱陵島のもう一つの名前と規定して独島の存在は元々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彼らの主張だ.

ホサカ維持世宗大学教授 (日系帰化人) ¥”自分たちがほしいのが何かある時に資料を歪曲して論理を自分たちに有利にさせるのが日本特有の論旨展開方法だ.¥”

信証東国輿地勝覧(新増東国輿地勝覧)の記録を歪曲して日本学者たちは傘島と鬱陵島が並んで書かれていて本日も(本一島)だと言ったから一つの島だから解釈した.

林影幀教授 ¥”それは一つの附属した島という話だ. ところで日本人たちはこれを解釈するのに自分たちが便宜した方で解釈して鬱陵島と傘島が一島だ. こんなに話しているが傘島と鬱陵島はさまざまな情況で延ばして一つの領域に属する島だと解釈するのが正しいのだ. 日本学者たちは漢文解釈をまとも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プングイルチォングミョング(豊日清明)たいてい日に見えるという意味も陸地で鬱陵島が見えるということで日本側の文献解釈の間違いは続いている.

しかし地図は多いことを話してくれる. 信証東国輿地勝覧(新増東国輿地勝覧)の記録を補うために製作された8道総図(八道総図)には傘も(于山島)と鬱陵島(鬱陵島)が別に描かれている. もし一島だと認識したらこんなに二つでグリル必要があっただろうか?

 

ソグィゾング(徐貴鐘) 私は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第1戦闘分隊長 ¥”照尺がなかった. 1発飛ばして, 2発, 3発, 4発飛ばしたのが後尾に落ちるのだから... 5足目殴ったがそれが日本警備艇後尾に当たった.¥”

韓半島で 6.25 戦乱(戦乱)が終わる頃, 東地の果て独島(独島)ではもう一つの戦争が起っていた. 戦争の混乱を乗じて日本はよく独島上陸を試みたし独島が自分たちの地と言いながら返還を要求して出た. 行政的, 軍事的に空白期だったあの時に独島を守り出したことは軍人たちではなかった. 6.25 戦乱(戦乱)に参戦した鬱陵島青年たち... すぐ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だった.

庭園も(丁元度) 私は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第2戦闘分隊長 ¥”独島が者で 倭やつら地だと立て札を持ってからさしてするからそれで私たちが出たんです.¥”

現在生存している隊員たちの証言を通じてその頃交戦状況をいきいきと伝えて聞くことができた.

ソグィゾング(徐貴鐘) ¥”あの時後尾まで入って来て挑発する時にはあ, これ上陸を目的にするのではないか... これで私たち生命の脅威を感じて...¥”

第1戦闘分隊長ソグィゾング(徐貴鐘)さんを含めて第2戦闘分隊長庭園も(丁元度)さんも一緒に戦闘に参加した.

庭園も(丁元度) ¥”飛行機も離陸して... あの時巡視船がそばにまで全ゴルがジで鉄砲をブリッジにうって迫撃砲もお腹の上に減らされて...¥”

正式軍人たちでもなかったしひたすら私の地を守ろうと遂行した勇ましい戦闘... 彼らは命をかけて彼らの基盤を守った.

ホングスンチル(洪順〓) 私は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大将の否認朴英煕(朴英喜) ¥”完全に命を出したけんかだった. 死ぬのを覚悟して... そちらは飛行機も離陸するの, 軍艦みたいなことが来て覚悟しなさいと言って...¥”

独島義勇守備隊(独島義勇守備隊). もし彼らが守り出さなかったらこの地は果して誰の地になっただろうか? 彼らが守り出した独島は一点燈台ドルを灯して完全な大韓民国の領土として東地の果て民族の地でにょっきと湧いた.

東京中心で会った日本人たちは独島を竹島で分かっているし彼らの固有領土で認識していた.

韓国人記者 ¥”竹島だと聞いて見たんですか?¥”

東京市民 1 ¥”だね, このごろ問題になっていますね.¥”

韓国人記者 ¥”どの国の領土でご存じですか?¥”

東京市民 1 ¥”私は日本人だから当然日本のだと言わないと.(笑い)¥”

東京市民 2 ¥”当然日本領土ですね.¥”

韓国人記者 ¥”根拠は何ですか?¥”

東京市民 2 ¥”それは分からないですね.¥”

東京市民 3 ¥”マスコミやニュース報道を通じて日本領土だと認識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太平洋戦争敗北の痛みを洗い出して今の成長を成した日本. しかし独島を自分たちの地だと主張する日本の姿で過去侵略と収奪及び虐殺を事とした日本帝国主義の姿が照らされている. 絶え間ない彼らの他国領土に対する野望が今日独島の姿でそのまま現われている.

韓国側主張 ¥”独島は日本の占有が成立されたことが一度もない.¥”

日本側主張 ¥”国際司法裁判所へ行けば日本が有利だ.¥”

韓国側主張 ¥”日本の領土という考えは減らず口主張だ.¥”

日本側主張 ¥”韓国が独島の領有権を主張するに値する根拠はない.¥”

韓国国民なら誰も独島が大韓民国の領土というのを疑う人は誰もいないだろう. しかし私たちは果して独島に対していくら分かっているか? 独島の歴史は鬱陵島を漏らしてからは話すことができない. 早くから鬱陵島は独島を抱いて島国于山国(于山国)を建設した. こちらで発見された装身具などが新羅支配層の物と一致することを見る時古代島王国は新羅と活発な交流があったことを分かる. 西紀 512年新羅長寿引っ越し部(異斯夫)によって滅亡された于山国は1行の歴史記録だけで残っている. (三国史記(三国史記)... 新羅長寿引っ越し部(異斯夫)が鬱陵島と独島を服属させた後韓国の歴史に現われた鬱陵島と独島) しかしこれがちょうど独島が韓国歴史に現われた一番目記録だ. 鬱陵島と独島を一緒にした于山国(于山国)が 512年新羅に編入されながら独島は 1500年の歳月を続いて来た私たち固有の地になった.

ShimojoMasao日本タクショクデハック教授 ¥”実際に韓国の文献を読んで見れば韓国側の主張どおり歴史的に韓国の領土だったと果して言えるのか分かりたい.¥”

独島が韓国の領土なのを証明する一番明確な文献で世宗実録地理誌(世宗実録地理志)を指折ることができる. ¥”東海真ん中傘, 武陵二つの島があり... 天気が清明ならばお互いに見られる.¥”は記録だ.

林影幀東国大学教授 ¥”一説に日本人学者たちはそれがちょうど鬱陵島(鬱陵島) 横に付いている竹刀(竹島)ではないかする主張をする人もいるものの, それではない. 清明な天気だけだけではなく霧立ち込める日, 雨降る日にも竹刀はいつでも見える. 清明な天気に鬱陵島で見える島と言えば独島外にはない. その独島を傘も(于山島)と世宗実録地理誌(世宗実録地理志)は記録しているのだ.¥”

日本側の論理は文献に出る独島(独島), すなわち傘も(于山島)に関する記録を否定することから出発する.

ShimojoMasao教授 ¥”世宗実録地理志(世宗実録地理志), 東国輿地勝覧(東国輿地勝覧) の中の傘も(于山島)を皆竹島(独島)と解釈している. それは鬱陵島の付属島嶼(属島)というので鬱陵島が新羅の領土になった時から竹島は自国の領土だと主張する.¥”

¥”傘島は鬱陵島だ. (傘も(独島)を否定して韓国は独島の存在が分からなかったという主張)¥”

日本は私たち文献に出る記録を歪曲解釈しながら彼らの主張を裏付ける. その主張の核心は傘も(于山島) 非存在説. 傘島は独島ではなく鬱陵島のもう一つの名前と規定して独島の存在は元々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彼らの主張だ.

ホサカ維持世宗大学教授 (日系帰化人) ¥”自分たちがほしいのが何かある時に資料を歪曲して論理を自分たちに有利にさせるのが日本特有の論旨展開方法だ.¥”

信証東国輿地勝覧(新増東国輿地勝覧)の記録を歪曲して日本学者たちは傘島と鬱陵島が並んで書かれていて本日も(本一島)だと言ったから一つの島だから解釈した.

林影幀教授 ¥”それは一つの附属した島という話だ. ところで日本人たちはこれを解釈するのに自分たちが便宜した方で解釈して鬱陵島と傘島が一島だ. こんなに話しているが傘島と鬱陵島はさまざまな情況で延ばして一つの領域に属する島だと解釈するのが正しいのだ. 日本学者たちは漢文解釈をまとも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プングイルチォングミョング(豊日清明)たいてい日に見えるという意味も陸地で鬱陵島が見えるということで日本側の文献解釈の間違いは続いている.

しかし地図は多いことを話してくれる. 信証東国輿地勝覧(新増東国輿地勝覧)の記録を補うために製作された8道総図(八道総図)には傘も(于山島)と鬱陵島(鬱陵島)が別に描かれている. もし一島だと認識したらこんなに二つでグリル必要があっただろうか?

{引き続き}


독도(獨島)는 어느 나라의 영토인가? ⑴

 

 

서귀종(徐貴鐘)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1전투분대장 "가늠자가 없었다. 1발 날리고, 2발, 3발, 4발 날린 것이 후미에 떨어지는 것이라... 5발째 때렸는데 그게 일본 경비정 후미에 맞았다."

한반도에서 6.25 전란(戰亂)이 끝날 무렵, 동쪽 땅끝 독도(獨島)에서는 또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자주 독도 상륙을 시도했고 독도가 자기들의 땅이라며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행정적, 군사적으로 공백기였던 그때에 독도를 지켜냈던 것은 군인들이 아니었다. 6.25 전란(戰亂)에 참전했던 울릉도 청년들... 바로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였다.

정원도(丁元度)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2전투분대장 "독도가 자구 倭놈들 땅이라고 팻말을 갖다가 꽂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나섰지요."

현재 생존해 있는 대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 당시 교전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서귀종(徐貴鐘) "그때 후미까지 들어와 도발할 때에는 아, 이거 상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우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제1전투분대장 서귀종(徐貴鐘)씨를 비롯해 제2전투분대장 정원도(丁元度)씨도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정원도(丁元度) "비행기도 뜨고... 그때 순시선이 곁에까지 온 걸가지고 총을 브릿지에다 쏘고 박격포도 배 위에 덜어지고..."

정식 군인들도 아니었고 오로지 내 땅을 지키고자 수행했던 용감한 전투...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터전을 지켰다.

홍순칠(洪順柒)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대장의 부인 박영희(朴英喜) "완전히 목숨을 내놓은 싸움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쪽은 비행기도 뜨지, 군함 같은 것이 와서 각오하라 하고..."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만일 그들이 지켜내지 않았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 됐을까? 그들이 지켜낸 독도는 한점 등대불을 밝히고 온전한 대한민국의 영토로써 동쪽 땅끝 민족의 땅으로 우뚝 솟았다.

도쿄 중심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알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인 기자 "다케시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도쿄 시민 1 "네, 요즘 문제가 되고 있지요."

한국인 기자 "어느 나라의 영토로 알고 계십니까?"

도쿄 시민 1 "나는 일본 사람이니까 당연히 일본 것이라고 해야지요.(웃음)"

도쿄 시민 2 "당연히 일본 영토이지요."

한국인 기자 "근거는 뭡니까?"

도쿄 시민 2 "그건 모르지요."

도쿄 시민 3 "매스컴이나 뉴스 보도를 통해서 일본 영토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패배의 아픔을 씻어내고 지금의 성장을 이룩한 일본. 그러나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과거 침략과 수탈 및 학살을 일삼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이 비춰져 있다. 끊임없는 그들의 타국 영토에 대한 야망이 오늘날 독도의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측 주장 "독도는 일본의 점유가 성립된 적이 한번도 없다."

일본 측 주장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일본이 유리하다."

한국 측 주장 "일본의 영토라는 생각은 억지 주장이다."

일본 측 주장 "한국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독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일찍부터 울릉도는 독도를 품고 섬나라 우산국(于山國)을 건설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장신구 등이 신라 지배층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볼때 고대 섬 왕국은 신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멸망된 우산국은 한줄의 역사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독도를 복속시킨 후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그러나 이것이 바로 독도가 한국 역사에 나타난 첫번째 기록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아우른 우산국(于山國)이 512년 신라에 편입되면서 독도는 1500년의 세월을 이어온 우리 고유의 땅이 됐다.

시모조 마사오 일본 타쿠쇼쿠대학 교수 "실제로 한국의 문헌을 읽어보면 한국 측의 주장대로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문헌으로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꼽을 수 있다. "동쪽 바다 한가운데 우산, 무릉 두 섬이 있으며... 날씨가 청명하면 서로 볼 수 있다."는 기록이다.

임영정 동국대학 교수 "일설에 일본인 학자들은 그것이 바로 울릉도(鬱陵島) 옆에 붙어있는 죽도(竹島)가 아니냐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니다. 청명한 날씨 뿐만이 아니라 안개 끼는 날, 비오는 날에도 죽도는 언제든지 보인다. 청명한 날씨에 울릉도에서 보이는 섬이라 하면 독도 밖에는 없다. 그 독도를 우산도(于山島)라고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측의 논리는 문헌에 나오는 독도(獨島), 즉 우산도(于山島)에 관한 기록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시모조 마사오 교수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속의 우산도(于山島)를 모두 다케시마(독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것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것에서 울릉도가 신라의 영토가 됐을 때부터 다케시마는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우산도는 울릉도이다. (우산도(독도)를 부정하며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주장)"

일본은 우리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왜곡 해석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우산도(于山島) 비존재설.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규정하고 독도의 존재는 원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 교수 (일본계 귀화인)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이 뭔가 있을 때에 자료를 왜곡하고 논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 일본 특유의 논지 전개 방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왜곡해서 일본 학자들은 우산도와 울릉도가 나란히 적혀있고 본일도(本一島)라 했기 때문에 하나의 섬이라 해석했다.

임영정 교수 "그것은 하나의 부속된 섬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해석하는데 자기들이 편의한 쪽으로 해석해서 울릉도와 우산도가 한 섬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우산도와 울릉도는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하나의 영역에 속하는 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문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한다."

풍일청명(豊日淸明)한 날에 보인다는 의미도 육지에서 울릉도가 보인다는 것으로 일본 측의 문헌 해석의 오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도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충하기 위해 제작된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가 따로 그려져 있다. 만일 한 섬이라고 인식했다면 이렇게 두개로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서귀종(徐貴鐘)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1전투분대장 "가늠자가 없었다. 1발 날리고, 2발, 3발, 4발 날린 것이 후미에 떨어지는 것이라... 5발째 때렸는데 그게 일본 경비정 후미에 맞았다."

한반도에서 6.25 전란(戰亂)이 끝날 무렵, 동쪽 땅끝 독도(獨島)에서는 또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자주 독도 상륙을 시도했고 독도가 자기들의 땅이라며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행정적, 군사적으로 공백기였던 그때에 독도를 지켜냈던 것은 군인들이 아니었다. 6.25 전란(戰亂)에 참전했던 울릉도 청년들... 바로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였다.

정원도(丁元度)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제2전투분대장 "독도가 자구 倭놈들 땅이라고 팻말을 갖다가 꽂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나섰지요."

현재 생존해 있는 대원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 당시 교전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서귀종(徐貴鐘) "그때 후미까지 들어와 도발할 때에는 아, 이거 상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우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제1전투분대장 서귀종(徐貴鐘)씨를 비롯해 제2전투분대장 정원도(丁元度)씨도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정원도(丁元度) "비행기도 뜨고... 그때 순시선이 곁에까지 온 걸가지고 총을 브릿지에다 쏘고 박격포도 배 위에 덜어지고..."

정식 군인들도 아니었고 오로지 내 땅을 지키고자 수행했던 용감한 전투...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터전을 지켰다.

홍순칠(洪順柒) 전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대장의 부인 박영희(朴英喜) "완전히 목숨을 내놓은 싸움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쪽은 비행기도 뜨지, 군함 같은 것이 와서 각오하라 하고..."

독도의용수비대(獨島義勇守備隊). 만일 그들이 지켜내지 않았다면 이 땅은 과연 누구의 땅이 됐을까? 그들이 지켜낸 독도는 한점 등대불을 밝히고 온전한 대한민국의 영토로써 동쪽 땅끝 민족의 땅으로 우뚝 솟았다.

도쿄 중심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알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인 기자 "다케시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도쿄 시민 1 "네, 요즘 문제가 되고 있지요."

한국인 기자 "어느 나라의 영토로 알고 계십니까?"

도쿄 시민 1 "나는 일본 사람이니까 당연히 일본 것이라고 해야지요.(웃음)"

도쿄 시민 2 "당연히 일본 영토이지요."

한국인 기자 "근거는 뭡니까?"

도쿄 시민 2 "그건 모르지요."

도쿄 시민 3 "매스컴이나 뉴스 보도를 통해서 일본 영토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패배의 아픔을 씻어내고 지금의 성장을 이룩한 일본. 그러나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과거 침략과 수탈 및 학살을 일삼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이 비춰져 있다. 끊임없는 그들의 타국 영토에 대한 야망이 오늘날 독도의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측 주장 "독도는 일본의 점유가 성립된 적이 한번도 없다."

일본 측 주장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일본이 유리하다."

한국 측 주장 "일본의 영토라는 생각은 억지 주장이다."

일본 측 주장 "한국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독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일찍부터 울릉도는 독도를 품고 섬나라 우산국(于山國)을 건설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장신구 등이 신라 지배층의 것과 일치하는 것을 볼때 고대 섬 왕국은 신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멸망된 우산국은 한줄의 역사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독도를 복속시킨 후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그러나 이것이 바로 독도가 한국 역사에 나타난 첫번째 기록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아우른 우산국(于山國)이 512년 신라에 편입되면서 독도는 1500년의 세월을 이어온 우리 고유의 땅이 됐다.

시모조 마사오 일본 타쿠쇼쿠대학 교수 "실제로 한국의 문헌을 읽어보면 한국 측의 주장대로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문헌으로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꼽을 수 있다. "동쪽 바다 한가운데 우산, 무릉 두 섬이 있으며... 날씨가 청명하면 서로 볼 수 있다."는 기록이다.

임영정 동국대학 교수 "일설에 일본인 학자들은 그것이 바로 울릉도(鬱陵島) 옆에 붙어있는 죽도(竹島)가 아니냐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아니다. 청명한 날씨 뿐만이 아니라 안개 끼는 날, 비오는 날에도 죽도는 언제든지 보인다. 청명한 날씨에 울릉도에서 보이는 섬이라 하면 독도 밖에는 없다. 그 독도를 우산도(于山島)라고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측의 논리는 문헌에 나오는 독도(獨島), 즉 우산도(于山島)에 관한 기록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시모조 마사오 교수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속의 우산도(于山島)를 모두 다케시마(독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것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것에서 울릉도가 신라의 영토가 됐을 때부터 다케시마는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우산도는 울릉도이다. (우산도(독도)를 부정하며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주장)"

일본은 우리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왜곡 해석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우산도(于山島) 비존재설.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규정하고 독도의 존재는 원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 교수 (일본계 귀화인)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이 뭔가 있을 때에 자료를 왜곡하고 논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 일본 특유의 논지 전개 방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왜곡해서 일본 학자들은 우산도와 울릉도가 나란히 적혀있고 본일도(本一島)라 했기 때문에 하나의 섬이라 해석했다.

임영정 교수 "그것은 하나의 부속된 섬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해석하는데 자기들이 편의한 쪽으로 해석해서 울릉도와 우산도가 한 섬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우산도와 울릉도는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하나의 영역에 속하는 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문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한다."

풍일청명(豊日淸明)한 날에 보인다는 의미도 육지에서 울릉도가 보인다는 것으로 일본 측의 문헌 해석의 오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도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충하기 위해 제작된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가 따로 그려져 있다. 만일 한 섬이라고 인식했다면 이렇게 두개로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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