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柳寛順への日本の蛮行、誇張多い」 

 「柳寛順(ユ・クァンスン)烈士について

誤って理解されている点を正してみたかったのです」

この4年間、柳寛順研究に没頭してきた

郷土史家の任明淳(イム・ミョンスン、55、忠清南道天安市社稷洞)さん。

 

 天安(チョンアン)大にある柳寛順研究所の客員研究員でもある任さんは

「柳寛順に関連した内容が、1945年8月15日の解放以後、

植民地時代に日本が行った蛮行を糾弾するという意味合いから、

誇張され過ぎてしまった感がある」と主張する。

 

 「三一運動=柳寛順」というイメージを持つ柳寛順だが、

出生・死亡年月日は記録によってまちまちだ。

名前の漢字表¥記や兄弟の数、梨花(イファ)学堂に入学した年度も、

やはりそれぞれ異なっている。

 

 天安一帯で起った「己未年万歳示威」では、

20人余りが殉国した。

だが、死亡して80年が経てば、戸籍が整理され、

記録から完全に抹消される。

 

 これを知った任さんは、

99年から柳寛順ら殉国した先烈の除籍謄本をすべて集め、

研究を行ってきた。

 

 謄本によって任さんは、柳寛順の出生年が1904年ではなく1902年で、

1人娘ではなく姉が1人いたという事実を確認した

任さんは昨年10月、天安大が主催した「柳寛順烈士追慕学術大会」で、

我々が知る柳寛順の殉国月日と生年月日が事実とは異なる、と指摘した。

 

 任さんは、柳寛順の最終刑量は、懲役7年でなく3年だったと主張した。

京城(キョンソ¥ン)復審裁判所(控訴審)の判決文と受刑者記録表¥によると、

柳寛順は小学校の教科書にあるように

「検事に椅子を投げつけたため法廷冒とく罪が追加され、

7年の刑を宣告された」のではなく、3年の刑を受けたという。

その後、柳寛順は高等裁判所(現在の最高裁)に上告せず、

これが最終刑量になったという。

 

 「梨花学堂時代、

柳寛順の級友だったポガック(99、僧侶)さんの証言によると

、死亡して20日余り過ぎた後、柳寛順の死体を受け取ったそうです。

その時、死体は腐っていましたが、

四肢は切断されてはいなかったという話です」

 

 任さんは「柳寛順への盲目的な思い込みから、

こうしたいい加減な事実が広まり、

子供向けの伝記にまで掲載された」とし、

「今は、冷静になって史実を確認すべきだ」と話した。

 

大学で農学を専攻した任さんは、農村振興庁で勤めた経験があり、

20年余り自営業(農薬販売)を営んできた

だが現在は、天安地域の郷土史研究に没頭している。

 

趙漢弼(チョ・ハンピル)記者 <chopi@joongang.co.kr¥">chopi@joongang.co.kr>
2002.02.26 21:21:52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24426&servcode=400§code=400

 

 


 


류관순【중앙 일보】

「류관순에게의 일본의 만행, 과장 많다」 

  「류관순(유·쿠슨) 열사에 대해

잘못해 이해되고 있는 점을 바로잡아 보고 싶었습니다」

이 4년간, 류관순 연구에 몰두해 왔다

향토 역사가의 임명쥰(임·몰슨, 55, 충청남도 천안시 사직동)씨.

 

 천안(정안) 대에 있는 류관순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이기도 한 임씨는

「류관순에 관련한 내용이,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이후,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실시한 만행을 규탄한다고 하는 의미로부터,

과장너무 되어서 버린 감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31 운동=류관순」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가지는 류관순이지만,

출생·사망 연월일은 기록에 의해서 가지각색이다.

이름의 한자표기나 형제의 수, 이화(이화) 학당에 입학한 연도도,

역시 각각 차이가 난다.

 

 천안 일대에서 떠난 「당신 미년 만세 시위」에서는,

20명남짓이 순국 했다.

하지만, 사망해 80년이 지나면, 호적이 정리되어

기록으로부터 완전하게 말소된다.

 

 이것을 안 임씨는,

99년부터 류관순등 순국 한 선열의 제적 등본을 모두 모아

연구를 실시해 왔다.

 

 등본에 의해서 임씨는, 류관순의 출생년이 1904년은 아니고 1902년으로,

1명 딸(아가씨)는 아니고 언니(누나)가 1명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임씨는 작년 10월, 천안대가 주최한 「류관순 열사 추모 학술 대회」에서,

우리가 아는 류관순의 순국 세월과 생년월일이 사실과는 다르다, 라고 지적했다.

 

 임씨는, 류관순의 최종형량은, 징역 7년이 아니고 3년이었다고 주장했다.

경성(콜소) 복심재판소(공소심)의 판결문과 수형자 기록표에 의하면,

류관순은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있도록(듯이)

「검사에 의자를 내던졌기 때문에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의 형이 선고되었다」것은 아니고, 3년의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류관순은 고등재판소(현재의 최고재판소)에 상고 하지 않고,

이것이 최종형량이 되었다고 한다.

 

  「이화 학당 시대,

류관순의 급우였던 포각크(99, 승려)씨의 증언에 의하면

, 사망해 20 여일 지난 후, 류관순의 시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 시체는 썩고 있었습니다만,

사지는 절단 되지는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임씨는 「류관순에게의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이러한 적당사실이 퍼져,

어린이용의 전기에까지 게재되었다」라고 해,

「지금은, 냉정하게 되어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한 임씨는, 농촌 진흥청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20년남짓 자영업(농약 판매)을 영위해 왔다.

하지만 현재는, 천안 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조한필(조·한 필) 기자 <chopi@joongang.co.kr>
2002.02.26 21:21:52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24426&servcode=400&sectcode=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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