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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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譜・アイデンティティ・日韓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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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姓氏誕生の秘密
(ハングルです。コピペできないので翻訳して下さい)

 

 

 

 

 

 

 

 

 

 

 

 

朝鮮時代にも戸籍はありましたが、賤民や奴婢とされた人たちには姓も戸籍もありませんで

した。課税の義務は良人まででしたから政府にも、その必要はありませんでした。賤民や奴

婢とされた人たちは、その所有者や主人に奉仕と従順の義務のみがあり、殺されても文句が

言えませんでした。


さて、1894年の甲午改革により奴婢より解放された人々は1909年の民籍法施行時に

姓をほぼ自由に選ぶことができました。届出制だったからです。具体的にどのような姓が選

ばれたかというと

 


(1)戸籍書記と警察とが本人の希望通り、あるいは適当に作ってあげた。

 

(2)奴婢の場合、主人の名字を使うことが多かった。

 

(3)出身地で最も多い大姓を名乗った。

 

(4)戸籍書記が記録のとき、漢字を間違ったのがそのまま名字になった。


(4)のケースを除き、主人や地域の両班姓になるケースが多い訳です。

 


15世紀に23点、16世紀に43点、17世紀に148点に過ぎなかった族譜の刊行が、18世紀に398点

へと飛躍的に増えたのは、単に印刷技術の発達によるだけではない。族譜があれば軍役が免

除されるなど、族譜をもつこと自体が特権であったためでもある。それゆえ族譜の偽造が大

量に行われた事実は『朝鮮王朝実録』の記事にも散見できる。


16−17世紀には、姓氏さえも持っていなかった奴婢は全体人口の30−40%であり、人口の40

−50%を占めていた百姓も族譜を持つことは不可能¥であった。
 

19世紀末の身分制度の崩壊と、植民地時代での身分の変動に伴い、1920年代には毎年族譜が

ベストセラーになったくらい、族譜の編纂は盛んになった。その多くが「作られた伝説」で

あ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すなわち、いま各家庭で神聖なものとして奉られているほとん

どの族譜が実は「幻の族譜」なのである。


推測ですが、真正の両班の子孫は韓国民の1〜2割程度でしょう。ということは、韓国民の

8〜9割は偽族譜を持った百姓や奴婢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すね。
 

 

 

 

さて、ここまでが以前スレッドを立てた内容ですが、先があります。

 

 

 


日韓併合に際して、李王家を含む80数家の主要両班や一部の親日派両班を除き、その他の

両班家は没落して行きました。
そして反日運動を展開していったのは、この没落両班の主に子弟達でした。
3.1運動は、東京に留学していた朝鮮人学生の独立宣言の作成から始まっています。19

19年と言いますと第一次世界大戦やロシア革命の終結、そして日本国内では米騒動や労働

運動の高まりを受けた年でもありアメリカ大統領の民族自決宣言があった後でもあります。
しかしながら、彼等留学生たちは庶民の子弟でしょうか。その後上海などで大韓民国臨時政

府なるものが出来ますが、その主流は両班出身者です。

 

 


黒田勝弘氏は著書『韓国人の歴史観』のなかでこう解説している。

 黒田氏は、韓国の教科書で「日本支配に関し一九四〇年代が一種の空白になっている」こ

とをあげ、「抵抗史観」で書かれている韓国の教科書では「この時期には目ぼしい抵抗の歴

史が見当たらない」からだとしつつ、しかし、「大きな理由」は、「この時代こそ韓国人の

日本に対する『協力』が最も進んだ時代であり、『韓国の歴史』としては本当は思い出した

くも触れたくもない時期だったからである。教科書もいうように、この時代はまさに韓国人

を日本人にしようとした時代であり、実際に韓国人の多くが日本人になりつつあった」と指

摘している。

 

 

 

 しかし、「韓国の歴史教科書には日本に対する『協力』の文字はいっさい登場しない。国

定史観としての『抵抗史観』からすれば当然である。日本支配時代は『韓国人の歴史』とし

ては抵抗あるのみであって、協力などあってはならない。あったとしても、それは見たくな

いし、しかもその協力はすべて強制による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つまり、「協力」が「強制」に変化したのは、実態が「強制」であったというより、民族

全体としては「協力などあってはならない」とする戦後の「抵抗史観」のなせる業だという

のである。換言すれば、「反日」が国是となった観のある戦後の韓国では、公式には「創氏

改名」は「強制」だったと語られねばならなくなったと言える。金大中・元韓国大統領が、

木浦商業時代の恩師に再会した際、「先生、豊田です」と挨拶したことすら問題となった。

 

 


さて、話を戻そう。

 

 

内鮮一体が叫ばれ、韓国人も太平洋戦争や日中戦争に日本が勝利することを信じていた矢先

に、1945年8月15日が訪れました。

 

 


戦勝を信じていた日本人も驚きましたが、韓国人も驚きました。

例えてみれば、中堅企業の経営者の妻の座を確保して、夫の会社を一流企業にするバラ色の

夢を見始めた矢先に、あろうことか夫の会社が倒産してしまったのです。

 

 

「あなたは私を騙したのね。」火病炸裂です。大本営に騙されていたのは日本人も一緒です

。可哀想だったのは半島に居た日本人たちでした。

 

 

 

さて、それから何が起きたのでしょう    (-_-);

 

 

 

 

 

 

 

 

 

 

 

 

 

 

 

 

 

 

 

 

 

 

 

 

 

 

 

 

 

 

 

 

 

 

 

 

 

 

 

 

 

 

 

 

 

 

 

 


 

 

 

 

 

 

 

 

 

 

 

 

 

 

 

 

 

 

 

 

 

 

続く


한국인이 무서워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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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아이덴티티·일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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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 탄생의 비밀
(한글입니다.코피페 할 수 없기 때문에 번역해 주세요)

 

 

 

 

 

 

 

 

 

 

 

 

조선시대에도 호적은 있었습니다만, 천민이나 노비로 여겨진 사람들에게는 성도 호적도 없지 않아

했다.과세의 의무는 양인까지였기 때문에 정부에도, 그 필요는 없었습니다.천민이나 놈

비로 여겨진 사람들은, 그 소유자나 주인에게 봉사와 순종의 의무만이 있어, 살해당해도 불평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의해 노비보다 해방된 사람들은 1909년의 민적법시행시에

성을 거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신고제였기 때문입니다.구체적으로 어떠한 성이 선거

발각되었는가 하면

 


(1) 호적 서기와 경찰이 본인의 희망 대로, 혹은 적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2) 노비의 경우, 주인의 성씨를 사용하는 것이 많았다.

 

(3) 출신지에서 가장 많은 대성을 자칭했다.

 

(4) 호적 서기가 기록 때, 한자를 틀린 것이 그대로 성씨가 되었다.


(4)의 케이스를 제외해, 주인이나 지역의 양반성이 되는 케이스가 많은 것입니다.

 


15 세기에 23점, 16 세기에 43점, 17 세기에 148점에 지나지 않았던 족보의 간행이, 18 세기에 398점

(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은, 단지 인쇄 기술의 발달에 의하는 것 만이 아니다.족보가 있으면 병역이 면

제 되는 등, 족보를 가지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기 때문에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족보의 위조가 대

양에 행해진 사실은 「조선 왕조 실록」의 기사에도 산견할 수 있다.


16-17 세기에는, 성씨마저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노비는 전체 인구의 30-40%이며, 인구의 40

-50%를 차지하고 있던 백성도 족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19 세기말의 신분 제도의 붕괴와 식민지 시대로의 신분의 변동에 수반해, 1920년대에는 매년 족보가

베스트셀러가 된 정도, 족보의 편찬은 활발하게 되었다.그 대부분이 「만들어진 전설」로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즉, 지금 각가정에서 신성한 것으로서 드려지고 있는 와

어느 족보가 실은 「환상의 족보」인 것인다.


추측입니다만, 진정의 양반의 자손은 한국민의 1~2할 정도지요.그 말은, 한국민의

8~9할은 가짜 족보를 가진 백성이나 노비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이군요.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전 스렛드를 세운 내용입니다만, 앞이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이왕가를 포함한 80수가의 주요 양반이나 일부의 친일파 양반을 제외해, 그 외의

양반가는 몰락해 갔습니다.
그리고 반일 운동을 전개하며 간 것은, 이 몰락 양반의 주로 자제들이었습니다.
3.1 운동은,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의 독립선언의 작성으로부터 시작되어 있습니다.19

19년이라고 하면 제1차 세계 대전이나 러시아 혁명의 종결, 그리고 일본내에서는 미 소동이나 노동

운동의 고조를 받은 해이기도 해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 선언이 있던 다음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유학생들은 서민의 자제입니까.그 후 샹하이등에서 대한민국 임시정

부 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주류는 양반 출신자입니다.

 

 


쿠로다 카츠히로씨는 저서 「한국인의 역사관」 속에서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쿠로다씨는, 한국의 교과서로 「일본 지배에 관계되어 1940년대가 일종의 공백이 되어 있다」와

(을)를 주어 「저항 사관」으로 쓰여져 있는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이 시기에는 눈주위 저항의 력

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에서라고 하면 하면서, 그러나, 「큰 이유」는, 「이 시대야말로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협력」이 가장 진행되었던 시대여, 「한국의 역사」로서는 사실은 생각해 냈다

거미 접하고 싶지도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교과서도 말하도록(듯이), 이 시대는 확실히 한국인

(을)를 일본인으로 하려고 했던 시대여, 실제로 한국인의 대부분이 일본인이 되고 있었다」라고 손가락

적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에 대한 「협력」의 문자는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국

정사관으로서의 「저항 사관」으로부터 하면 당연하다.일본 지배 시대는 「한국인의 역사」로 해

(이)라고는 저항 있을 뿐에서 만나며, 협력 등 있어서는 안된다.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보고 싶고

있어 해, 게다가 그 협력은 모두 강제에 의하는 것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즉, 「협력」이 「강제」에 변화한 것은, 실태가 「강제」였다고 하는 것보다, 민족

전체적으로는 「협력 등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전후의 「저항 사관」을 이룰 수 있는 업이라고 한다

것인다.환언하면, 「반일」이 국시가 된 관이 있는 전후의 한국에서는, 공식으로는 「창씨

개명」은 「강제」였다고 말안 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김대중· 전 한국 대통령이,

목포 상업 시대의 은사에게 재회했을 때, 「선생님, 토요타입니다」라고 인사한 것조차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되돌리자.

 

 

안센이치체가 주장되어 한국인도 태평양전쟁이나 중일 전쟁에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믿고 있던 정면

에, 1945년 8월 15일이 찾아왔습니다.

 

 


전승을 믿고 있던 일본인도 놀랐습니다만, 한국인도 놀랐습니다.

비유해 보면, 중견 기업의 경영자의 아내의 자리를 확보하고, 남편의 회사를 일류 기업으로 하는 장미색의

꿈을 꾸기 시작한 정면에, 있을것이다 일이나 남편의 회사가 도산해 버렸습니다.

 

 

「당신은 나를 속였군요.」화병 작렬입니다.근본영에 속고 있던 것은 일본인도 똑같습니다

.불쌍했던 것은 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무엇이 일어났겠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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