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5년, AD150년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遣其三子靑裔 入朝

25년(AD150년) 1월 加耶世主(가야세주)가 그녀의 셋째아들 靑裔(청예)를 보내 入朝(입조)하였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 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12월 音汁伐(음즙벌)과 悉直谷(실직곡)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은 그 地老(지로)에게 명하여 변별하도록 하였다. 地老(지로)가 말하기를 “加耶王子(가야왕자) 靑裔(청예)가 지혜가 많으니 의논할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汗門(한문)을 京都兵官(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汗兒(한아)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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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AD102년)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李華

23년(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국(悉直國)과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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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6년, AD151년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以其神智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 厚饗 漢祇主保齊 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 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 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 皆以其地納之

26년(AD151년) 2월 靑裔(청예)가 六部(6부)를 巡遊(순유)하였다. 部(부맹)들은 그가 神智(신지)하다며 모여 들어 구경하였다. 部(부)의 主(주)는 모두 伊干(이간)으로서 그를 맞이 하여 후하게 대접하였지만, 漢祇(한지)의 主(주) 保齊(보제)는 홀로 家奴(가노)로서 그를 대접하니, 심히 박하였다. 靑裔(청예)의 신하 下里(탐하리)는 수치스러워서 그의 종을 죽이고, 도망하여 音汁伐(음즙벌)의 主(주)에게 의지하였다. 상은 그를 찾으라 명령하였지만, (음즙벌의 주는) 응하지 않았다. 吉元(길원)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郡(군)으로 삼았다. 悉直君(실직군) 奉治(봉치)와 押督君(압독군)의 王乙(왕을)은 모두 그 땅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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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
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命爲稟主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30년(AD155년) 1월, 품주 加亥(가해)가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 상은 愛女(애녀) 毛利(모리)에게 명하여 稟主(품주)를 삼았다. 상은 史后(사후)와 함께 押督(압독)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3월, 7월 기사 생략)

八月 比只與多伐草八作亂 命虹盧加樹討平之 比只太子宝日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主和 其弟靑裔奔于金官
8월, 比只(비지)는 多伐(다벌), 草八(초팔)과 함께 란을 일으켰다. 虹盧(홍로, 남로군사)와 加樹(가수,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討平(토평)하도록 하였다. 比只太子(비지태자) 宝日(보일)은 전쟁에서 죽고, 次子(차자) 朱日(주일)은 召文(소문)으로부터 돌아와 화친을 주도하였다. 그의 동생 靑裔(청예)는 金官(금관)으로 도망갔다.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3년, AD158년
十一月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11월, 加耶世主(가야세주) 正見(정견)이 죽었다. 아들 朱日(주일)이 즉위하니, 스스로 阿豉今(아시금)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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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일 중요한 사항은 대가야의 건국년도는 파사이사금때 AD158년라는 것과,
삼국사기는 젊은 靑裔(청예)을 늙은이로 만들어 놨다는 것입니다.

신라본기=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파사이사금기= 加耶王子靑裔多智

삼국사기는 금관국의 건국년도= AD42년에 맞추기 위해,
年老라는 문장을 삽입시켜 젊은 靑裔(청예)을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낚시에 걸려든 것입니다.
하루빨리 벗어 나길 바랍니다.


젊은 靑裔(청예)을 늙은이로 만들어 버린 삼국사기.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5년, AD150년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遣其三子靑裔 入朝

25년(AD150년) 1월 加耶世主(가야세주)가 그녀의 셋째아들 靑裔(청예)를 보내 入朝(입조)하였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 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12월 音汁伐(음즙벌)과 悉直谷(실직곡)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은 그 地老(지로)에게 명하여 변별하도록 하였다. 地老(지로)가 말하기를 “加耶王子(가야왕자) 靑裔(청예)가 지혜가 많으니 의논할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汗門(한문)을 京都兵官(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汗兒(한아)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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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AD102년)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李華

23년(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국(悉直國)과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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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6년, AD151년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以其神智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 厚饗 漢祇主保齊 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 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 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 皆以其地納之

26년(AD151년) 2월 靑裔(청예)가 六部(6부)를 巡遊(순유)하였다. 部(부맹)들은 그가 神智(신지)하다며 모여 들어 구경하였다. 部(부)의 主(주)는 모두 伊干(이간)으로서 그를 맞이 하여 후하게 대접하였지만, 漢祇(한지)의 主(주) 保齊(보제)는 홀로 家奴(가노)로서 그를 대접하니, 심히 박하였다. 靑裔(청예)의 신하 下里(탐하리)는 수치스러워서 그의 종을 죽이고, 도망하여 音汁伐(음즙벌)의 主(주)에게 의지하였다. 상은 그를 찾으라 명령하였지만, (음즙벌의 주는) 응하지 않았다. 吉元(길원)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郡(군)으로 삼았다. 悉直君(실직군) 奉治(봉치)와 押督君(압독군)의 王乙(왕을)은 모두 그 땅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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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
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命爲稟主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30년(AD155년) 1월, 품주 加亥(가해)가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 상은 愛女(애녀) 毛利(모리)에게 명하여 稟主(품주)를 삼았다. 상은 史后(사후)와 함께 押督(압독)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3월, 7월 기사 생략)

八月 比只與多伐草八作亂 命虹盧加樹討平之 比只太子宝日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主和 其弟靑裔奔于金官
8월, 比只(비지)는 多伐(다벌), 草八(초팔)과 함께 란을 일으켰다. 虹盧(홍로, 남로군사)와 加樹(가수,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討平(토평)하도록 하였다. 比只太子(비지태자) 宝日(보일)은 전쟁에서 죽고, 次子(차자) 朱日(주일)은 召文(소문)으로부터 돌아와 화친을 주도하였다. 그의 동생 靑裔(청예)는 金官(금관)으로 도망갔다.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3년, AD158년
十一月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11월, 加耶世主(가야세주) 正見(정견)이 죽었다. 아들 朱日(주일)이 즉위하니, 스스로 阿豉今(아시금)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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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일 중요한 사항은 대가야의 건국년도는 파사이사금때 AD158년라는 것과,
삼국사기는 젊은 靑裔(청예)을 늙은이로 만들어 놨다는 것입니다.

신라본기=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파사이사금기= 加耶王子靑裔多智

삼국사기는 금관국의 건국년도= AD42년에 맞추기 위해,
年老라는 문장을 삽입시켜 젊은 靑裔(청예)을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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