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将軍」でもない人物を「将軍」と呼ぶことは、自国の領土の根拠が無いのに領有を主張する行為と似ています。

日本人と韓国人は出来るだけ正確な情報に基づいて議論を進めるべきです。

歪曲・捏造の含まれた情報をもとに議論をしても意味がありません。

 

 安龍福のWiki

日本側 http://ja.wikipedia.org/wiki/%E5%AE%89%E9%BE%8D%E7%A6%8F

韓国側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C%9A%A9%EB%B3%B5

情報の質も量も大きく違います。出来れば韓国人も機械翻訳を通して、日本語のWikiを一読する事を勧めます。

 

 安龍福が最初に日本人に確認された時に、彼は腰に認識票を付けていました。

表¥面には「東莱 私奴 用朴 年三十¥三 長四尺一寸 面鉄髭暫生疵無 主京居呉忠秋」

裏面には「庚午 釜山佐自川一里 第十¥四統三戸」

「東莱」は釜山です。釜山の出身です。当時は倭館(日本人の居住地域)が釜山にありました。

「私奴」は奴隷です(賤民)。

「用朴」が彼の本名でしょうか。年齢は33歳。

身長が四尺一寸(124cm)は当時にしても低すぎます。この部分は誤記の可能¥性もあるでしょう。

裏面はこの認識票が作られた日時と場所が書かれています。

3年前に認識票が作られているので、彼は当時36歳だったことが分ります。

 

彼は日本語を話せました。

彼の身分から考えて、日本語が話せたことは凄い事だと思います。

当時の釜山は、現在とは違い、とても小さな村だったらしいので、釜山周辺では日本語が多く使われていたのか、あるいは安龍福が日本人のもとで働いていた経験が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少なくとも日本語が使えた安龍福は、日本に関しての知識があったことは間違いないでしょう。

 

彼は文字の読み書きが出来なかったみたいです。日本語も朝鮮語も文字は理解が出来なかった。

よって彼が残した文章は存在しない。彼の発言が他者によって記録として残されています。


 

1692年3月、村川家(村上家と大谷家は幕府から鬱陵島を拝領していました)の船が鬱陵島に行った時、朝鮮人を見つけます。

その朝鮮人の中には日本語が話せ、「鬱陵島より北の島へ国主用の鮑取りに来たが難風に遭ってこの島に漂着した。この島にも鮑がいるので取った。」と主張するものがいました。

村上家は、その朝鮮人らに島の領有権が日本にあるから出ていけと注意をします。

 

ここで重要なのは、日本語を話せた朝鮮人と北の島で漁をしていたが遭難して鬱陵島に来たと言う主張です。

日本語が話せた朝鮮人は安龍福の可能¥性が高い。

なぜ、遭難して流れ着いたと主張をするのかと言うと、

鬱陵島は、1417年、李氏朝鮮の太宗が「空島政策」を発令し、以降の460年間は朝鮮人の渡航が禁止されていました。

 

翌年の1693年4月、大谷家が幕府の許可を得て鬱陵島に行き、漁をしてると、朝鮮人に遭遇します。

この時、その朝鮮人のうち2名を連行します。

尋問すると、一人は「安龍福」を名乗ります。年齢は42歳だと言います。

彼らは2ヶ月間、米子で取調べをされます。この時、腰の認識票も確認されます。

腰の認識票に年齢が書き込まれているのに、嘘の年齢を主張した安龍福は文字が読めなかったのでしょう。

その後、安龍福らは朝鮮に返されます。

朝鮮でも取調べを受けます。鬱陵島は朝鮮では渡航禁止の島なので、ここでも安龍福は遭難して鬱陵島に流れ着いたと主張をします。

 

この時期、日本と朝鮮では鬱陵島の領土問題の交渉が行われています。

その結果、1696年1月、日本は譲歩し、鬱陵島への日本人の渡航を禁止します。

日本も鬱陵島への渡航禁止し、朝鮮も鬱陵島への渡航禁止をしていますから、この時代の両国がトラブルを起こさないように神経を使っていたことが分ります。現在でも見習うべきですね。

 

その年の5月に、安龍福ら10人は隠岐に流れ着きます。

今回は、船首に「朝鬱両島監税将臣安同知騎」と書いた旗を掲げて、役人の詐称をします。

日本語も話せない振りをします。

すでに、前回、腰の認識票により「私奴」が確認されているのですが、ここが安龍福の面白い部分ですね。

 

日本側もあまり真面目には相手にせずに、取調べ後、そのまま朝鮮に送り返されます。

 

朝鮮に戻った安龍福は、犯罪者として捕らえられソ¥ウルに送られます。

尋問後に、日本と訴訟事件を起こした罪により流罪となります。

 

1697年2月14日、対馬藩が安龍福の件について、朝鮮の東莱都護府使(釜山の長官)に質問をします。

「漂風の愚民に至りては、設ひ作為する所あるも、朝家の知る所に非ずして(至於漂風愚民 設有所作爲 亦非朝家所知)」と口答で回答。愚民が勝手に行った事で政府とは関係ない。

3月には「呈書のことについては誠に妄作の罪あり」として安龍福を処罰した事を文書にて日本に通知しています。

 

(詳しくは日本側のWikiを見てください。ソ¥ースも詳しく貼¥られています。)

 

 

ここからが本題ですが、なぜ韓国では奴隷階級の密漁者を「将軍」と呼ぶのでしょうか?

 

日本側は、腰に奴隷の証を着け、年齢を詐称してる朝鮮人は相手にはしません。

 

韓国人は騙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ですか?

 

王の命を受けた「将軍」が、日本と領土交渉を行ったと信じているのではないですか?

 

事実は、上陸が禁止されていた島で密漁を繰り返していた「私奴」です。


안용복장군

 

 

「장군」도 아닌 인물을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국의 영토의 근거가 없는데 영유를 주장하는 행위와 닮아 있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가능한 한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고 논의를 진행시켜야 합니다.

왜곡·날조가 포함된 정보를 기초로 논의를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안용복의 Wiki

일본측 http://ja.wikipedia.org/wiki/%E5%AE%89%E9%BE%8D%E7%A6%8F

한국측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C%9A%A9%EB%B3%B5

정보의 질도 양도 크게 다릅니다.할 수 있으면 한국인도 기계 번역을 통하고, 일본어의 Wiki를 일독하는 일을 권합니다.

 

 안용복이 최초로 일본인에 확인되었을 때에, 그는 허리에 인식표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표면에는 「동래사노용박 연 303장4자한 치면철자잠생자무주경거우중가을」

이면에는 「경오부산좌자천일리(약 3.93km) 제104통미토」

「동래」는 부산입니다.부산의 출신입니다.당시는 야마토관(일본인의 거주지역)이 부산에 있었습니다.

「사노」는 노예입니다(천민).

「용박」이 그의 본명입니까.연령은 33세.

신장이 4자한 치(124 cm)는 당시로 해도 너무 낮습니다.이 부분은 오기의 가능성도 있겠지요.

이면은 이 인식표가 만들어진 일시와 장소가 쓰여져 있습니다.

3년전에 인식표가 만들어져 있으므로, 그는 당시 36세였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분으로부터 생각하고, 일본어를 할 수 있던 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부산은, 현재와는 달라, 매우 작은 마을이었던 것 같기 때문에, 부산 주변에서는 일본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었는지, 혹은 안용복이 일본인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던 경험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안용복은, 일본에 관한 지식이 있던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는 문자의 읽고 쓰기를 할 수 없었다 같습니다.일본어나 조선어도 문자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남긴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그의 발언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기록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1692년 3월, 무라카와가(무라카미가와 오오타니가는 막부로부터 울릉도를 배령 하고 있었습니다)의 배가 울릉도에 갔을 때, 한국인을 찾아냅니다.

그 한국인안에는 일본어가 이야기키, 「울릉도에서(보다) 북쪽의 섬에 쿠니시용의 전복 배달시키러 왔지만 난풍을 당해 이 섬에 표착했다.이 섬에도 전복이 있으므로 취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라카미가는, 그 한국인등에 섬의 영유권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나가라고 주의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한국인과 북쪽의 섬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지만 조난하고 울릉도에 왔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안용복의 가능성이 높다.

왜, 조난해 표류했다고 주장을 하는가 하면,

울릉도는, 1417년, 이씨 조선의 태종이 「공도정책」을 발령해, 이후의 460년간은 한국인의 도항이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다음 해의 1693년 4월, 오오타니가가 막부의 허가를 얻고 울릉도에 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으면, 한국인에 조우합니다.

이 때, 그 한국인중 2명을 연행합니다.

심문하면, 한 명은 「안용복」을 자칭합니다.연령은 42세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2개월간, 요나고에서 조사를 하십니다.이 때, 허리의 인식표도 확인됩니다.

허리의 인식표에 연령이 써지고 있는데, 거짓말의 연령을 주장한 안용복은 문자를 읽을 수 없었겠지요.

그 후, 안용복등은 조선에 돌려주어집니다.

조선에서도 조사를 받습니다.울릉도는 조선에서는 도항 금지의 섬이므로, 여기에서도 안용복은 조난하고 울릉도에 표류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 시기, 일본과 조선에서는 울릉도의 영토 문제의 교섭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1696년 1월, 일본은 양보해, 울릉도에의 일본인의 도항을 금지합니다.

일본도 울릉도에의 도항 금지해, 조선도 울릉도에의 도항 금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양국이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게 신경을 사용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현재에도 본받아야 합니다.

 

그 해의 5월에, 안용복등 10명은 오키에 표류합니다.

이번은, 뱃머리에 「조울양 섬감세장신안 동지기」라고 쓴 기를 내걸고, 공무원의 사칭을 합니다.

일본어도 할 수 없는 모습을 합니다.

벌써, 전회, 허리의 인식표에 의해 「사노」가 확인되고 있습니다만, 여기가 안용복의 재미있는 부분이군요.

 

일본측도 너무 성실하게는 상대로 하지 않고 , 조사 후, 그대로 조선에 돌려 보내집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범죄자로서 잡혀 소울에 보내집니다.

심문 후에, 일본과 소송 사건을 일으킨 죄에 의해 유죄가 됩니다.

 

1697년 2월 14일, 쓰시마번이안용복의 건에 대해서,조선의 동래 도호부사(부산의 장관)에 질문을 합니다.

「표풍의 우민에 이르러라고는, 설히작위 하는 곳 있는 것도, 아침집이 아는 곳에 비않다 해(지어표풍우민설유소행위역비아침 처소지)」라고 말대꾸로 회답.우민이 마음대로 간 일로 정부와는 관계없다.

3월에는 「정서에 대해서는 정말로 망작의 죄 있어」로서 안용복을 처벌한 일을 문서에서 일본에 통지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일본측의 Wiki를 봐 주세요.소스도 자세하고 첩라고 있습니다.)

 

 

여기로부터가 주제입니다만, 왜 한국에서는 노예 계급의 밀어자를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일본측은, 허리에 노예의 증거를 대어 연령을 사칭 하고 있는 한국인은 상대에게는 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은 속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왕의 생명을 받은 「장군」이, 일본과 영토 교섭을 실시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은, 상륙이 금지되고 있던 섬에서 밀어를 반복하고 있던 「사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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