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日本

便所の設置が大いなるビジネスとなった江戸時代
http://www.sumainavi.net/column/col041214.html



●江戸幕府が奨励したトイレづくり

鎌倉時代より、肥料として注目されるようになった下肥(しもごえ)ですが、江戸時代に入ると、幕府レベルで“肥料確保のためのトイレ設置奨励”が行われたのです。慶安2年(1694年)に幕府が全国に発行した「慶安御触書(けいあんおふれがき)」にこんな文面があります。
「百姓は、肥、灰調べ置き候義、専一に候間、雪隠を広く作り、雨降り時分、水入らざるように仕るべし」
農家は下肥を無駄にしないために便所を母屋近くや家の隅々につくり、雨に濡れて薄まらないよう屋根などもつくれ、すなわち屋根付きトイレをつくれと幕府が指示しているのです。

●美しい街づくりに貢献した路傍便所の普及
一方、大都市では路傍便所(共同公衆便所)が登場し、これを設置した者が農家に売り、その代金を収入として得ることが出来ました。つまりトイレを作って往来を通る人のを集めればカネ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京都のある人物などは、村の数カ所に公衆便所をつくりたいという「雪隠設置願い」を幕府に提出し、これによる収入で住まいの修繕費を賄たという記録もあります。
また、当時日本にやってきたある南蛮人の記録には路傍の公衆便所に感嘆した、とあります。実はヨーロッパの都市では、江戸時代中期にあたる18世紀になっても、“おまる”にしたソ¥レを、家の窓から裏通りに投げ捨てる人が多く、いつも異臭が漂っていたのです。これに対し公衆便所が発達し、リサイクルされる日本の都市は、世界的にも最も清潔な街だったのです。
こうして、公衆便所や長屋の共同便所、農家の外便所、武家屋敷や商家の便所というふうに、便所の設置は全国各地に広がり、その装飾も工夫するようになっていきます。


●上方 VS 江戸の便所比較
さて、そんな当時の東西の便所を比較してみましょう。都市における便所の発達は、歴史の古い京阪の方が発達し、江戸は遅れがちであ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
まずは建築構¥造。各家に設置された家持ちタイプの便所は、東西にあまり差がなく、四周を壁にして前方に小窓を設け、床は板張りにして中央に穴をあけたもの でした。陶製の便器はまだないものの、扉に装飾を設けたり便所までの渡り廊下の景色を工夫するなど、自然との調和を大切にする日本人の感性は現代のものと 比べてそう見劣り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ところが長屋の共同便所は東西で大きく異なります。江戸の惣後架(そうごうか)(長屋の共同便所 の呼び名)は、板葺きの粗末な屋根に、羽目板壁、開口部の扉は半戸(上半分が吹き抜け)。京阪の惣雪隠(そうせっちん)(長屋の共同便所の呼び名)は、瓦 葺きの屋根に周囲は土壁、床は板張り、扉は開口部全体を覆う構¥造。
さらに、処分の方法も異なりました。京阪では、肥として糞と尿の両方が回 収され、その下肥代は、“家持ち”は当然自分のもの、借家人の場合は、糞代が家主、尿代が借家人の収入とされていました。一方、江戸では下肥としてもっぱ ら尿だけを蓄え、すべて大家の収入となりました。ちなみに、江戸では家主と大家は基本的に別人。借家人や長屋を管理するのが大家であり、大家は家賃を徴収 して家主に払い、長屋の維持管理費を家主からもらい、さらに尿代で稼いでいたと言われています。ある記録には、大家が家主からもらえる維持管理費が年間 20両、それ以外の下肥代が年間30〜40両とあります。当時の優秀な職人の年収が約18両〜20両ですから、長屋の便所の収入は相当なものだったといえ ます。そんな大家のことを揶揄した川柳が残っています。
「店中の尻で大家は餅をつき」

●モースが絶賛した日本のトイレ建築
トイレビジネスが発達した江戸から、ついに明治時代へ。この時日本にやってきた学者E・モースは、当時の日本の住まいについてたくさんの記録を残しています。その中に「便所といえど日本家屋では芸術的感性ある職人がこれに注意を払っている」というトイレに関する記載もあり、町中と田舎の便所の例をあげています。
一つは、東京浅草の商家の便所で、戸に様々な色の材質の木を用いた象眼細工の模様があり、美しい指物細工の見本のようだと絶賛。もう一つは、日光近くの旅 籠の便所で、渡り廊下の縁取りの自然の木の幹や、便所の入り口に使われた葡萄づるのアーチなどの素材に注目し、外側の竹垣や植木の趣味を褒め、木製の四脚 台と手洗い桶が外国人にも使いやすい設備だと記述しています。
便所は生活に根ざした場所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欧米人より日本人の方が空間的な豊かさを追求していると高く評価しているのです。
トイレをビジネスとして普及させていくと同時に、住まいの中の大切な文化としても発達させたというのは、日本人として世界に自慢出来ることなのかもしれませんね。次回はついに、トイレタイムスリップの最終章、近代から現代の便所を探検します!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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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ショップ夫人著「30年前の朝鮮」より
「市民は地上に瓦または藁を並べた平屋の下に潜り込んで生活している。いや不潔な道路に蠢動していると形容した方が良いだろうか。その道路は広くても二頭の馬が並べるほどではない。狭いところで大きな荷物を担いだ人が通ると、それだけで往来を塞いでしまうほどである。道路のはしには悪臭が辺り一面臭ってくる溝があり、路面はまみれの半分裸の子供達と、猛悪な犬とによって占領されている。」
下水道は、市内の汚水を昼夜絶え間なく城外へと排せつしている。そのため、下水道の泥は真っ黒で、遙かな昔からの汚水によって染められ悪臭を空気中に放散して旅人を悩ましている。」
ソ¥ウルは汚いことと臭いことでは世界一である。」

 

 

細井肇 著「漢城の風雲と名士」(『政治史』第77巻、豚犬的生活五より)
韓国内地を旅行すれば、路傍や街路中に累々たる黄金の花(人糞の比喩)が場所も構¥わずにあちらこちらに咲き乱れいて、足の踏み場もなく潔癖な人は一目その不潔さと臭気の酷さに驚くのである

・・・(中略)・・・

 

現に、この国(韓国)の中央都会である京城(ソ¥ウル)のような「韓国の帝都」と言われる都市でさえ至る所に人糞や牛馬糞を見ないことはなく、辺りに漂う恐ろしいほどの臭気は人の鼻を襲い目を顰めない人はいない
さらに京城市内(ソ¥ウル市内)を流れている川には、そこに隣接する各家々から排せつされる糞尿が混じり、川の水は黄色に染まり、ドロドロとなっているなど目も当てられない光景であるが、韓国人はその水を洗濯に使っている
。全く持ってとんでもない話である。毎年夏期になると京城(ソ¥ウル)では伝染病が流行し、その伝染病にかかる患者の殆どが韓国人であり、大流行時には何千人もの患者を出すことも珍しく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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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없었던 열등 한국원숭이

■일본
변소의 설치가 커다란 비즈니스가 된 에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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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가 장려한 화장실 만들기

가마쿠라 시대보다, 비료로서 주목받게 된 밑거름(하지도 넘어가는 길)입니다만, 에도시대에 들어가면, 막부 레벨로“비료 확보를 위한 화장실 설치 장려”를 했습니다.게이안 2년(1694년)에 막부가 전국에 발행한 「게이안촉서(중매장이 공고가 나무)」에 이런 문면이 있습니다.
「백성은, 거름, 재 조사해 두어 후의, 전념에 후간, 변소를 넓게 만들어, 비시분, 물 들어가 바구니나름에 사해」
농가는 밑거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때문에) 변소를 안방 근처나 집의 구석구석에 만들어, 비에 젖어 엷어지지 않게 지붕등 가지는 주어 즉지붕 화장실을 만들라고 막부가 지시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 조성에 공헌한 길가 변소의 보급
한편, 대도시에서는 길가 변소(공동 공중 변소)가 등장해, 이것을 설치한 사람이 농가에 팔아, 그 대금을 수입으로 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즉 화장실을 만들고 왕래를 통과하는 사람의 것을 모으면 돈이 되는 것입니다.쿄토가 있는 인물 등은, 마을의 수군데에 공중 변소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 「변소 설치 소원」을 막부에 제출해, 여기에 따른 수입으로 거주지의 수선비를 회라고 하는기록도 있습니다.
또, 당시 일본에 온 어느A 서양인의 기록에는,길가의 공중 변소에 감탄했다, 라고 있습니다.실은 유럽의 도시에서는, 에도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18 세기가 되어도, “변기”로 한 소레를, 집의 창으로부터 뒷 골목에 내던지는 사람이 대부분, 언제나 이취가 감돌고 있었습니다.이것에 대해공중 변소가 발달해, 리사이클되는 일본의 수도시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청결한 거리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공중 변소나 연립 주택의 공동 변소, 농가의 밖변소, 부케야시키나 상가의 변소라고 하는 식으로, 변소의 설치는 전국 각지에 퍼져, 그 장식도 궁리하게 되어서 갑니다.


●윗쪽 VS 에도의 변소 비교
그런데, 그런 당시의 동서의 변소를 비교해 봅시다.도시에 있어서의 변소의 발달은, 역사의 낡은 쿄토와 오사카가 발달해, 에도는 지각하기 쉽상에서 만났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우선은 건축구조.각 집안에 설치된 세대주 타입의 변소는, 동서로 별로 차이가 없고, 4주를 벽으로 해 전방으로 소창을 마련해 마루는 판자부착으로 하고 중앙에 구멍을 뚫은 것 (이었)였습니다.도제의 변기는 아직 없기는 하지만, 문에 장식을 마련하거나 변소까지의 이동 복도의 경치를 궁리하는 등, 자연과의 조화를 소중히 하는 일본인의 감성은 현대의 것과 비교해서 그렇게 열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연립 주택의 공동 변소는 동서에서 크게 다릅니다.에도의 소우고가(종합인가)(연립 주택의 공동 변소의 통칭)는, 판자 지붕나무의 허술한 지붕에, 널판지벽, 개구부의 문은 반호(상반분이 불어).쿄토와 오사카의 총변소(그렇게 설치응)(연립 주택의 공동 변소의 통칭)는, 기와로 인 지붕의 지붕에 주위는 토담, 마루는 판자부착, 문은 개구부 전체를 가리는 구조.
게다가 처분의 방법도 달랐습니다.쿄토와 오사카에서는, 거름으로서 대변과 뇨의 양쪽 모두가 회수되어 그 밑거름대는, “세대주”는 당연히 자신의 것, 가차인의 경우는, 분대가 집주인, 뇨대가 가차인의 수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한편, 에도에서는 밑거름으로서 오로지 뇨만을 저축해 모두 주인의 수입이 되었습니다.덧붙여서, 에도에서는 집주인과 주인은 기본적으로 딴사람.가차인이나 연립 주택을 관리하는 것이 주인이며, 주인은 집세를 징수하고 집주인에 지불해, 연립 주택의 유지 관리비를 집주인으로부터도들 있어, 한층 더 뇨대로 벌고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어느A 기록에는, 주인이 집주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유지 관리비가 연간 20양, 그 이외의 밑거름대가 연간 30~40량으로 있습니다.당시의 우수한 직공의 연수입이 약 18량~20량이기 때문에, 연립 주택의 변소의 수입은 상당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런 주인을 야유한 센류우가 남아 있습니다.
「점중의 엉덩이로 주인은 떡을 다해」

●모스가 절찬한 일본의 화장실 건축
화장실 비즈니스가 발달한 에도로부터, 마침내 메이지 시대에.이 시일책에 온 학자 E·모스는, 당시의 일본의 거주지에 도착하고 있었던 풀응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그 중에 「변소라고 해도 일본 가옥에서는 예술적 감성 있는 직공이 이것에 주위를 기울이고 있다」라고 하는 화장실에 관한 기재도 있어, 온 마을과 시골의 변소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도쿄 아사쿠사의 상가의 변소에서, 문에 여러가지 색 재질의 나무를 이용한 상감 세공의 모양이 있어, 아름다운 지물 세공의 견본같다면 절찬.하나 더는, 닛코 가까이의 여행 롱의 변소에서, 이동 복도의 가장자리 잡기의 자연의 나무가지나, 변소의 입구에 사용된 포도의 아치등의 소재에 주목해, 외측의 대 울타리나 식목의 취미를 칭찬해 목제의 4각대와 화장실통이 외국인에게도 사용하기 쉬운 설비라면 기술하고 있습니다.
변소는 생활에 기인한 장소인 것에도 불구하고, 구미인 보다 일본인이 공간적인 풍부함을 추구하고 있으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화장실을 비즈니스로서 보급시켜 가는 것과 동시에, 거주지안의 중요한 문화라고 해도 발달시켰다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세계에 자랑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다음 번은 마침내, 광고 시간 슬립의 최종장, 근대부터 현대의 변소를 탐험합니다!

 


■조선
http://members.at.infoseek.co.jp/konrot/rekisi28.htm
비숍 부인저 「30년전의 조선」보다
「시민은 지상에 기와 또는 짚을 늘어놓은 단층집아래에 기어들어 생활하고 있다.아니불결인 도로에 준동하고 있는과 형용하는 것이 좋을까.그 도로는 넓어도 두마리의 말이 늘어놓을 정도는 아니다.좁은 곳으로 큰 짐을 담 있어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 만큼으로 왕래를 막아 버릴 만큼이다.도로의 젓가락에는악취가 근처 일면 냄새나 오는 도랑이 있어, 노면은먼지투성이의 반 알몸의 아이들과 사납고 악독한 개와에 의해서 점령되고 있다.」
하수도는, 시내의오수를 밤낮 끊임없이 성밖으로 배설하고 있다.그 때문에,하수도의 진흙은 진흑으로, 아득한 옛부터의오수에 의해서 마음에 끌릴 수 있어서악취를 공기중에 방산 하고 여행자를 괴롭히고 있다.」
소울은 더러운 일과 냄새난 일로는 세계 제일이다.」

 

 

호소이 하지메저 「한성의 풍운과 명사」( 「정치사」 제77권, 돈견적 생활5보다)
한국내지를 여행하면,길가나 가로안에 루들인황금의 꽃(인분의 비유)이 장소도 구원 하지 않고서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발 디딜 곳도 없고 결벽한 사람은 한 눈그 불결함과 악취의 가혹함에 놀라는 것이다.

···(중략)···

 

실제로, 이 나라(한국)의 중앙 도시인 경성(소울)과 같은「한국의 제국의 수도」라고 해지는 도시조차 도처에인분이나 우마대변을 보지 않는 것은 없고,근처에 감도는 무서울 만큼의 악취는 사람의 코를 덮쳐 눈을 찡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층 더 경성 시내(소울 시내)를 흐르고 있는 강에는, 거기에 인접하는 각 집안들로부터 배설되는분뇨가 섞여, 강의 물은황색에 물들어,드로드로되고 있는 등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한국인은 그 물을 세탁에 사용하고 있다
.완전히 가져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다.매년 하기가 되면 경성(소울)에서는 전염병이 유행해, 그 전염병에 걸리는 환자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며, 대유행시에는 몇천명의 환자를 내는 것도 드물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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