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高宗皇帝の 最後の決断

 

 

時代的状況

露日戦争を言葉尻で 2個社団の韓国駐車君で大韓帝国政府を脅威しながら

1906年 7月 2日痛感伊藤博文は高宗皇帝を謁見しながら暴徒反発の禍根は宮廷に潜在したところだから宮廷の晨正必要で警衛院代わり(台臣)に警務顧問部監官で宮廷護衛を引き受けるようにすることを常在して警衛院を廃止して心配領を発表して 1906年 3月 17日から皇室経緯圏を剥奪されて日本警察によって皇宮が掌握された状況でした

 

高宗に営団(英断)

 

 

1907年 7月 19日高宗皇帝は大きい 決断を下すことに心に決めました.

当時ソウルに駐屯していた日本韓国ゾチァグンは 1個連帯水準だったし

大韓帝国君は皇帝直属混成デモ旅団 1個及び 2ヶ連隊 4900人でありました.

大韓帝国君は携帯弾丸 15満発と展示(争) 備蓄弾丸 600余万発の弾薬を備蓄した状態だったし Gatling機関銃とマキシム機関銃そしてクルップ 75mm 速射砲とアームストロング砲などの莫強した砲兵勢力も取り揃えていました.

 

高宗皇帝が下した決断はすぐ. 日本との 実質的な 戦争でした

 

デモ隊が皇宮に進入して皇帝を直接宝位して日本軍の脅威を緩和させて親日閣僚たちを抑圧最悪の場合これらを皆兵力でとり除こうとするこの計画は日本によって マングヘがは大韓帝国に対する皇帝の最後の決断でした.

これに デモ 2連帯 3代代は 1907年 7月 19日譲位詔勅が発表される夜明け皇宮で進入する計画を立てたし皇帝の命令を待っていました.

 

しかし... このような高宗皇帝の決断を 邪魔して一人に人間がいたからところで 親日派 売国奴 軍部の代わり 李兵務 でした. 軍部を統制した軍部代わりだったからこのような計画を気づいた李兵務はまっすぐに伊藤博文にこの事実を 知らせました.

 

 

伊藤博文はまっすぐに日本軍 51連帯 3代代を派遣して 慶運宮の各門を急に封鎖したし

1代代はこの計画で高宗に護衛を引き受けた大韓帝国君デモ 2連帯 3代代本営を不意打ちかこみます.

 デモだね 3代代所属のいくつかの兵士らが日本軍に包囲をくぐって境界勤務の中だったデモ 1連帯 3代代兵士 100人余りを先導して大大的な武将脱営をして鐘路交番を急襲して日本人景観 3人を射殺して慶運宮と本営をかこんだ日本軍と散発的な銃撃戦後復帰します.

 

1907年 7月 20日

 

 

大韓帝国君の組織的な反撃を恐れた日本は砲兵 19連帯 1個砲台を南山わい星台一帯に山砲を展開してソウル町竝みを圧する作戦を立てながら 51連帯兵力を動員大韓帝国軍部庁舍を占拠して竜山陸軍兵器を占領後弾薬を包み隠したし平壌守備隊 1個大隊を緊急差出してソウルの兵力を増強させました.

 

これとして高宗皇帝の最後の決断は一人の祖国を裏切った 李兵務という親日 売国奴に 義解失敗されてしまいました.

 

歴史にはもしという言葉がありえないが高宗皇帝の決断が成功した場合歴史がどんなにバクィヨッウルカを考えて見られました.

 

 

 

 

 

高宗皇帝を護衛する大韓帝国君親衛隊と騎兵隊

 

大韓帝国君親衛隊

 

ヤングワングと大韓帝国君将校たち
真中オリンブンがヤングワング
掻白燐, 漁エ ギムウングでは, ゾソンググン, 民兵席, 民営所様などがいらっしゃいます.

 

 

大韓帝国君デモ隊

 

大韓帝国君の軍帽の文様はオヤッコッ文様です
皇室の大人 李が [スモモこの]である理由でオヤッコッは大韓帝国皇室文様です.
 
 
大韓国際国軍水原真偽台強化分遣所将校李俊英が使った帽子だ. 李俊英は 1900年 7月陸軍無関学校将校養成課程を修了した後, 参尉でデモ隊で勤める中 1907年 8月韓国軍隊が解散されると朴昇煥などが自決すると, デモ隊将兵たちとともに解散命令を拒否して日本軍と激戦をして殉国した.
       帽子上部の文様は大韓帝国の国花である 梨花(梨花)柄だ. 梨花柄は
       大韓帝国皇室文様でもある.
 

 大韓帝国の沒落する姿に 自決した. 笑っている殉国烈士閔泳煥

 

高宗皇帝は 日本の侵略の野慾を沮止するため

力強い近代式軍隊がほしかったし

 

約8年と言う(のは)短期間の間準備した大韓帝国の軍隊は

1907年日製の 軍隊解散要求に無産されました.

 

 

(ソウル戦闘で大韓帝国君 押えて入城する日本軍隊) 日帝が大韓帝国の 軍隊を強制解散させると李寅泳を総帥にして義兵部隊と大韓帝国君連合 13ドチァングウィだね(十三道倡義軍)が編成されたし 倭民族から ソウル奪還のために 進撃した.

しかし兵力不足と火力劣勢で遂に失敗するようになる.

 

この事件は大韓帝国君と日本軍の二番目と同時に最後の戦闘で記録になる.

 

 

 

 

 

1907年 8月1日, ソウル東大門訓練院練兵場. 軍人たちが一つ二つ集まって来た. 大韓帝国軍隊解散式を行われるためだ. 予定視覚午前10時を越して午後2時まで集結した兵力は 1,812人. 対象人員の中で半分が不参したが統監府は急いで解散式を行った.

 

軍隊解散式には抵抗がよった. デモ 1連帯 1大隊長朴昇煥真実領が激憤の中に自決すると兵士らが鉄砲を持ったが日本軍があらかじめ弾薬庫を占拠した状況. 弾薬が枯渇した夜11時頃戦闘は終わった. ソウル現価だ銃撃戦を見守ったアメリカ人意思エビスン(セブランス病院共同設立者)が ‘弾薬さえ十分だったら韓国軍が勝利したこと’という言葉を残した位惜しい戦闘だった.

地方状況も同じ. 7個真偽代代の中で原州と江華島・水原で一部が抗したが 8月10日頃 3分の2街解散を終えた. 散らばった兵士らは義兵に合流, 抗日義兵の全力が強まったとしても軍隊の崩壊は亡国につながった.

誰より衝撃が大きかった人はヘイグ密使事件に言葉尻つかまって強制退位された高宗皇帝. 極甚なインフレーションでも国家総支出の 25‾40%を投入して軍隊を育てたからだ. 財政規模自体が些細だったが兵力数が少なかったから大韓帝国君の装備は列強たちに劣らなかった.

問題は雑多な構成. アメリカ・イギリス・フランス・ドイツ・ロシア・和製小銃が混在して普及と運用の統一が難しかった. 牛禁峙戦闘で東学君を崩したアメリカ制Gatling機関砲はもちろんイギリス制アームストロング大砲と最高級ドイツ製クル−ム大砲も軍隊解散という危機には使わ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露日戦争以後得勢した親日派将校たちが重火器を日本軍陣営で引き抜いたせいだ. 放漫な財政と国防予算課装備の效率的管理不在, 国家反逆勢力がかみ合って軍事力喪失と狡い 倭寇によって 国家滅亡を生んだわけだ.


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

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

 

 

시대적 상황

러일전쟁을 빌미로 2개 사단의 한국주차군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면서

1906년 7월 2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를 알현하면서 폭도 반발의 화근은 궁중에 잠재한 바이니 궁중의 숙정 필요로 경위원 대신(臺臣)에 경무고문부 감관으로 궁정 호위를 맡도록 할 것을 상주하여 경위원을 폐지하고 궁금령을 발표하여 1906년 3월 17일 부터 황실경위권을 박탈당해 일본경찰에 의해 황궁이 장악당한 상황이였습니다

 

고종에 영단(英斷)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는 큰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한국 조차군은 1개 연대 수준이였으며

대한제국군은 황제 직속 혼성시위 여단 1개 및 2개 연대 4900명 이였습니다.

대한제국군은 휴대탄환 15만발과 전시(爭) 비축 탄환 600여만발의 탄약을 비축한 상태였고 개틀링 기관총과 맥심 기관총 그리고 크루프 75mm 속사포와 암스트롱 포 등의 막강한 포병 세력 또한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종황제께서 내리신 결단은 바로. 일본과의 실질적인 전쟁이였습니다

시위대가 황궁에 진입하여 황제를 직접 보위하여 일본군의 위협을 완화시키며 친일 각료들을 억압 최악의 경우 이들을 모두 병력으로 제거하려는 이 계획은 일본에 의해 망해가는 대한제국에 대한 황제의 마지막 결단이였습니다.

이에 시위 2연대 3대대는 1907년 7월 19일 양위 조칙이 발표되는 새벽 황궁으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으며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황제의 결단을 방해하고 한명에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친일파 매국노 군부대신 이병무 였습니다. 군부를 통제하던 군부대신이였으니 이러한 계획을 눈치챈 이병무는 곧장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일본군 51연대 3대대를 파견하여 경운궁의 각 문을 급히 봉쇄했으며

1대대는 이 계획에서 고종에 호위를 맡은 대한 제국군 시위 2연대 3대대 본영을 기습 포위합니다.

 시위군 3대대 소속의 몇몇 병사들이 일본군에 포위를 뚫고 경계근무 중이던 시위 1연대 3대대 병사 100여명을 선동하여 대대적인 무장 탈영을 벌여서 종로 파출소를 급습하여 일본인 경관 3명을 사살하고 경운궁과 본영을 포위한 일본군과 산발적인 총격전 후 복귀합니다.

 

1907년 7월 20일

 

대한제국군의 조직적인 반격을 두려워한 일본은 포병 19연대 1개 포대를 남산 왜성대 일대에 산포를 전개해 서울 시가지를 제압할 작전을 세우면서 51연대 병력을 동원 대한제국 군부청사를 점거하고 용산 육군병기창을 점령 후 탄약을 은닉하였으며 평양수비대 1개 대대를 긴급 차출하여 서울의 병력을 증강시켰습니다.

 

이로서 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은 한명의 조국을 배신한 이병무라는 친일 매국노에 의해 실패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지만 고종황제의 결단이 성공했을 경우 역사가 어떻게 바뀌였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고종황제를 호위하는 대한제국군 친위대와 기병대

 

대한제국군 친위대

 

영왕과 대한제국군 장교들
정중앙 어린분이 영왕
노백린, 어담, 김응선, 조성근, 민병석, 민영소님 등이 계십니다.

 

대한제국군 시위대

 

대한제국군의 군모의 문양은 오얏꽃 문양입니다
황실의 성인 李가 [오얏나무 이]인 이유로 오얏꽃은 대한제국 황실 문양입니다.
 
 
대한국제국군 수원 진위대 강화분견소 장교 이준영이 썼던 모자이다. 이준영은 1900년 7월 육군무관학교 장교 양성과정을 수료한 후, 참위로 시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해산되자 박승환 등이 자결하자, 시위대 장병들과 함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모자윗부분의 문양은 대한제국의 국화인 이화(배꽃)무늬이다. 이화무늬는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몰락하는 모습에 자결한. 웃고 있는 순국열사 민영환

 

고종황제는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강력한 근대식 군대를 원했으며

 

약8년이란 단기간 동안 준비한 대한제국의 군대는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 요구로 무산되었습니다.

 

 

(서울 전투에서 대한제국군 진압하고 입성하는 일본군대)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여 의병부대와 대한제국군연합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편성되었고 倭민족으로부터 서울탈환을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병력부족과 화력열세로 끝내 실패하게된다.

이사건은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전투로 기록이된다.

 

 

 

 

 

1907년 8월1일, 서울 동대문 훈련원 연병장. 군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식을 갖기 위해서다. 예정시각 오전10시를 넘겨 오후2시까지 집결한 병력은 1,812명. 대상인원 중 절반이 불참했지만 통감부는 서둘러 해산식을 가졌다.

 

군대해산식에는 저항이 따랐다.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격분 속에 자결하자 병사들이 총을 들었으나 일본군이 미리 탄약고를 점거한 상황. 탄약이 고갈된 밤11시쯤 전투는 끝났다. 서울시가지 총격전을 지켜본 미국인 의사 애비슨(세브란스병원 공동설립자)이 ‘탄약만 충분했다면 한국군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아쉬운 전투였다.

지방 상황도 마찬가지. 7개 진위대대 중 원주와 강화도ㆍ수원에서 일부가 항거했으나 8월10일께 3분의2가 해산을 마쳤다. 흩어진 병사들은 의병에 합류, 항일의병의 전력이 강해졌다지만 군대의 붕괴는 망국으로 이어졌다.

누구보다 충격이 컸던 사람은 헤이그 밀사 사건에 빌미 잡혀 강제 퇴위당했던 고종황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서도 국가 총지출의 25~40%를 투입하며 군대를 키웠기 때문이다. 재정규모 자체가 미미했지만 병력 수가 적었기에 대한제국군의 장비는 열강들에 버금갔다.

문제는 잡다한 구성.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ㆍ일본제 소총이 혼재해 보급과 운용의 통일이 어려웠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을 무너뜨렸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는 물론 영국제 암스트롱 대포와 최고급 독일제 크룹 대포도 군대해산이라는 위기에는 쓰이지 못했다. 러일전쟁 이후 득세한 친일파 장교들이 중화기를 일본군 진영으로 빼돌린 탓이다. 방만한 재정과 국방 예산과 장비의 효율적 관리 부재, 국가 반역세력이 맞물려 군사력 상실과 교활한 일본인에 의해 국가멸망을 낳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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