伝統文化

 浮石寺(浮石寺)は新羅の僧侶衣装(義湘 625‾702)が創建した査察だ. 衣装(義湘)は新羅真骨貴族出身で唐に留学を行ったし 670年帰国して唐の新羅侵攻計画を調整に知らせたし以後王の顧問(顧問)で活躍している途中全国あちこちに華厳学を伝えて多くの寺を創建こんにちはだった.

 当時時代相皇上仏教は護国仏教性格が強かったしゾングチゾックイだった. 引きずって行った宗教的機能外にも軍事的, 行政的, 社会的機能など国家で要するさまざまな機能を 担当した. 浮石寺もこんな時期に立てられたが位置上でも新羅と高句麗の昔の国境である今の小白山脈に位していて新たに確保された領土を経営しようとする戦略的拠点に立てられたと言える.

 浮石寺は韓国建築でよほど評価を受ける建築だ. ここで言う建築と言う(のは)建物のような意味ではない. 建築と言う(のは)建物を含んだそれが位した立地, 自然環境, それを構成する多くの要件たちとの関係などを一緒にする複合体だと言える. 現代建築は建物が一つの巨大な固まり中に多くの機能と構成が集まったほとんど完結に近い構成をしているが韓国伝統建築で建物と言う(のは)建築の一部に過ぎない, そのものでは不完全な形態であるだけだ. そうだから西洋建築や現代建築に対応して韓国建築を眺める視覚は違うしかなくて全体的に見なければならない.

 浮石寺構成の技法の中最大の特徴は坂である山に石で作ったいろいろな石段(石壇)らでつけ構築されているという点, 中心建物である無量水田(無量寿殿)に至る中心軸が屈折されているという点, 多くの構成要素で緻密な視覚的調整が成り立つという点だと言えるでしょう. 

 

 

 宗教建築は宗教ごとに表現は違うが建築でもそれを象徴するさまざまな要素たちで満たされる. 浮石寺は多くの段の石段(石壇で成り立つ. 9段で成り立つのにこれはピントでまた 3-3-3の小さな段で分けられる. 浄土信仰によったらこんな構成は無量水硬(無量寿経)で言う三倍区品説(三輩九品説)の構造を象徴化したのだ.

 多くの段の石段(石壇)を連結することは階段だ. 天王門で見える石になった道と階段は参拜者の流れを深い所で吸いこむ. 階段は四角いギンドルを切って作った. 階段のの下部分の幅が一番広くて上に行くほど細くなるのにこれは透視效果を極大化して自然に動線を上で引き上げる. 反対に下がったらの下部分が広いので視覚的に安定感を与えるようになる.

 

 

 

 石になった道と階段を上がれば建物が見え始めて通路上に梵鍾閣(梵鐘閣)が位する. 2階には梵鍾をかけて(今は梵鍾をオルギで北と 木魚をかけておいている) 1階は通路で利用する. 下で眺めればななめに立っている 安養塁(安養樓)が見えて後で半ば選り分けられたまま駐仏前(主仏殿)である無量水田が見える.

 浮石寺構成の最大の特徴の中に一つが中心軸が屈折されているというのだ. 無量水田と安養塁の中心軸は下の参拜者が上って来た方向で 30度位折れているのに上の軸(軸)は 近い小さな峰を  安山(案山)で眺めているし アレツックは遠く見える兜率峰(兜率峰)を眺めている. 上の軸は小さな領域を成すが下の軸は遠くある兜率峰(兜率峰)と繋がれて広大な領域を成している.

 或者は上の安山(案山)の軸は三田浄土(彌陀浄土)を意味して下の軸は兜率峰(兜率峰)で向ける軸は弥勒浄土(彌勒浄土)を志向すると言って仏教の他の二つの理念が自然と観念化されてここで一緒に現われていると言う.

 象徴性をトナソでも軸を折ることで梵鍾閣の下で閉鎖された額縁のフレームになったように見える姿は正面で見える平面的な姿代わり安養塁の側面まで立体的に見えて屋根のす早さが強調される視覚的な效果をおさめると言えるでしょう.

 安養塁の下はアンヤングムンなのに安養(安養)と言う(のは)極楽世界を意味してアンヤングムンは極楽世界で通じる門だ. この門を通れば無量水田が出る. ムーラン数(無量寿)と言う(のは)阿彌陀仏(阿彌陀仏)を意味することで西方の極楽世界にとどまる部処で無量水田の領域は極楽世界を象徴すると見られる.

 

 

 

 坂である山に建物を作りためには坂を平地で還元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浮石寺の石垣たちは前述した宗教的象徴外にもこんな機能性も立派に満たしている. あんまり整えない自然石を合わせて小さな石を挟んで作った石垣は自然に似ている豊かさと余裕のある美学を見せてくれる. 木のようにきれいにして緻密に組んで合わせた仏国寺の石垣とは違う美味しい. 

 

 

 

 安養塁の下の階段に上がれば浮石寺の中心である駐仏前(主仏殿) 無量水田(無量寿殿)が見える. 通路で見れば石燈がちょっと左側にかたよっているのにこれは無量水田と安養塁の軸が微妙に行き違っているからだ.

 もし中石燈が位したら無量水田の中心を選り分けて対称構図で空間が硬直されて視野が息苦しくなる. そして流れが石燈とぶつかって切れるようになる. 石燈がちょっと左に行くようになれば流れは自然に右側に連結になってこれは意図した建築的な構成だ.

 

 右側に流れを誘引する理由は無量水田を入って行く門が中間にないで右側である東にあるからだ.

 

 

 無量水田の前庭は対称される四角い庭先ではない菱の空間だ. 庭先には塔がなくてただ一つの石燈が立っている. これは無量水田に仕えられている仏様は西の方の西方浄土極楽世界の主人である阿彌陀仏で涅槃に入らないから無量水田(お寺によって 極楽殿, 彌陀殿とも言う) 前庭先には部処の墓を象徴する塔を建てない.

 代わりに一つの石燈が立てられているのに元々どこでもお寺前庭には一つ以上の石燈を建てない. これは時など功徳頃(施燈功徳経)に ¥”貧しい者が真の心で捧げた一つの 燈は金持ちが捧げた万犬の 燈よりも尊大した功徳がある¥”は句節に根拠を置いたのだ.

 

 

  安養塁を立ち上がって眺めれば山なみ後に山なみ, また山なみが重なって無量水田のために用意された自然の広い庭園が開かれる. 自然を向けて駆け付ける豪快した景観は浮石寺で一番印象的な場面の中に一つだ. 安養塁の重水期(重修記)には次のように少ない.

 

  身を風欄干に頼ったら無限江山が足の下争って走って,

 

  目をあげて空を仰いだら広くて広い乾坤(乾坤)が胸の中におさめて入って来たら

  伽藍(伽藍)の勝景(勝景)がこれと同じさはなかったよ.


 

 浮石寺の頂点を付ける無量水田は高麗時代の建築物で曲線と比例, 飾りを排除してひたすら機能に充実な構造だけで現われる美しさ, 建物に必要な不在だけで構成して蛇足を排除したピルヨミ(必要美)は韓国建築の模範と言える建物だ.

 

 柱は下で 1/3 地点が一番ふくらんでいるギリシアのエンタシスに似ている三段バラ柱で視覚的に安定感を与えて屋根の荷重によって建物両端が起ったように見える不安感を解消するために柱が内側を向けて少しずつ横になっている傾かなく, 柱が同じ高さの場合両端が張られたように見えるから角の柱が仮装(家長) 高くて中に行くほど柱が低くなるグィソッウム技法は視覚的な不安定を解消して 目の空目現象を補うための技法たちだ.

 

 

 

 無量水田の駐仏(主仏)は阿彌陀仏(阿彌陀仏)で西方浄土(西方浄土) 極楽世界の主人だから西の方に位する. 東は私たちが住んでいる仏教で言う娑婆世界(娑婆世界)だ. それで一般的に仏像は中位して南側を眺めるがこちらでは西の方に位して東を眺める. そうだから参拜者たちは進入路の流れによって安養塁から上って来た後石燈の東を通って建物の東にある門に入って行くようになる.

 

 

 

 東にある門で内部に入れば左右で外部の柱より高くて太い柱が左右で列をなしていて中土で作って金を加えた高麗時代の塑造阿彌陀如来(塑造阿彌陀如来) 仏像が座っていて宗教的な壮厳性を極大化させる. こんな空間構成は西洋中世のバジリカに似ているのに文化圏を発って似たり寄ったりに神聖な空間を強調する方式であることだ.

 天井は阻まないで屋根の木毬組(木構造)がそのまま露出しているのに飾りがなくて 屋根の構造のみを現わした 構成方式は構えない姿そのままの美しい旧調味(構造美)を見せてくれる. 

 

 

 

 無条件大きさが巨大だとか姿が派手だと 良い建築ではない. いくら機能に充実でその象徴性を效果的に現わすか, 周辺環境といくら調和になるか, どんな新しくて豊かな空間を新たにつくっているか, 多くの構成要素たちが集まってどんなに豊かな視覚化を成すか 等々さまざまな要素たちが合されて立派な建築が作られる.

 また文化によってそれの現われる方式が違って少しずつ差があるのに自分の狭い視野と主観的な判断で自分が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い他の文化を無条件捐下するということはあほうで情けない仕業だ.

 建築は人間の生を盛る器と言う. 器は美しい柄と堅い表の皮ももちろん重要だが本質はその中の何もない空の空間にある. 何を盛るのかによって器の性格は変わる. 何を盛ろうか. 建築を完成することは使う人間の行為だ.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신라의 승려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義湘)은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갔고 670년 귀국하여 당나라의 신라침공 계획을 조정에 알렸고 이후 왕의 고문(顧問)으로 활약하다가 전국 곳곳에 화엄학을 전파하며 여러 절을 창건하였다.

 당시 시대상황상 불교는 호국불교 성격이 강했고 정치적이이었다. 절은 종교적 기능 외에도 군사적, 행정적, 사회적 기능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부석사도 이런 시기에 세워졌는데 위치상으로도 신라와 고구려의 옛 국경인 지금의 소백산맥에 위치하고 있어 새로 확보된 영토를 경영하려는 전략적 거점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부석사는 한국건축에서 상당히 평가받는 건축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축이란 건물과 같은 뜻이 아니다. 건축이란 건물을 포함한 그것이 위치한 입지, 자연환경,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건들과의 관계 등을 아우르는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현대건축은 건물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안에 여러 기능과 구성이 모인 거의 완결에 가까운 구성을 하고 있지만 한국 전통건축에서 건물이란 건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형태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건축이나 현대건축에 대응해 한국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고 전체적으로 봐야 한다.

 부석사 구성의 기법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은 비탈인 산에 돌로 만든 여러개의 석단(石壇)들로 대지가 구축되어 있다는 점, 중심건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이르는 중심축이 굴절되어 있다는 점, 여러 구성요소에서 치밀한 시각적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건축은 종교마다 표현은 다르겠지만 건축에서도 그것을 상징하는 여러가지 요소들로 채워진다. 부석사는 여러 단의 석단(石壇으로 이루어진다. 9단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중심점에서 다시 3-3-3의 작은 단으로 나뉜다. 정토신앙에 따른다면 이런 구성은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말하는 삼배구품설(三輩九品說)의 구조를 상징화한 것이다.

 여러 단의 석단(石壇)을 연결하는 것은 계단이다. 천왕문에서 보이는 돌로 된 길과 계단은 참배자의 흐름을 깊은 곳으로 빨아들인다. 계단은 네모난 긴돌을 잘라 만들었다. 계단의 아래부분의 폭이 가장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이것은 투시효과를 극대화하여 자연스럽게 동선을 위로 끌어올린다. 반대로 내려간다면 아래부분이 넓으므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게 된다.

 

 

 돌로 된 길과 계단을 올라가면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통로상에 범종각(梵鐘閣)이 위치한다. 2층에는 범종을 걸고(지금은 범종을 옳기고 북과 木魚를 걸어두고 있다) 1층은 통로로 이용한다. 아래에서 바라보면 비스듬히 서 있는 안양루(安養樓)가 보이고 뒤로 반쯤 가려진채로 주불전(主佛殿)인 무량수전이 보인다.

 부석사 구성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중심축이 굴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량수전과 안양루의 중심축은 아래의 참배자가 올라온 방향에서 30도 정도 꺾여 있는데 위의 축(軸)은 가까운 작은 봉우리를  안산(案山)으로 바라보고 있고 아래축은 멀리 보이는 도솔봉(兜率峰)을 바라보고 있다. 위의 축은 작은 영역을 이루지만 아래의 축은 멀리 있는 도솔봉(兜率峰)과 연결되어 광대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혹자는 위의 안산(案山)의 축은 미타정토(彌陀淨土)를 의미하고 아래의 축은 도솔봉(兜率峰)으로 향하는 축은 미륵정토(彌勒淨土)를 지향한다고 하여 불교의 다른 두 이념이 자연과 관념화되어 여기서 같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상징성을 떠나서라도 축을 꺾음으로 범종각 아래에서 폐쇄된 액자의 틀이 되어 보이는 모습은 정면에서 보이는 평면적인 모습대신 안양루의 측면까지 입체적으로 보여 지붕의 날렵함이 강조되는 시각적인 효과를 거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양루의 아래는 안양문인데 안양(安養)이란 극락세계를 뜻하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무량수전이 나온다. 무랑수(無量壽)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뜻하는 것으로 서방의 극락세계에 머무르는 부처로 무량수전의 영역은 극락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비탈인 산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비탈을 평지로 환원해야 하는데 부석사의 석축들은 앞서 말한 종교적 상징 외에도 이런 기능성도 훌륭하게 충족하고 있다.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짜맞추고 작은 돌을 끼워 만든 석축은 자연을 닮은 풍부함과 여유로운 미학을 보여준다. 나무처럼 다듬어 치밀하게 짜서 맞춘 불국사의 석축과는 다른 맛이 있다. 

 

 

 안양루의 아래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부석사의 중심인 주불전(主佛殿)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보인다. 통로에서 보면 석등이 약간 왼쪽에 치우쳐 있는데 이것은 무량수전과 안양루의 축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가운데 석등이 위치한다면 무량수전의 중심을 가리고 대칭구도로 공간이 경직되어 시야가 답답해진다. 그리고 흐름이 석등과 부딪혀 끊어지게 된다. 석등이 약간 왼쪽으로 가게 되면 흐름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며 이것은 의도한 건축적인 구성이다.

 오른쪽으로 흐름을 유인하는 이유는 무량수전을 들어가는 문이 중간에 있지 않고 오른쪽인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의 앞마당은 대칭되는 네모난 마당이 아닌 마름모꼴의 공간이다. 마당에는 탑이 없고 오직 하나의 석등이 서 있다. 이는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서쪽의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열반에 들지 않기 때문에 무량수전(절에 따라 極樂殿, 彌陀殿이라고도 한다) 앞 마당에는 부처의 무덤을 상징하는 탑을 세우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석등이 세워져 있는데 원래 어느 곳이나 절 앞마당에는 하나 이상의 석등을 세우지 않는다. 이는 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에 "가난한 자가 참된 마음으로 바친 하나의 燈은 부자가 바친 만 개의 燈보다도 존대한 공덕이 있다"는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안양루를 올라서서 바라보면 산줄기 뒤에 산줄기, 다시 산줄기가 겹쳐져 무량수전을 위해 마련된 자연의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자연을 향해 달려가는 호쾌한 경관은 부석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이다. 안양루의 중수기(重修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몸을 바람난간에 의지하니 무한강산이 발 아래 다투어 달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니 넓고 넓은 건곤(乾坤)이 가슴속으로 거두어 들어오니

  가람(伽藍)의 승경(勝景)이 이와같음은 없더라.


 

 부석사의 정점을 찍는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곡선과 비례, 장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기능에 충실한 구조만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 건물에 필요한 부재만으로 구성하고 군더더기를 배제한 필요미(必要美)는 한국건축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기둥은 밑에서 1/3 지점이 가장 불룩한 그리스의 엔타시스와 비슷한 배흘림 기둥으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며 지붕의 하중에 의해 건물 양끝이 벌어져 보이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기둥이 안쪽을 향해 약간씩 누워있는 안쏠림, 기둥이 같은 높이일 경우 양끝이 쳐져 보이기 때문에 모서리의 기둥이 가장 높고 가운데로 갈수록 기둥이 낮아지는 귀솟음 기법은 시각적인 불안정을 해소하고 눈의 착시 현상을 보완하기 위한 기법들이다.

 

 

 무량수전의 주불(主佛)은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서쪽에 위치한다. 동쪽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상은 가운데 위치해 남쪽을 바라보지만 이 곳에서는 서쪽에 위치해 동쪽을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참배자들은 진입로의 흐름에 따라 안양루에서 올라온 후 석등의 동쪽을 지나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동쪽에 있는 문으로 내부에 들어가면 좌우로 외부의 기둥보다 높고 굵은 기둥이 좌우로 줄지어 있고 가운데 흙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고려시대의 소조아미타여래(塑造阿彌陀如來) 불상이 앉아있어 종교적인 장엄성을 극대화시킨다. 이런 공간 구성은 서양 중세의 바실리카와 비슷한데 문화권을 떠나 유사하게 신성한 공간을 강조하는 방식인 것이다.

 천장은 막지 않고 지붕의 목구조(木構造)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장식이 없고 지붕의 구조만을 드러낸 구성방식은 꾸미지 않은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운 구조미(構造美)를 보여준다. 

 

 

 무조건 크기가 거대하다거나 모습이 화려하다고 좋은 건축이 아니다. 얼마나 기능에 충실하며 그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가, 주변 환경과 얼마나 조화가 되는가, 어떤 새롭고 풍부한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가, 여러 구성요소들이 모여 어떻게 풍부한 시각화를 이루는가 등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합쳐져서 훌륭한 건축이 만들어진다.

 또한 문화에 따라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이 다르며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자신의 좁은 시야와 주관적인 판단으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문화를 무조건 폄하한다는 것은 멍청하고 한심한 짓이다.

 건축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 한다. 그릇은 아름다운 무늬와 단단한 겉의 껍질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본질은 그 안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의 성격은 달라진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사용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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