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統治下の朝鮮半島から「内地」に渡った労働者が、勤務していた兵庫県内の造船所で受け取った給料袋などが見つかり、「産業遺産情報センター」(東京)が保管していた遺族から入手したことが16日、分かった。半島出身の労働者にも適切な報酬が支払われていたことを改めて示す一次資料を同センターが入手するのは初めてで、いわゆる「徴用工」問題を払拭する重要な証拠と位置づけている。
同センターが入手した給料袋などは、兵庫県相生市在住の元在日2世で令和元年に日本に帰化した清本清一さん(78)から託された。清本さんの父親が、相生市の播磨造船所に勤務していた昭和17年1月から終戦後の20年10月までに受け取った給料袋約40点をはじめ、当時書かれたメモや戦時中の造船所の労働者名簿など多数にのぼる。
清本さんの父親は大正6年、朝鮮半島南部の慶尚南道生まれ。自らの意志で昭和11年に渡航し、17年から播磨造船所で働き始めた。残された給料袋には、出勤工賃▽残業割増工賃▽夜勤手当▽精勤手当-などの賃金や、退職積立金▽国民貯金▽健康保険▽社宅▽年金保険-などの控除金の項目があり、手取り額は多い月で200円以上。20年当時のはがき1枚が5銭で現在1260倍の63円。単純計算だが、換算すると200円は約25万円になる。終戦を迎えた20年8月でも54円18銭が支払われ、同月に「徴用満期慰労金」も受け取っていたことがうかがえる。
清本さんは約50年前、転居のため自宅内を整理していた際、紙に包まれていた給料袋の束を発見。当時は存命だった父に資料の詳細について尋ねなかったが、韓国が「徴用工」を問題視した文在寅(ムンジェイン)政権となった頃からこの資料の価値を認識するようになった。
https://www.sankei.com/article/20230316-HF2KIMTFDVMPFJNEQPAUGYFNF4/
朝鮮人徴用工も朝鮮人慰安婦もちゃんと給料もらってた
일본 통치하의한반도로부터 「내지」에 건넌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던 효고현내의 조선소에서 받은 급료봉투등이 발견되어, 「산업 유산 정보 센터」(도쿄)이 보관하고 있던 유족으로부터 입수했던 것이 16일, 알았다.반도 출신의 노동자에게도 적절한 보수가 지불되고 있던 것을 재차 나타내 보이는 일차 자료를 동센터가 입수하는 것은 처음으로, 이른바 「징용공」문제를 불식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평가하고 있다.
동센터가 입수한 급료봉투 등은, 효고현 아이오이시 거주의원재일 2세로 령화원년에 일본에 귀화한키요모토 세이치씨(78)로부터 맡겨졌다.키요모토씨의 부친이, 아이오이시의 하리마 조선소에 근무하고 있었다쇼와 17년 1월부터 종전 후의 20년 10월까지 받은 급료대약 40점을 시작해 당시 쓰여진 메모나 전시중의 조선소의 노동자 명부 등 다수에 오른다.
키요모토씨의 부친은 타이쇼 6년, 한반도 남부의 경상남도 태생.스스로의 의지로 쇼와 11년에 도항해, 17년부터 하리마 조선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남겨진 급료봉투에는, 출근 공임▽잔업 할증 공임▽야근 수당▽정근 수당등의 임금이나, 퇴직 적립금▽국민 저금▽건강 보험▽사택▽연금 보험등의 공제금의 항목이 있어, 실수령액은 많은 달에 200엔 이상.20년 당시의 엽서 1매가 5전으로 현재 1260배의 63엔.단순 계산이지만, 환산하면 200엔은 약 25만엔이 된다.종전을 맞이한 20년 8월이라도 54엔 18전이 지불되어 같은 달에「징용 만기 위로금」도 받고 있던일이 방문한다.
키요모토씨는 약 50년전, 이사를 위해 자택내를 정리하고 있었을 때, 종이에 싸이고 있던 급료봉투의 다발을 발견.당시는 생존이었던 아버지에게 자료의 상세한 것에 대하여 묻지 않았지만, 한국이 「징용공」을 문제시한 문 재인(문제인) 정권이 되었을 무렵으로부터 이 자료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https://www.sankei.com/article/20230316-HF2KIMTFDVMPFJNEQPAUGYFNF4/
한국인 징용공도 한국인 위안부도 제대로 급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