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大規模山火事】火の粉が砲弾のように屋根に降り注いだ…一瞬にして村が戦場に
慶尚北道義城(ウィソン)で起きた山火事は5日間続き、安東(アンドン)、青松(チョンソン)、英陽(ヨンヤン)、盈徳(ヨンドク)まで慶尚北道北部圏をのみ込んだ。 26日、東海を眺める小さな海辺の村である慶尚北道盈徳郡盈徳邑石里(ヨンドクグン・ヨンドクウプ・ソクリ)は山火事の炎で崩れ落ちた。今月22日に慶尚北道義城市で発火したところから70キロメートルも離れた場所だ。急な絶壁に位置した家々はまるで爆撃を受けたようだった。屋根が燃えつくされ、ぺしゃんこになっていた。家の一部だったはずのプラスチックは溶け落ちていた。正体不明のものが干物のように縮まり、ぶら下がり、床に転がっていた。 海岸の絶壁の家々がタゲビ(フジツボ)に似ていることから「タゲビ村」と呼ばれるこの村の家々を一晩中真っ黒に燃えつくした炎は、避難できなかった高齢者の命を奪ってからも、執拗に熱気を吐き出していた。 盈徳邑梅亭1里(メジョン1リ)も廃墟と化した。村の住民3人が真っ黒に焼けた家のあちこちに水をまいていた。家主はそこにいなかった。残った火種が再び燃え広がるのではないかと不安になった人々が、村の入り口にある消防ホースを取り出した。前日の夜から途絶えた電気と水は同日正午頃になって復旧した。 この村の住民、ユン・ウェセンさん(78)は「(25日)夕方に日が暮れてから火がこっちに迫ってくるという村の放送を聞いて出てきたが、火の粉が飛び散って地面にころころと転がっていた」とし、「隣人の車に乗って避難してから、帰ってきてドアを開けてちらっと見たが、全部黒焦げになっていた。見るのが嫌になる」と語った。 この村の住民2人も命を失った。強風に乗って火の粉が砲弾のように家の上に落ちたという。前日に盈徳郡の住民たちの避難の行列が続いたという7番国道を遡る車は、白い煙に吸い込まれていくようだった。往復4車線道路の両側が真っ黒に焼け、あちこちに電線が切れて風に揺れていた。火の粉は依然として建物や山、工場のいたるところを燃やした。煙が立ち上って木を燃やす音が聞こえた。消防車はかなりの時間が経っても現れなかった。広範囲に広がった火の粉に比べて、人手が足りないためだ。 盈徳郡の全域では前日の午後9時頃から電気が、午後10時頃からは通信が途絶えた。郡は同日午前2時ごろ復旧したと発表したが、携帯電話の通話と無線インターネットは依然として不安定だ。慶尚北道青松郡巴川面地境里(チョンソングン・パチョンミョン・チギョンリ)に住むキム・ソナさん(40代)は、焼け落ちた家とビニールハウスを無言で眺めていた。キムさんは前日午後4時10分頃、約2〜3キロメートル離れた山に火が広がったのを見て、盈徳に避難した。まだ火が反対側の山にあって余裕があると思っていたが、それは思い違いだった。キムさんは「明らかに火はあちらの山にあったが、火がホコリのように舞い上がった」と語った。火は風に乗って村の近くに急速に広がった。車2台に分乗して6人家族が避難した直後、家が炎に包まれた。キムさんは「帰ってみると、水をはじめ何もかも足りない。まだ煙が出ているのに、どう収拾すればいいのか分からない」と語った。 避難所も安全ではなかった。当初避難所だった青松国民体育センター付近に火が広がり、住民たちは歩いて13分の距離の青松文化芸術会館に移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徳川3里(トクチョン3リ)の住民のソ・スンジャさん(69)は「避難所も危険だと言われ、夜に再び移動した。怖くてほとんど眠れなかった」と話した。 火の勢いが約5キロメートル前まで迫ってきた慶尚北道安東市豊川面(プンチョンミョン)の河回村(ハフェマウル)の住民たちも避難に乗り出した。「昨夜驚いて手ぶらで豊山にある孫娘のアパートに逃げた。19歳で初めてこの村に来てもうすぐ90歳になるのに、こんな大騒ぎは初めてだ」 河回村で会ったイ・スニョンさん(85)は、黒い乗用車の助手席に座って窓を少し下げたまま、荷物をまとめる娘を眺めながら言った。結婚後、河回村に来て初めて避難するというイさんは「何も持ってこなかったから、今日は少し必要なものだけ持っていこうと思ってさ。何も起こらなければよいけど…」と独り言のように言った。 ユ・ヒオクさん(85)は「家財道具を一つでも多く持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まだここにいるだけで、火の手が回ってきたら避難する」とし、「ここで生まれて一生を生きてきたが、本当にこんなことは想像もできなかった」と語った。 英陽郡に広がった山火事から逃れて英陽郡民会館に避難したPさん(80、立岩面)は「100メートルほど離れた山に真っ赤な火が燃え上がっていたし、風も強く吹いていて、すぐにでも私の家まで火の手が回ってきそうだったので、すぐさまここに来た」と語った。花梅里(ファメリ)の家が全焼したというある住民は涙を流していた。
【한국 대규모 산불】불똥이 포탄과 같이 지붕에 쏟아진
한순간에 마을이 전장에
경상북도의성(위손) 에서 일어난 산불은 5일간 계속 되어, 안도(안돈), 세이쇼우(정 손), 영양(욘 얀), 영덕(욘드크)까지 경상북도 북부권을 삼켰다. 26일, 토카이를 바라보는 작은 해변의 마을인 경상북도 영덕군영덕읍석 마을(욘드크군·욘드크우프·소크리)은 산불의 불길로 붕괴되었다.이번 달 22일에 경상북도도리 죠오이치로 발화했는데로부터 70킬로미터나 멀어진 장소다.갑작스러운 절벽에 위치한 집들은 마치 폭격을 받는 것 같았다.지붕이 불타 개풀, 사응 오가 되어 있었다.집의 일부였다는 두의 플라스틱은 산화라고 있었다.정체 불명의 것이 건어물과 같이 줄어들어, 매달려, 마루에 널려 있었다. 해안의 절벽의 집들이 타게비(후지 단지)를 닮아 있는 것부터 「타게비마을」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의 집들을 밤새 새까맣게 다 불탄 불길은, 피난할 수 없었던 고령자의 생명을 빼앗고 나서도, 집요하게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영덕읍매정 1리(메젼 1리)나 폐허화했다.마을의 주민 3명이 새까맣게 탄 집의 여기저기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집주인은 거기에 없었다.남은 불씨가 다시 불타 퍼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게 된 사람들이, 마을의 입구에 있는 소방 호스를 꺼냈다.전날의 밤부터 끊어진 전기와 물은 동일 정오무렵이 되어 복구했다. 이 마을의 주민, 윤·웨센씨(78)는 「(25일) 저녁에 해가 지고 나서 불이 여기에 강요해 온다고 하는 마을의 방송을 (들)물어 나왔지만, 불똥이 흩날려 지면에 대굴대굴 널려 있었다」라고 해, 「이웃의 차를 타 피난하고 나서, 돌아오고 도어를 열어 힐끗 보았지만, 전부흑 타가 되어 있었다.보는 것이 싫어진다」라고 말했다. 이 마을의 주민 2명이나 생명을 잃었다.강풍을 타 불똥이 포탄과 같이 집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전날에 영덕군의 주민들의 피난의 행렬이 계속 되었다고 하는 7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차는, 흰 연기에 빨려 들여가는 것 같았다.왕복 4 차선 도로의 양측이 새까맣게 타 여기저기에 전선이 끊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불똥은 여전히 건물이나 산, 공장의 도처에를 태웠다.연기가 솟아오르고 나무를 태우는 소리가 들렸다.소방차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광범위하게 퍼진 불똥에 비해,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덕군의 전역에서는 전날의 오후 9 시경부터 전기가, 오후 10 시경부터는 통신이 끊어졌다.군은 동일 오전 2시경 복구했다고 발표했지만, 휴대 전화의 통화와 무선 인터넷은 여전히 불안정하다.경상북도 청송군 도모에가와면지경마을(톨송·파톨몰·치골리)에 사는 김·소나씨(40대)는, 불타서 내려앉은 집과 비닐 하우스를 무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김씨는 전날 오후 4시 10분 무렵,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산에 불이 퍼진 것을 보고, 영덕에 피난했다.아직 불이 반대측의 산에 있어 여유가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김씨는 「분명하게 불은 저쪽의 산에 있었지만, 불이 먼지(자랑)과 같이 들떴다」라고 말했다.불은 바람을 타 마을의 근처에 급속히 퍼졌다.차 2대에 분승해 6 인가족이 피난한 직후, 집이 불길에 싸였다.김씨는 「돌아가 보면, 물을 시작해 모두 부족하다.아직 연기가 나와 있는데, 어떻게 수습하면 좋은 것인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피난소도 안전하지 않았다.당초 피난소였던 세이쇼우 국민 체육 센터 부근에 불이 퍼져, 주민들은 걸어 13 분의 거리의 세이쇼우 문화 예술 회관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토쿠가와3리(트크톨 3리)의 주민의 소·슨쟈씨(69)는 「피난소도 위험하다고 말해져 밤에 다시 이동했다.무서워 거의 잘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불의 기세가 약 5킬로미터전까지 다가온 경상북도 안동시 토요카와면(푼톨몰)의 하회촌(하페마울)의 주민들도 피난에 나섰다.「어젯밤 놀라 맨손으로 토요야마에 있는 손녀의 아파트에 도망쳤다.19세에 처음으로 이 마을에 와 곧 있으면 90세가 되는데, 이런 큰소란은 처음이다」 하회촌에서 만난 이·스놀씨(85)는, 검은 승용차의 조수석에 앉아 창을 조금 내린 채로, 짐을 정리하는 딸(아가씨)를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 후, 하회촌에 오고 처음으로 피난한다고 하는 이씨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조금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려고 해.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은데 」라고 혼잣말과 같이 말했다. 유·히오크씨(85)는 「가재도구를 하나에서도 많이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직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 불길이 돌아 오면 피난한다」라고 해, 「여기서 태어나고 일생을 살아 왔지만, 정말로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영양군에 퍼진 산불로부터 피해 영양군 민회관에 피난한 P씨(80, 타치와면)는 「100미터 정도 멀어진 산에 새빨간 불이 타올라 해, 바람도 강하게 불고 있고, 당장이라도 나의 집까지 불길이 돌아 나무 그랬기 때문에, 곧 바로 여기에 왔다」라고 말했다.꽃우메사토(파메리)의 집이 전소했다고 하는 있다 주민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