マオを “啓蒙君主”だと崇拜した.. 紅衛兵たちが呼んだ破滅
[ソングゼユンの悲しい中国]
ソングゼユンカナダメックメストデ教授
入力 2020.10.03. 08:59
アップデート 2020.11.06. 16:39
<“マオズソックは世界人民の腹中一番赤くて赤い洪太陽!” グァンゾウ美術塾革命委員会, 1969年宣伝画>
ソングゼユンの悲しい中国: 文化革命話 <25>
2020年すぐ今日も全体主義爆圧政権の世襲前提君主を “啓蒙君主”だとほめたたえるアナクロニズム的 `知識分子`が残っている. 20世紀人類はスターリン, ヒトラー, 毛沢東, 金日成, ポールフォトなどの全体主義政権を経験した. これら全体主義政権は共通的に人権染躪, 人格崇拜, 思想統制, 言論検閲, 国家テロリズムの様相を見せた. これに付け加えて政治哲人漢拏アレント(Hannah Arendt, 1906-1975)は 2次大戦直後 “全体主義の起源”を明らかにしながらスターリンとヒトラーの生命はすぐ熱狂的な群衆(masses)の支持と分析した.
20世紀全体主義政権の独裁者ヒトラー, スターリン, 毛沢東. 人格崇拜とテロ政治に点綴された人々の統治は 18世紀啓蒙主義の合理性をおちゃらかす反(反)理性の極致だった. / 公共部門
全体主義政権の詭弁論者
毛沢東の全体主義も熱狂的な群衆の支持の上で実現した. 文革初期中央文革塑造のワングリ(王力, 1921-1996), グァンポング(関鋒, 1919-2005), チボンウィ(戚本禹, 1931-2016) など 3台筆諌者(筆杆子, 注ぐよ, 文人)だと呼ばれた極左の `知識分子`たちは毛沢東が人民を啓蒙して領導する “不世出の霊妙な受領”とほめたたえた. 権力の正当性をわずか一個人の “英雄的な” カリスマで捜す不始末な論弁だ.
正常な文明社会でそんな沒常識な詭弁を説破する `知識分子`は社会的売場を兔れることができない側だが, 1960年代中国ではその不始末な論弁が魔術的な集団催眠の效果を発揮した. マオを絶対の “啓蒙君主”で崇拜する群衆の光熱は人類普遍の価値を破壊して家族倫理を解体する破滅的結果をもたらした. 自分の母親を反革命分子で告発して銃殺させた一紅衛兵の懺悔が当時の状況を雄弁する.
“万物は太陽に頼って生長する!” 1970年代初盤, シェズがオ(謝志高)とフゾンウィ(胡振宇)の作品. 上海人民出版社. 毛沢東を太陽に比喩する文革時代の人格崇拜は金日成を太陽で担ぐ北朝鮮の人格崇拜でそのまま踏襲される. / chineseposters.net
毛沢東の意を奉ずる紅衛兵たち
1966年 8月 18日スングビンビンはティエンアンモン城樓で最高指導者毛沢東の左側ウィパルに紅衛兵首長をつけてくれる光栄を享受した. 当時ぶり 17歳のスングビンビンは北京師範大学部属女子中紅衛兵組職の副主席だった. スングビンビンは中国人民解放軍の将軍出身で 1980-90年代 8代元老中一人に数えられたスングランチウング(宋任窮, 1909-2005)の娘だった. ソングビンビンが全国紅衛兵の代表になって “百万群衆” 前で毛沢東に紅衛兵の首長をつけることができたところは中国共産党内部の “市(関係)”が作用した.
すぐ翌日 (1966. 8.19.) 北京の `人民日報`は第1面に紅衛兵の首長をつけた毛沢東の写真とともにティエンアンモン広場の百万群衆集会を特筆大書した. 全国に雨後の竹の子でちょうどできた紅衛兵組職の構成員は直接紅衛兵首長をしている毛沢東の写真を見る瞬間感動のるつぼに吸い込まれた. 最高指導者マオズソックが直接幼い紅衛兵たちを向けてまさに彼らが革命の主体なのを確認させてくれたからだった.
1966年 8月 19日付け “人民日報” 第1面 (左側). スングヤオウと言う(のは)名前で載せられたスングビンビンのコラム(右側)
1966. 8月 21日付け `人民日報`にはその日城樓に上がって毛沢東の腕に首長をつけてくれたスングビンビンのコラム “私がマオズソックに首長をつけて上げた”が載せられたが, 本名代わりにスングヤオウ(宋要武)と言う(のは)新しい名前をかけていた. 去る回言及したようにすぐその日毛沢東はスングビンビンに名前を問ってからは “八尾牛馬(要武, 無価必要なの)”という意味深長な言葉を残した. スングビンビンがマオの意味を受けてスングヤオウに改名したという事実は全国の紅衛兵の心臓に今一度火をつけるきっかけだった.
お母さんを “反革命分子”で告発してたまらないようにした紅衛兵
当時安微省口伝(固鎭)現で小学校をちょうど卒業した 12歳の一少年は “スングヤオウ”の革命精神に大きい刺激を受けた. 少年は直ちに本名を捨ててザングホングビング(張紅兵)に改名した. 赤い兵丁になるという意志の表現だった.
それから 3年 6ヶ月後, 1970年 2月 13日夜, 16歳の紅衛兵ザングホングビングは母親パングズングモ(方忠謀, 1926-1970)を `反革命罪`路告発した. ゴッバで武装した軍人たちが群がって来て母親をトラックに荷物のように積んで行ってしまった. 以後ザングホングビングは群衆の振るにまじて人民法廷のジャッジが母親の判決をソンドック(宣読)する瞬間を目撃した. “死刑に処する! 直ちに執行!” 2ヶ月がまだならなくて母親は刑場の露で消えた. 享年 44歳.
2016年 5月 31日文革勃発 50周年を迎え中国の鳳凰衛星放送(鳳凰衛星視) “冷たくて暖かい人生(冷暖人生)”に出演してお母さんを死で追い払った罪を懺悔するザングホングビングシ
少年の母親パングズングモウは 1949年解放以前看護病で人民解放軍に参加した. 基礎保健知識だけ持って医療現場に投入されたいわゆる “素足の意思(赤脚医生)”だった. 1965年には口伝県病院の問診(問津)部祝義なのを歴任したが, 文革が始まろうすぐご主人が走者派で追われてビト(批闘)あいながら全家は苦難の級水勢に包まれた. 1968年 5月から始まった青里階級隊伍(清理階級隊伍, 1968-1969) 運動はよく “3千万を打撃を受けて最小 50万で最大 150のみを虐殺した”と言う最悪の全体主義的テロだった. その時期パングズングモウは “特務(特務, 特殊スパイ)”疑いの地主分子で追われて拘禁状態で日々に問招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950年代初彼女の父親が地主階級で分類されて首切りされたという理由だった.
1970年 2月 13日, ザングホングビングは母親の古い手帳に書かれた “貴い者が一番遇鈍で, 卑賎な者が一番聡明だ”は上り口を見つけた. この文具はその頃毛沢東が直接引用して広く膾炙されたが, ザングホングビングは母親に叫んだ. “パングズングモウ! 私たちの偉い指導者ではないです柱石を捐下しようとすることか?” 激怒した母親はリュシャオチは無罪だと主張して激しく毛沢東の人格崇拜を批判した. ご主人と息子が反革命行為と言いながら恐ろしく責めつけると彼女は毛沢東の肖像画まで持って来ては燃やしてしまった.
もう帰って来ることができない川を渡った後, 彼女は生まれて初めて煙草をくわえてごしごしと立てたと言う. ザングホングビングの父親は申告をすると飛び出した. もしや父親が心が弱くなって届けることができないか憂慮したザングホングビングはその晩直接母親の反逆行為を告発した. 遠い歳月が経っては弁護士になったザングホングビングは文革当時革命の光熱に包まれて自ら洗うことができない重罪(重罪)をやらかしたことを悟って泣きわめいた.
当時ザングホングビングの両親皆反動分子の疑いを着せられて受難を経験していたのに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 文革が高まりながら地主や富農家出身の紅衛兵たちはもっと過激な闘いの様相を見せた. 成分(成分)の弱点を補うために彼らはもっと極端的行動を取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当時状況で親母を反革命分子で告発する行為は革命性を表出する極端の措置だった. 出身成分を取り返ししようとする一少年の悽絶な遊泳術だった.
紅衛兵集団の内紛に関してはこれからだんだん上述する事にして, 一応文革時代中国で広く流行った革命歌曲の家事をドエジブオボザ.
ハヌルタングが大きいと言っても
だ(党)の恩恵のように大きくないでしょう
両親親が近いと言っても
マオズソックのように近い戍ないでしょう!
毛沢東思想は革命の財宝
誰でも彼を反対すれば私たちの敵!
毛沢東は “大元帥スターリン”を引き継いで地上で共産主義を実現する全人類の絶対 “啓蒙君主”になるように念願したが, 人格崇拜とテロ政治を日常化した彼の統治は反(反)啓蒙の極致だった. まして全体主義世襲前制定の残酷なポックグンイムエリャ.
<引き続き>
※ 筆者ソングゼユン(51) カナダメックメストデ教授は最近 `悲しい中国: 人民民主独裁 1948-1964`(鵲)を出刊した. 中国チェ・ヒョンせりふを扱った 3部作 “悲しい中国” シリーズの第 1冊だ. 今度連載する `文化革命話`は 2冊にあたる. ソング教授は学術書籍外に国籍と個人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扱った英文小説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の著者でもある.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0/10/03/7IHEAW7JYBFAHFW77BRJ24MH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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恐ろしい. やはり歴史は繰り返される.
마오를 "계몽군주"라 숭배했던.. 홍위병들이 부른 파멸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0.10.03. 08:59
업데이트 2020.11.06. 16:39
<“마오주석은 세계 인민의 마음속 가장 붉고도 붉은 홍태양!” 광저우 미술학원 혁명위원회, 1969년 선전화>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5>
2020년 바로 오늘날도 전체주의 폭압정권의 세습전제군주를 “계몽군주”라 칭송하는 시대착오적 `지식분자`가 남아 있다. 20세기 인류는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김일성, 폴 포트 등의 전체주의 정권을 경험했다. 이들 전체주의 정권은 공통적으로 인권유린, 인격숭배, 사상통제, 언론검열, 국가 테러리즘의 양상을 보였다. 이에 덧붙여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2차 대전 직후 “전체주의의 기원”을 밝히면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생명은 바로 열광적인 군중(masses)의 지지라고 분석했다.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로 점철된 이들의 통치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합리성을 조롱하는 반(反)이성의 극치였다. / 공공부문
전체주의 정권의 궤변론자들
마오쩌둥의 전체주의 역시 열광적인 군중의 지지 위에서 실현됐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1-1996), 관펑(關鋒, 1919-2005), 치번위(戚本禹, 1931-2016) 등 3대 필간자(筆杆子, 붓대, 문인)라 불리던 극좌의 `지식분자`들은 마오쩌둥이 인민을 계몽하고 영도하는 “불세출의 영묘한 수령”이라 칭송했다. 권력의 정당성을 고작 한 개인의 “영웅적인” 카리스마에서 찾는 허술한 논변이다.
정상적인 문명사회에서 그런 몰상식한 궤변을 설파하는 `지식분자`는 사회적 매장을 면할 수 없을 테지만, 1960년대 중국에선 그 허술한 논변이 마술적인 집단최면의 효과를 발휘했다. 마오를 절대의 “계몽군주”로 숭배하는 군중의 광열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파괴하고 가족윤리를 해체하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의 모친을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총살시킨 한 홍위병의 참회가 당시의 상황을 웅변한다.
“만물은 태양에 의지해서 생장한다!” 1970년대 초반, 셰즈가오(謝志高)와 후전위(胡振宇)의 작품. 상하이인민출판사. 마오쩌둥을 태양에 비유하는 문혁 시절의 인격숭배는 김일성을 태양으로 떠받드는 북한의 인격숭배에서 그대로 답습된다. / chineseposters.net
마오쩌둥의 뜻을 받드는 홍위병들
1966년 8월 18일 쑹빈빈은 톈안먼 성루에서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왼쪽 위팔에 홍위병 수장을 달아주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만 17세의 쑹빈빈은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 여중 홍위병 조직의 부주석이었다. 쑹빈빈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군 출신으로 1980-90년대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쑹런치웅(宋任窮, 1909-2005)의 딸이었다. 쏭빈빈이 전국 홍위병의 대표가 되어 “백만 군중” 앞에서 마오쩌둥에 홍위병의 수장을 달 수 있었던 데는 중국공산당 내부의 “꽌시(關係)”가 작용했다.
바로 다음 날 (1966. 8.19.) 베이징의 `인민일보`는 제1면에 홍위병의 수장을 단 마오쩌둥의 사진과 함께 톈안먼 광장의 백만군중 집회를 대서특필했다.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막 생겨나던 홍위병 조직의 성원들은 직접 홍위병 수장을 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감동의 도가니에 빨려들었다. 최고영도자 마오주석이 직접 어린 홍위병들을 향해 바로 그들이 혁명의 주체임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이었다.
1966년 8월 19일자 “인민일보” 제1면 (왼쪽). 쑹야오우란 이름으로 게재된 쑹빈빈의 칼럼(오른쪽)
1966. 8월 21일 자 `인민일보`에는 그날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의 팔에 수장을 달아 준 쑹빈빈의 칼럼 “내가 마오주석께 수장을 달아드렸다”가 게재됐는데, 본명 대신 쑹야오우(宋要武)란 새 이름을 걸고 있었다. 지난 회 언급했듯 바로 그날 마오쩌둥은 쑹빈빈에게 이름을 묻고는 “야오우마(要武嘛, 무가 필요하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쑹빈빈이 마오의 뜻을 받아 쑹야오우로 개명했다는 사실은 전국의 홍위병의 심장에 다시금 불을 지르는 계기였다.
어머니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죽게한 홍위병
당시 안후이성 구전(固鎭)현에서 소학교를 막 졸업한 12세의 한 소년은 “쑹야오우”의 혁명정신에 큰 자극을 받았다. 소년은 즉시 본명을 버리고 장홍빙(張紅兵)으로 개명했다. 붉은 병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 1970년 2월 13일 밤, 16세의 홍위병 장홍빙은 모친 팡중모(方忠謀, 1926-1970)를 `반혁명죄`로 고발했다. 곧바로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와 모친을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가버렸다. 이후 장홍빙은 군중의 틈에 섞여 인민법정의 재판관이 모친의 판결을 선독(宣讀)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사형에 처한다! 즉각 집행!” 두 달이 채 못돼 모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44세.
2016년 5월 31일 문혁 발발 50주년을 맞아 중국의 봉황위성방송(鳳凰衛星視) “차갑고도 따뜻한 인생(冷暖人生)”에 출연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죄를 참회하는 장홍빙씨
소년의 모친 팡중머우는 1949년 해방 이전 간호병으로 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기초 보건지식만 갖고 의료현장에 투입됐던 이른바 “맨발의 의사(赤脚醫生)”였다. 1965년엔 구전현 병원의 문진(問津)부 부주임을 역임했는데, 문혁이 시작되자 곧 남편이 주자파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면서 온 집안은 고난의 급물살에 휩싸였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1968-1969) 운동은 흔히 “3천 만을 타격하고 최소 50만에서 최대 150만을 학살했다”는 최악의 전체주의적 테러였다. 그 시기 팡중머우는 “특무(特務, 특수간첩)”혐의의 지주분자로 몰려 구금 상태에서 날마다 문초당해야만 했다. 1950년대 초 그녀의 부친이 지주계급으로 분류돼 숙청됐다는 이유였다.
1970년 2월 13일, 장홍빙은 모친의 낡은 수첩에 적힌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는 어귀를 발견했다. 이 문구는 그 당시 마오쩌둥이 직접 인용해서 널리 회자됐었는데, 장홍빙은 모친에게 소리쳤다. “팡중머우!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 주석을 폄하하려는 건가?” 격분한 모친은 류샤오치는 무죄라 주장하며 격렬하게 마오쩌둥의 인격숭배를 비판했다. 남편과 아들이 반혁명행위라며 무섭게 질책하자 그녀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까지 들고 와선 불태워버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 그녀는 난생처음 담배를 물고 뻑뻑 피웠다고 한다. 장홍빙의 부친은 신고를 한다며 뛰쳐나갔다. 혹시나 부친이 마음이 약해져서 신고하지 못할까 우려했던 장홍빙은 그날 밤 직접 모친의 반역행위를 고발했다. 먼 세월이 지나서야 변호사가 된 장홍빙은 문혁 당시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스스로 씻지 못할 중죄(重罪)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통곡했다.
당시 장홍빙의 양친 모두 반동분자의 혐의를 쓰고 수난을 겪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혁이 고조되면서 지주나 부농 집안 출신의 홍위병들은 더더욱 과격한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성분(成分)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 극단적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당시 상황에서 친모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하는 행위는 혁명성을 표출하는 극단의 조치였다. 출신 성분을 만회하려는 한 소년의 처절한 처세술이었다.
홍위병 집단의 내분에 관해선 앞으로 차차 상술하기로 하고, 일단 문혁 시대 중국에서 널리 유행했던 혁명가곡의 가사를 되짚어보자.
하늘땅이 크다 해도
당(黨)의 은혜처럼 크지 못하지
양친부모가 가깝다 해도
마오주석처럼 가까울 순 없지!
마오쩌둥 사상은 혁명의 보배
누구든 그를 반대하면 우리들의 적!
마오쩌둥은 “대원수 스탈린”을 이어서 지상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전 인류의 절대 “계몽군주”가 되길 염원했지만,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를 일상화한 그의 통치는 반(反)계몽의 극치였다. 하물며 전체주의 세습전제정의 잔악무도한 폭군임에랴.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0/10/03/7IHEAW7JYBFAHFW77BRJ24MH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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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역시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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