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bella Bird Bishop - Korea and Her Neighbours
「正確に言えば韓国に道路は存在しない。旅人が馬または徒歩で進むペースはいずれの場合も一時間に三マイルで、道はとにかく悪い。
道といっても獣や人間の通行でどうやら識別可能な程度についていた通路にすぎない。しかも深いぬかるみを避けて歩くしかなく、ぬかるみは殆ど底なしである。
麻浦近くではなにもかも砂地を渡らなければならない。下肥を郊外へ運ぶ荷牛を満載した渡し船に出会いながら漢江を渡り、荒れて勾配がきつく、汚くてぬるぬるした河岸に降りると、そこからすぐに、狭くて不潔でぬかるんで、でこぼこした麻浦の通りに入った。
橋のかかっていない川も多く、橋の大半は通行部分が木の小枝と芝土だけでできており、7月初めの雨で流されてしまう。道の酷さが朝鮮の発展の大きな障害の一つになっている。
Claude Charles Dallet -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商取引におけるもう一つの障害は、交通路のみじめな状態である。航行可能な河川は非常に少なく、ただ幾つかの河川だけが船を通すが、それも制限された区域の航行が許されているだけである。
一方、この国は、山岳や峡谷が多いのに、道路を作る技術はほとんど知られていない。したがって、ほとんどすべての運搬が、牛か馬、もしくは人の背によって行われている。
橋について私は、二種類のものを知っています。一つは、小川の所どころに大きな石を投げ込んで作ったものです。これがもっとも一般的なものです。もうひとつの種類は、川に杭を打ちこんで作ったものです。これは、上に板のようなものをかぶせて土でおおってあり、しばしば穴があいているが、それでもいちおう橋の形をしています。夏にはよくあることですが、水かさが増すと、川の氾濫によって、すべての橋は流されるか水に漬かるかしてしまいます。そして、これがまた、旅人に途中で水浴びをする楽しみになるのです。
朝鮮全土に道路網が張り巡らされた
『総督府年報 1941』「第12章 土木」の「第1節 土木行政の遠隔」および「第2節 道路改修」
大正4年(1915年)道路規則を制定し、道路を一等(有効幅7メートル以上)・二等(有効幅5.5メートル以上)・三等(有効幅4メートル以上)・等外の四種として、朝鮮全土に亘る道路網を確定した。その後20年が経過して、時勢に順応出来なくなったので、1938年12月に朝鮮道路令を制定し、路線の認定・管理・付近地の制限及費用負担を定めて、道路行政の根本を確立した。そして道路を国道・地方道・府道・邑道の4種に分け、国道は朝鮮総督府、地方道は道知事、府道は府長などの管理(保全・補修などと費用負担を含む)と定めた。
1939年末現在に於いて、国道は92路線で延長1万2274キロメートルであり、全朝鮮の主要道路を形成した。地方道は650路線で1万8375キロメートルになった。費用は総督府の予算が組まれて、支払われた。
1910年から1939年までの29年間に道路の改善・修理と建設が行われ、全朝鮮に総延長3万キロメートルが構築された。
大韓帝国時代まで、朝鮮には人工道路は存在しなかった。高宗が1896年ロシア公使館に被信した後、1年間隠れていた「亜関派天」事件があった。 1897年に徳寿宮に転居した後、高宗が最初にしたことの一つは、乙未死変の時に死亡した閔妃の葬儀を盛大に行なうことだった。ところが、閔妃の国葬を準備する過程で大きな道路がないという問題に直面した。これにより、今日「太平路」と名付けられた道路が、閔妃葬儀のために初めて人工的に作られた。
前まで、朝鮮から人工道路が作られた例は無かった。ほとんどの道は人や馬車がようやく通行できる曲がりくねった自然状態の道だった。日本の情報院らが本国政府に送った報告書によると、「川や開川に会う場合、船舶がないところでは人々は裸で服を頭に縛って泳いで渡ったり、貨物を肩や背中に運んだ」と書かれている。
このような状況を改善するために、日本は1905年に通関部が設置した後、道路建設が緊急に行われた。 1907年から1911年まで、20の新式道路路線総延長804㎞が新たに改築された。つまり、朝鮮の人工道路は日本の支配下で初めて本格的に建設され始めたという意味だ。
日韓合同後、朝鮮総督府は道路建設を更に大々的に推進していく。第1期施行事業(1911年~1917年)の間には工事費1千万ウォンをかけて幹線道路で36路線、計2,690キロを改築した。この時期に朝鮮史上初めて漢江に橋を置き、それまで首都ソウル漢江には橋が一つもなかった。この事業により、全国道路の41%が自動車通行が可能な新作路に変わった。
第2期施行事業(1917年~1922年)では工事費3,159万ウォンをかけて幹線道路で26路線、計2,308kmを新たに建設した。この時、主要河川に9つの橋を建てた。 1931年満州事変以降は、北朝鮮地域を中心に開発計画を立て、15年間で828万円を投資し、12路線、総1,028kmの道路を新たに建設した。現在、私たちが「道路」と呼ぶほとんどの道路は、すべて日本が建設したことを意味する。
1930年代末まで、朝鮮の近代的な道路は合計23,679キロに達した。これは1911年に比べてなんと29.5倍増加した。この時期に、単に人々が通っていた小道が車が通ることができる近代的な道路に全て変貌した。
このような道路建設に必要な資金として、朝鮮総督府は、朝鮮から出てくる税収では道路、鉄道、上下水道、税関、都市計画など大規模な投資事業を施行することは出来ないとして国債を発行、この国債を買うことができるのは日本政府だけだった。つまり、日本政府はこの国債を買い取り総督府に資金を提供し、このお金で朝鮮の道路、鉄道、発電所、港湾などを建設した。
したがって、朝鮮の近代化のための資金は全て日本政府の資金で調達された。これに対し産経新聞の記者黒田氏は「正直、日本は朝鮮にだまされた」と指摘しました。彼は「空き缶のような国を日本にしばらく任せて日本が自国の税金を投入して朝鮮に鉄道と道路を建設したが、解放後韓国は直ぐに米国に擦り寄って日本に全て奪われたと進言し、米軍政は日本民間人財産を差し押さえ、韓国政府に全て引き渡した。それで日本は一体何をしたのか?私たちはだまされた」と本に書いたことがある。
Isabella Bird Bishop - Korea and Her Neighbours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에 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여행자가 말 또는 도보로 진행되는 페이스는 어느 경우도 1시간에 3마일로, 길은 어쨌든 나쁘다.
길이라고 해도 짐승이나 인간의 통행으로 아무래도 식별 가능할 수록 때에 붙어 있던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게다가 깊은 진창을 피해 걸을 수 밖에 없고, 진창은 대부분 바닥 없이 있다.
마포 근처에서는 모두 모래땅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밑거름을 교외에 옮기는 하우를 가득한 나룻배를 만나면서 한강을 건너, 거칠어져 구배가 힘들고, 더러워 미끈미끈 한 하안에 내리면, 거기로부터 곧바로, 좁고 불결하고 질퍽거리기 때문에, 울퉁불퉁 한 마포대로에 들어갔다.
다리가 걸리지 않은 강도 많아, 다리의 대부분은 통행 부분이 나무의 작은 가지와 잔디흙에서만 되어 있어, 7 월초의 비로 흘러가 버린다.길의 가혹함이 조선의 발전의 큰 장해의 하나가 되어 있다.
Claude Charles Dallet -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상거래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장해는, 교통로만 글자째인 상태이다.항행 가능한 하천은 매우 적고, 단지 몇개의 하천만이 배를 통하지만, 그것도 제한된 구역의 항행이 용서되고 있는 것만으로 있다.
한편, 이 나라는, 산악이나 협곡이 많은데, 도로를 만드는 기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따라서, 거의 모든 운반이, 소나 말, 혹은 사람의 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
다리에 도착해 나는, 2종류의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나는, 오가와의 군데군데에 큰 돌을 던져 만든 것입니다.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입니다.또 하나의 종류는, 강에 말뚝을 박아 넣어 만든 것입니다.이것은, 위에 판과 같은 것을 씌우고 흙에서 감싸 있어, 자주 구멍이 나 있지만, 그런데도 일단 다리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여름에는 자주(잘) 있다 일입니다만, 수량이 늘어나면, 강의 범람에 의해서, 모든 다리는 흘러갈까 물에 익을까 해 버립니다.그리고, 이것이 또, 여행자에게 도중에 수영을 하는 기다려지게 됩니다.
「총독부 연보 1941」 「 제12장 토목」의 「 제1절 토목 행정의 원격」 및 「 제2절 도로 개수」
타이쇼 4년(1915년) 도로 규칙을 제정해, 도로를 일등(유효폭 7미터 이상)·2등 (유효폭 5.5미터 이상)·삼등(유효폭 4미터 이상)·등외의 4종으로서 조선 전 국토에 긍도로망을 확정했다.그 앞으로 20년이 경과하고, 시세에 순응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1938년 12월에 조선 도로령을 제정해, 노선의 인정·관리·부근지의 제한급비용 부담을 정하고, 도로 행정의 근본을 확립했다.그리고 도로를 국도·지방도·부도·읍도의 4종으로 나누어 국도는 조선 총독부, 지방도는 도지사, 부도는 부장등의 관리(보전·보수등과 비용 부담을 포함한다)라고 정했다.
1939년말 현재에 있어서, 국도는 92 노선으로 연장 1만 2274킬로미터이며, 전조선의 주요 도로를 형성했다.지방도는 650 노선으로 1만 8375킬로미터가 되었다.비용은 총독부의 예산이 짜여지고, 지불되었다.
1910년부터 1939년까지의 29년간에 도로의 개선·수리와 건설을 해 전조선에 총연장 3만 킬로미터가 구축되었다.
대한제국 시대까지, 조선에는 인공 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 한 후, 1년간 숨어 있던 「아관파 하늘」사건이 있었다. 1897년에 덕수궁에 이사한 후, 고종이 최초로 한 것의 하나는, 을미사변때에 사망한 민비의 장의를 성대하게 행하는 것이었다.그런데 , 민비의 국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도로가 없다고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이것에 의해, 오늘 「태평로」라고 이름이 붙여진 도로가, 민비 장의를 위해서 처음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전까지, 조선으로부터 인공 도로가 만들어진 예는 없었다.대부분의 길은 사람이나 마차가 간신히 통행 할 수 있는 구부러진 자연 상태의 길이었다.일본의 정보원등이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강이나 개천을 만나는 경우, 선박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알몸으로 옷을 머리에 묶어 헤엄쳐 건너거나 화물을 어깨나 등에 옮겼다」라고 쓰여져 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일본은 1905년에 통관부가 설치한 후, 도로 건설이 긴급하게 행해졌다.1907해부터 1911년까지, 20의 신식 도로 노선총연장 804가 새롭게 개축되었다.즉, 조선의 인공 도로는 일본의 지배하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하는 의미다.
일한 합동 후, 조선 총독부는 도로 건설을 더욱 대대적으로 추진해 간다.제1기 시행 사업(1911년 1917년)의 사이에는 공사비 1 천만원을 들여 간선도로로 36 노선, 합계 2,690킬로를 개축했다.이 시기에 조선 사상최초째라고 한강에 다리를 두어, 그것까지 수도 서울 한강에는 다리가 하나도 없었다.이 사업에 의해, 전국 도로의 41%가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신작로로 바뀌었다.
제2기 시행 사업(1917년 1922년)에서는 공사비 3,159만원을 들여 간선도로로 26 노선, 합계 2,308 km를 새롭게 건설했다.이 때, 주요 하천에 9개의 다리를 세웠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는,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 계획을 세워 15년간에 828만엔을 투자해, 12 노선, 총 1,028 km의 도로를 새롭게 건설했다.현재, 우리가 「도로」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도로는, 모두 일본이 건설한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말까지, 조선의 근대적인 도로는 합계 23,679킬로에 이르렀다.이것은 1911년에 비해 무려 29.5배증가 했다.이 시기에, 단지 사람들이 다니고 있던 샛길이 차가 통과할 수 있는 근대적인 도로에 모두 변모했다.
이러한 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으로서 조선 총독부는, 조선에서 나오는 세수입에서는 도로, 철도, 상하수도, 세관, 도시계획 등 대규모 투자 사업을 시행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해 국채를 발행, 이 국채를 살 수 있는 것은 일본 정부만이었다.즉, 일본 정부는 이 국채를 매입해 총독부에 자금을 제공해, 이 돈으로 조선의 도로, 철도, 발전소, 항만등을 건설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자금은 모두 일본 정부의 자금으로 조달되었다.이것에 대해 산케이신문의 기자 쿠로다씨는 「쇼지키, 일본은 조선에 속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그는 「빈 깡통과 같은 나라를 일본으로 해 장미구 맡겨 일본이 자국의 세금을 투입해 조선에 철도와 도로를 건설했지만, 해방 후 한국은 곧바로 미국에 바짝 다가와라는 일본에 모두 빼앗겼다고 진언 해, 미군정은 일본 민간인 재산을 압류해 한국 정부에 모두 인도했다.그래서 일본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우리는 속았다」라고 책에 썼던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