彩旗中年譜
生まれ 1873.10.7‾ 死亡 1921.7.9
1873 10月 7日慶北常住で生まれ.
1913 風紀でユ・チャンスンなどと秘密決死である大韓光復団を組職.
1916 キム・ジャジンなど同志と閨閤して光復団だから開創.
軍資金募集と親日反逆者・悪質官公吏を膺懲.
1917 軍資金募集を拒否した漆谷の富豪木像院を射殺した後木浦で逮捕.
1921 7月 9日ソウルで死刑される.
1963 建国勳章独立場に追書.
本館仁川(仁川). 号ソモング(素夢). 慶尚北道常住(尚州)から出生した. 1913年風紀(豊基)からユ・チャンスン(〓昌淳) などと秘密決死である大韓光復団を組職, 1916年キム・ジャジン(金佐鎭) など同志を閨閤して光復団だから改称して軍資金募集と親日反逆者・悪質官公吏を戒めた. 1917年軍資金募集を拒否した漆谷(漆谷)の符号木像院(張承遠)を射殺して木浦で逮捕してソウルで死刑当たりこんにちはだった. 1963年建国勳章独立場が追書された.
義兵導いて満洲で...武装闘争した独立闘士仁川チェさん一家
大韓光復会総司令官彩旗中, 義兵長チェウングオン, 大一通軍部総長チェ上徳.
皆日製に対立した ‘仁川まま(蔡)’さん独立運動家たちだ. 仁川まま(蔡)さん門中は高麗チェ船務(蔡先茂)を詩調で仁川南欧官教洞とハギクドン, ムンハクドンに住んだ. 今も仁川南欧一部地域に門中子孫たちが残っている.
あいにくにもこれらはそれぞれ慶尚道で, 京畿道と黄海道等地で, またマンズタングで日製を相手で無力独立運動をした独立闘士たちだ. 親日要因暗殺と日本警察襲撃及び殺害, 日本軍を相手にした独立戦争などを主導した.
チェ上徳(未詳‾1925年) 大一通軍部総長は 1905年ウルサヌックヤックが締結されると崔益磯先生門弟で義兵に参加した. 黄海道沙里院と材令, 海州一帯で義兵闘いをしたし満洲で亡命した.
1922年西路軍政署, 漢族回, 大韓独立団など多くの団体が 1年にわたった日製討伐成功祝宴の集まりを開いた席で大一通軍部を結成したし総長に先任された.
1923年平安北道義州君で日本巡使たちを射殺して駐在所を燃やした. 1925年大韓民国臨時政府軍隊が日本軍に惨敗すると雇馬領戦闘で自決した. 1995年大統領場が追書されたが子孫たちを尋ね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チェウングオン(1879‾1915) 義兵長は 1908年黄海道安平巡使駐在所と水眼憲兵分遣所を攻撃して日本憲兵たちを射殺したしこの時得た武器で本格的な義兵活動を始めた.
300‾400人の義兵部隊を導いて黄海道, 江原道, 京畿道, 咸境道一帯山岳地帯で日本軍需肥大などと交戦をした.
1915年平南成川郡山岳地帯で交戦をして日本軍警を皆殺しにする戦果をあげたりした. その年 7月軍資金募金のために村に下ってから逮捕して同じ年 11月4日平壌刑務所で 33歳で殉国した. 政府は 1962年建国勳章独立場を追書した.
チェウングオン義兵長檄文
チェウングオン義兵長は 1908年檄文を通じて義兵一揆理由と義兵守則 15個グループを書いた.
守則には ‘義兵をかこつけて民を掠奪した者はすぐ打ち首にする, 敵とせめより戦う時怖気づいて後退した者はすぐ打ち首にする, 日辰会員(親日団体)を見てからも殺さない者はすぐ打ち首にする’と言うなどの内容が書かれている.
偉人伝には出ない, しかし私たちが必ず憶えなければならない殉国先烈たちだ.
出処 : 中部日報 - 京幾・仁川の心強い友達(https://www.joongboo.com)
채기중 연보
출생 1873.10.7~ 사망 1921.7.9
1873 10월 7일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13 풍기에서 유창순 등과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조직.
1916 김좌진 등 동지와 규합하여 광복단이라 개창.
군자금모집과 친일반역자·악질 관공리를 응징.
1917 군자금모집을 거부한 칠곡의 부호 장승원을 사살한 뒤 목포에서 체포.
1921 7월 9일 서울에서 사형당함.
1963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
본관 인천(仁川). 호 소몽(素夢).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 풍기(豊基)에서 유창순(庾昌淳) 등과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조직, 1916년 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이라 개칭하고 군자금모집과 친일반역자·악질 관공리를 응징하였다. 1917년 군자금모집을 거부한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고 목포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사형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병 이끌고 만주로...무장투쟁한 독립투사 인천 채씨 일가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채기중, 의병장 채응언, 대한통군부 총장 채상덕.
모두 일제에 맞선 ‘인천 채(蔡)’씨 독립운동가들이다. 인천 채(蔡)씨 문중은 고려 채선무(蔡先茂)를 시조로 인천 남구 관교동과 학익동, 문학동에 살았다. 지금도 인천 남구 일부 지역에 문중 후손들이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각각 경상도에서, 경기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또 만주땅에서 일제를 상대로 무력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 투사들이다. 친일 요인 암살과 일본경찰 습격 및 살해,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등을 주도했다.
채상덕(미상~1925년) 대한통군부 총장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 문하생으로 의병에 참여했다. 황해도 사리원과 재령, 해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했으며 만주로 망명했다.
1922년 서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 등 여러 단체가 1년에 걸친 일제토벌 성공 축하연 모임을 연 자리에서 대한통군부를 결성했고 총장에 선임됐다.
1923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일본 순사들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가 일본군에 참패하자 고마령 전투에서 자결했다. 1995년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후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채응언(1879~1915) 의병장은 1908년 황해도 안평 순사주재소와 수안헌병분견소를 공격해 일본헌병들을 사살했으며 이 때 얻은 무기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300~40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함경도 일대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수비대 등과 교전을 벌였다.
1915년 평남 성천군 산악지대에서 교전을 벌여 일본군경을 몰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7월 군자금 모금을 위해 마을에 내려왔다가 체포돼 같은 해 11월4일 평양형무소에서 33세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채응언 의병장 격문
채응언 의병장은 1908년 격문을 통해 의병봉기 이유와 의병 수칙 15개조를 적었다.
수칙에는 ‘의병을 빙자해 백성을 약탈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적과 접전할 때 겁을 내 후퇴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일진회원(친일단체)을 보고도 죽이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다.
위인전에는 나오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순국선열들이다.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s://www.joongb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