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奴婢種母法.
以前までは親中どの一方が良人以上残り一方がノ−ビドでも構わずに子は無条件良人以上階級
だったが世宗の奴婢種母法によって親中どの一方が奴婢なら子は無条件奴婢になるようにした.
もちろんこんな政策によって一番得した者等は両班たちや地主たちだった.
世宗の奴婢種母法で両班たちと地主たちは自分たちの持った奴婢が増えるようになってこれを人身売買取り引きしてより一層
多くの財産を着服するようになって朝鮮の人身売買がより一層増えるようになった. もちろん幾多の民たちは代わりにそれによって
人身売買にあえば品物のように売買するようになる被害を被った.
そして芸者たちも親中一方が芸者ならその野郎は天旱芸者になった.
2 富民告訴禁止法
実は富民告訴禁止法は太宗時から論議になった. 臣下たちの力強い主張にも太宗は民たちの被害を心配して
このような富民告訴禁止法を反対して実行されなくから太宗の息子である世宗時に両班たちの意見を受け入れて実害された
富民告訴禁止法によって民と政府間の疎通が断絶されて地方に受領が収奪をしても民たちが易しくこれを告訴することができなくてより一層地方の受領を不法を民たちのその被害を完全に手におえるようになった.(もし告訴をすればその告訴者は章 100台にグィヒャングがは処罰にあった. 当時章 100台なら叩かれて死ぬこともできる重刑だった.)
3 主人告訴禁止法
以前までは奴婢が主人を告訴が可能だった. しかし下が上を凌蔑するという理由で世宗時実行された主人告訴禁止法で告訴をすればその奴婢は絞殺型に処されて主人が自分をむやみに強姦して暴行をはたらいて虐待しても奴婢はその主人を易しく告訴をすることができなくて朝鮮全体人口の 40%に達する奴婢たちはイングォンさんもっと踏み躪られる結果にあった.
その他に兵士らを慰めると各軍営に身を売る芸者たちを呼んで売春町を設置した.
どんなに見れば朝鮮の軍隊慰安婦制度を初めて作った人物が世宗であるわけだ.
そして訓民正音も自主的な考えで作られたのがではない実は中国の言葉をもうちょっと易しく表現するために世宗の中国に
大韓死なりに人海作られたわけだ.
当時世宗が成群だと記録されているのは本当に当時歴史を記録した支配層である両班たちと地主たちには成群だったからだ.
しかし一方民たちにはそうではなかった. 世宗は当時支配層だった 10% 仮振子たちの成群だったわけだ.
今日は世宗大王タンシンイルだ. ところで世宗に対する反論がある. それは世宗は両班の成群だった民の成群ではなかった! 15世紀ソウル(漢城)人口の 4分の 3が奴婢だった! 私も奴婢に子孫かも知れない.
1 노비종모법.
그전까지는 부모중 어느 한쪽이 양인이상 나머지 한쪽이 노비더라도 상관없이 자식은 무조건 양인이상 계급
이었지만 세종의 노비종모법으로 인해 부모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게 하였다.
물론 이런 정책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자들은 양반들이나 지주들이였다.
세종의 노비종모법으로 양반들과 지주들은 자신들이 가진 노비가 늘어나게 되고 이를 인신매매 거래해서 더욱더
많은 재산을 착복하게 되고 조선의 인신매매가 더욱더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수많은 백성들은 대신 그로인해
인신매매를 당하면 물건처럼 사고팔게 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기생들 역시 부모중 한쪽이 기생이면 그 자식은 천한 기생이 되었다.
2 부민 고소 금지법
사실 부민고소 금지법은 태종때부터 논의가 되었다. 신하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태종은 백성들의 피해를 걱정하며
이러한 부민고소 금지법을 반대해 실행되지 않았다가 태종의 아들인 세종때에 양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해된
부민고소 금지법으로 인해 백성과 정부간의 소통이 단절되고 지방에 수령이 수탈을 해도 백성들이 쉽게 이를 고소하지 못해 더욱더 지방의 수령을 불법을 백성들의 그 피해를 온전히 감당하게 되었다.(만약 고소를 하면 그 고소자는 장 100대에 귀향가는 처벌을 당했다. 그때당시 장 100대면 맞아 죽을수도 있는 중형이였다.)
3 주인 고소 금지법
그전까지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가 가능했다. 하지만 아래가 위를 능멸한다는 이유로 세종때 실행된 주인 고소 금지법으로 고소를 하면 그 노비는 교살형에 처해져서 주인이 자기를 함부로 강간하고 폭행하고 학대해도 노비는 그 주인을 쉽게 고소를 할수가 없어서 조선전체 인구의 40%에 달하는 노비들은 인권이 더더욱 유린당하는 결과를 당했다.
그밖에 병사들을 위로한다고 각 군영에 몸을 파는 기생들을 불러 사창가를 설치했다.
어떻게 보면 조선의 군 위안부 제도를 처음 만든 인물이 세종인 셈이다.
그리고 훈민정음 역시 자주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게 아닌 사실 중국의 말을 조금더 쉽게 표현하기 위해 세종의 중국에
대한 사대로 인해 만들어진 셈이다.
당시 세종이 성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건 정말로 당시 역사를 기록한 지배층인 양반들과 지주들에게는 성군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방 백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세종은 당시 지배층이였던 10% 가진자들의 성군이였던 셈이다.
오늘은 세종대왕 탄신일이다. 그런데 세종에 대한 반론이 있다. 그건 세종은 양반의 성군이었지 백성의 성군이 아니었다! 15세기 서울(한성)인구의 4분의 3이 노비였다! 나도 노비에 후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