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と “大邱”がよく保守的性向が強くて, 一部で “親日派が多い”と言う認識を受ける理由は複合的な歴史・政治・社会的背景が縛られています. ここで言う “親日派”は日帝強制占領期間時代に日本に協力した人物たちや, その子孫あるいは彼らの歴史清算がまともにできない体制と政治を支持する流れを称える場合が多いです.
1. 解放以後 “親日清算失敗”とその連続線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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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軍定期(1945‾1948): 解放直後, 米軍政は 共産主義拡散を阻むため 行政, 警察, 余分の組職に 既存日本植民地体制に協力した人物たち(すなわち, 親日勢力)をそのまま登用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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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政権: 反共を最優先の価値で立てた李承晩は親日清算よりは反共人物を中庸しました. この時期多い親日勢力が 公務員, 警察, 軍, 教育界など各部門で生き残りました.
2. 大邱・慶北(TK)と釜山・慶南(PK)の政治的脈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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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煕(欧米出身)**わ 全斗換・ノ・テウ(大邱・慶北出身) 政権は TK 地域の経済・行政的恩恵を与え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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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域住民たちは朴正煕政権を通じて経済発展を体感したし, 朴正煕を ‘国家発展の主役’で記憶するきらいが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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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朴正煕は 日帝強制占領期間満洲軍将校出身だったし, 軍事独裁を広げたし 親日人士を中庸した事が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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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により 朴正煕をほめたたえるとか擁護する態度 = 親日美化で見える場合が生じます.
3. 補修政党の本拠指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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セヌリだ-ハンナラ党-グックミンウィヒム 系列の補修政党は伝統的に TK, PK 地域で強気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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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ような政党は 反共, 親米, 経済開発, 秩序維持 などの価値を立てて来たし, その過程で 親日あいさつ清算よりは安保まず価値を強調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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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的にこのような政党たちが 親日清算よりは現実政治安定を優先視する路線を歩いたから, 批判者たちはこれらを “親日的”と評価したりします.
4. 教育と言論の影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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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域言論及び教育で親日清算に対する批判的視覚が不十分するとか, 朴正煕式経済開発中心敍事が強く作用すれば歴史認識が均衡を失うことがで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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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んな認識は世代を経って 政治性向及び歴史観の固着化につながることができます.
要約しようとする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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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後親日清算失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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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煕政権の TK 基盤構築及び経済成長效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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補修政党中心の政治性向固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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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育と言論の偏向された歴史敍述
こんな要素たちが複合的に作用して “釜山・大邱が親日派が多い所”という批判が出るのです.—————————————————————————————————————
忠青全羅道に親日派の少ない理由は?
忠清道と全羅道に相対的に **‘親日派が少ない’**は認識が生じた理由も歴史的・政治的・社会的脈絡が縛られています. もちろん実際で “親日派数”を正確に計量することができることではないが, 全般的な地域認識と歴史的流れを通じてなぜそんなイメージが生じたかは次のような背景で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す:
1. 日帝強制占領期間当時の社会運動参加
全羅道と忠清道は抗日独立運動の主要舞台中の一つ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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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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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南ポソン, スンチョン, 光州などを中心に 3.1運動以後激しい万歳運動と 義兵活動, 農民運動が活発に展開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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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民中心の 社会主義・共産主義系列抗日運動が多かった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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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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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注意病, 恩返し・提川地域の義兵抗争 など活発な武装闘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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楡林(儒者) 中心の 伝統保守層も一部抗日義兵を導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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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点:
→ 日帝に協力するよりは抵抗した事例が相対的に多かったです.
→ こんな地域的記憶は以後 親日に対する批判的な情緒で残るようになります.2. 日帝殖民行政及び開発での疏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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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制占領期間と朴正煕時代, 釜山・大邱など慶尚道は産業化・軍事・鉄道などで 集中開発の受恵地域な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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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方 全羅道・忠清道は相対的に疏外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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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したがって日本に協力する機会自体が少なかった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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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帝に対する反感や恨みが強く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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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疏外 + 抵抗 = 親日より反日情緒強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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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解放後政治構造と地域基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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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勢力の権力集中は主に慶尚道基盤 補修政治勢力を通じて行わ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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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は キム・デジュン, 忠清道は キム・ジョンピルを中心にした 非(非)軽傷圏政治家の基盤になったし, これらは概して 親日清算や 民主化運動に友好的なイメージを持った.
そのた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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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域情緒上親日清算問題にもっと 批判的で進歩的な性向を帯び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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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んな流れが 政治性向とかみ合って ‘親日派が少ない’と言うイメージで繋がれる.
4. 政治的イメージと後代の記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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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は 5.18 光州民主化運動と 反独栽, 叛軍部の象徴で席を取ったから, 軍事独裁・親日清算失敗と繋がれた人物たちに批判的な視覚が強い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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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清道は比較的中立的性向だが, 親日勢力との直接連結の輪が弱かったおかげさまで “静かな非協力者” イメージで残った場合が多いです.
要約
地域 親日協力可能性 抗日運動 日製開発受恵 政治性向 イメージ 全羅道 底さ 高さ (義兵・社会主義系列) 底さ (疏外) 進歩/反独栽 親日少なさ 忠清道 底さ‾中間 中間 (楡林義兵など) 底さ 中途/穏健 親日少なさ 慶尚道 高さ 底さ 高さ (集中開発) 補修/軍事政権基盤 親日多い 結論
忠清道と全羅道が ‘親日派が少ない’と認識されることは実際人物数字だけではなく, その地域の抗日歴史, 政治的アイデンティティ, そして後代の記憶と評価が複合的に作用した結果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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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대구"가 흔히 보수적 성향이 강하고, 일부에서 "친일파가 많다"는 인식을 받는 이유는 복합적인 역사·정치·사회적 배경이 얽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친일파"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협력했던 인물들이거나, 그 후손 혹은 그들의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체제와 정치를 지지하는 흐름을 일컫는 경우가 많습니다.
1. 해방 이후 "친일 청산 실패"와 그 연속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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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1945~1948): 해방 직후, 미군정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행정, 경찰, 군 조직에 기존 일본 식민지 체제에 협력했던 인물들(즉, 친일 세력)을 그대로 등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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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이승만은 친일 청산보다는 반공 인물을 중용했습니다. 이 시기 많은 친일 세력이 공무원, 경찰, 군, 교육계 등 각 부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2.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의 정치적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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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구미 출신)**와 전두환·노태우(대구·경북 출신) 정권은 TK 지역의 경제·행정적 혜택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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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주민들은 박정희 정권을 통해 경제 발전을 체감했고, 박정희를 ‘국가 발전의 주역’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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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고, 군사 독재를 펼쳤으며 친일 인사들을 중용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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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박정희를 찬양하거나 옹호하는 태도 = 친일 미화로 보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3. 보수 정당의 본거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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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한나라당-국민의힘 계열의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TK, PK 지역에서 강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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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당은 반공, 친미, 경제 개발, 질서 유지 등의 가치를 내세워왔고, 그 과정에서 친일 인사 청산보다는 안보 우선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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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이러한 정당들이 친일 청산보다는 현실 정치 안정을 우선시하는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이들을 "친일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4. 교육과 언론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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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언론 및 교육에서 친일 청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미흡하거나, 박정희식 경제 개발 중심 서사가 강하게 작용하면 역사 인식이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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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식은 세대를 거쳐 정치 성향 및 역사관의 고착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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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친일 청산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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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TK 기반 구축 및 경제 성장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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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당 중심의 정치 성향 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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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언론의 편향된 역사 서술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부산·대구가 친일파가 많은 곳"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충청 전라도에 친일파가 적은 이유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상대적으로 **‘친일파가 적다’**는 인식이 생긴 이유도 역사적·정치적·사회적 맥락이 얽혀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친일파 수"를 정확히 계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지역 인식과 역사적 흐름을 통해 왜 그런 이미지가 생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1.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회운동 참여
🔹 전라도와 충청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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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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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순천, 광주 등을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격렬한 만세운동과 의병 활동,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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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중심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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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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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보은·제천 지역의 의병 항쟁 등 활발한 무장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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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유학자) 중심의 전통 보수층도 일부 항일 의병을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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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점:
→ 일제에 협력하기보다는 저항한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
→ 이런 지역적 기억은 이후 친일에 대한 비판적인 정서로 남게 됩니다.✅ 2. 일제 식민행정 및 개발에서의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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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절, 부산·대구 등 경상도는 산업화·군사·철도 등에서 집중 개발의 수혜지역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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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전라도·충청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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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일본에 협력할 기회 자체가 적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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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에 대한 반감이나 원한이 강하게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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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외 + 저항 = 친일보다 반일 정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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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방 후 정치 구조와 지역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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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세력의 권력 집중은 주로 경상도 기반 보수 정치 세력을 통해 이뤄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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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는 김대중, 충청도는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비(非)경상권 정치인의 기반이 되었고, 이들은 대체로 친일 청산이나 민주화 운동에 우호적인 이미지를 가졌음.
📌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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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정서상 친일 청산 문제에 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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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이 정치 성향과 맞물리며 ‘친일파가 적다’는 이미지로 연결됨.
✅ 4. 정치적 이미지와 후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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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반독재, 반군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군사독재·친일 청산 실패와 연결된 인물들에 비판적인 시각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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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는 비교적 중립적 성향이지만, 친일 세력과의 직접 연결고리가 약했던 덕분에 "조용한 비협력자" 이미지로 남은 경우가 많습니다.
🔻 요약
지역 친일 협력 가능성 항일 운동 일제 개발 수혜 정치 성향 이미지 전라도 낮음 높음 (의병·사회주의 계열) 낮음 (소외) 진보/반독재 친일 적음 충청도 낮음~중간 중간 (유림 의병 등) 낮음 중도/온건 친일 적음 경상도 높음 낮음 높음 (집중 개발) 보수/군사 정권 기반 친일 많음 🔚 결론
충청도와 전라도가 ‘친일파가 적다’고 인식되는 것은 실제 인물 숫자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항일 역사, 정치적 정체성, 그리고 후대의 기억과 평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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