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与党大統領候補は極左から極右への「転向者」

来月3日に実施される韓国大統領選挙の与党「国民の力」の候補は金文洙(キム・ムンス)前雇用労働部長官に決まった。
世論調査の支持率で与党候補内ではトップを走っていた金文洙候補は本日午後に行われた最終予備選(決勝戦)で56・53%の得票率を得て、43.47%の前党代表の韓東勲(ハン・ドンフン)候補に約13ポイントの差を付け、大統領候補に正式に選出された。
金文洙候補は保守の伝統地盤である慶尚北道の出身である。国会議員も1996年から2006年まで3期務め、その後、首都圏に属する京畿道の知事も2014年まで2期務めるなど政治キャリアは申し分ない。
何よりも異色なのは、保守政治家には珍しい学生運動、労働運動の出身、闘士であったことだ。
朴正煕(パク・チョンヒ)政権時代の1970年代、ソウル大学在籍中に過激なデモを主導したとして2度除籍処分を受け、1980年代には工場に偽装就職し、組合を結成し、労働者のストライキを煽ったとしてこれまた2度も刑務所送りされた経歴の持ち主である。

獄中で過酷な拷問を受けても仲間の居場所について絶対に口を割らなかったことからその不屈の精神力と鋼鉄の意思は当時、同僚や後輩の間で「運動圏の皇太子」と称されるほど尊敬の念を集めていた。
金候補を崇めていた後輩の中には「共に民主党」の元代表の秋美愛(チュ・ミエ)議員や革新政党「正義の党」の沈相奵(シム・サンジョン)元代表や盧武鉉(ノ・ムヒョン)政権下で保健部長官を務めた柳時敏(ユ・シミン)政治評論家などがいる。金候補はまさに当時の学生運動家や労働運動家の間では伝説的な存在であった。
また、金候補は思想的にも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や毛沢東主義に心酔していたこともあって、北朝鮮の金日成(キム・イルソン)主席の思想である「主体(チュチェ)思想」に信奉する学生活動家からも一目置かれた存在で「共闘」を迫られたこともあった「左翼思想」の持ち主であった。
金候補は1986年から88年まで刑務所に服役していたが、全国で沸き起こった民主化デモによって全斗煥(チョン・ドファン)軍事政権が倒れ、盧泰愚(ノ・テウ)政権に取って代わると、1990年に一部民主人士や労働運動家らを結集し、左翼政党「民衆党」を結成し、政治の政界に参入したが、1992年の国会議員選挙で本人を含め候補者全員が落選するという屈辱を味わった。
また、この年の大統領選挙には党の顔として担ぎ出した在野勢力の巨星、白基完(ペク・キワン)候補が有権者の1%しか得票を得られず惨敗したことに失望、落胆し、これがきっかけに左翼との縁を断ち切ってしまった。
国会議員選挙後、1年間はタクシー運転手などをして生計を立てていたが、1994年に保守に転向し、金泳三(キム・ヨンサム)政権下の与党「民主自由党」に入党し、以後、保守、右翼の道を歩んでいる。
尹錫悦(ユン・ソクヨル)前大統領に雇用労働部長官に任命された今では以前とは異なり、「労働者の不法ストに損害賠償の爆弾が特効薬である」とか「双竜自動車労組は自殺特攻隊である」と発言するなど労働組合とは敵対な関係にあることから野党は金候補に「ニューライト」(極右)のレッテルを貼っている。
金候補は受諾演説で、大統領選挙の勝利を誓ったが、直近の世論調査(5月1日)での支持率では野党「共に民主党」の李在明候補の42.1%に対して6%と圧倒的な差を付けられている。
現状ではどうみても勝ち目はない。そこで与党執行部及び保守層は無所属から立候補を表明した韓悳洙(ハン・ドクス)前首相に期待を掛け、保守候補の一本化を画策している。
金候補は政権交代を防ぐために「あらゆる勢力と強く連帯する」としているが、韓国の大統領選挙史上、与党であれ、野党であれ、政党候補が降りて、無所属の候補を擁立した例は皆無である。
従って、韓首相に一本化するためには11日の候補登録締切日までに韓前首相が「国民の力」に入党し、話し合いもしくは選挙で選出するほか道はない。
金候補が果たして辞退するだろうか?
(民衆党→)
(無所属→)
(民主自由党→)
(新韓国党→)
(ハンナラ党→)
(セヌリ党→)
(自由韓国党→)
(自由統一党(朝鮮語版)→)
(自由共和党→)
(キリスト自由統一党→)
(国民革命党(朝鮮語版)→)
(無所属→)
国民の力
所属政党も点々として信念や信条もない様子は李在明と同じだな
한국 여당 대통령 후보는 극좌에서 극우에의 「전향자」

다음 달 3일에 실시되는 한국 대통령 선거의 여당 「국민 힘」의 후보는 김문수(김·문스) 전고용 노동 부장관으로 정해졌다.
여론 조사의 지지율로 여당 후보내에서는 톱을 달리고 있던 김문수후보는 오늘 오후에 행해진 최종 예비 선거(결승전)로 56·53%의 득표율을 얻고, 43.47%의 전당대표의 한동 이사오(한·돈훈) 후보에 약 13포인트의 차이를 내 대통령 후보에 정식으로 선출되었다.
김문수후보는 보수의 전통 지반인 경상북도의 출신이다.국회 의원도 1996년부터 2006년까지 3기 맡아 그 후, 수도권에 속하는 경기도의 지사도 2014년까지 2기 맡는 등 정치 캐리어는 더할 나위 없다.
무엇보다도 이색인 것은, 보수 정치가에게는 드문 학생 운동, 노동 운동의 출신, 투사인 것이다.
박정희(박·톨히) 정권 시대의 1970년대, 서울 대학 재적중에 과격한 데모를 주도했다고 해서 2도 제적 처분을 받아 1980년대에는 공장에 위장 취직해, 조합을 결성해, 노동자의 스트라이크를 부추겼다고 해서 이것 또2도나 형무소 보내 된 경력의 소유자이다.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아도 동료가 있는 곳에 대해 절대로 자백하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그 불굴의 정신력과 강철의 의사는 당시 , 동료나 후배의 사이에 「운동권의 황태자」라고 칭해지는 만큼 존경의 생각을 모으고 있었다.
김 후보를 우러러보고 있던 후배중에는 「 모두 민주당」의 전직 대표의 추미 아이(츄·미에) 의원이나 혁신정당 「정의의 당」의 심상(심·산젼) 전직 대표나 노무현(노·무홀) 정권하에서 보건 부장관을 맡은 유시 사토시(유·시민) 정치 평론가등이 있다.김 후보는 확실히 당시의 학생 운동가나 노동 운동가의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또, 김 후보는 사상적으로도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모택동 주의에 심취하고 있던 적도 있고, 북한의 김일성(김·일 손) 주석의 사상인 「주체(츄 최) 사상」에 신봉 하는 학생 활동가로부터도 경의를 표해진 존재로 「공투」를 재촉당한 적도 있던 「좌익사상」의 소유자였다.
김 후보는 1986년부터 88년까지 형무소에 복역하고 있었지만, 전국에서 끓어오른 민주화 데모에 의해서 전두환(정·드판) 군사 정권이 넘어져 노태우(노·태우) 정권에 취해 대신하면, 1990년에 일부 민주 인사나 노동 운동가등을 결집해, 좌익 정당 「민중당」을 결성해, 정치의 정계에 참가했지만, 1992년의 국회 의원 선거로 본인을 포함 후보자 전원이 낙선한다고 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또, 이 해의 대통령 선거에는 당의 얼굴로서 추대한 재야 세력의 거성, 백기완(페크·키원) 후보가 유권자의 1% 밖에 득표를 얻지 못하고 참패했던 것에 실망, 낙담해, 이것이 계기로 좌익과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국회 의원 선거 후, 1년간은 택시 운전기사등을 하고 생계를 세우고 있었지만, 1994년에 보수로 전향해, 김영삼(김·영삼) 정권하의 여당 「민주 자유당」에 입당해, 이후, 보수, 우익의 길을 걷고 있다.
윤 주석기쁨(윤·소크욜) 전대통령에게 고용 노동 부장관으로 임명된 지금은 이전과는 달라, 「노동자의 불법 파업에 손해배상의 폭탄이 특효약이다」라고인가 「소우류우 자동차 노조는 자살 특공대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노동조합과는 적대인 관계에 있는 것부터 야당은 김 후보에 「신보수주의」(극우)이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후보는 수락 연설로,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맹세했지만, 바로 옆의 여론 조사(5월 1일)로의 지지율에서는 야당 「 모두 민주당」의 이재아키라 후보의 42.1%에 대해서 6%과 압도적인 차이를 낼 수 있고 있다.
현재 상태로서는 어떻게 봐도 승산은 없다.거기서 여당 집행부 및 보수층은 무소속으로부터 입후보를 표명한 한덕수(한·드크스) 전수상에게 기대를 걸어 보수 후보의 일원화를 획책 하고 있다.
김 후보는 정권 교대를 막기 위해서 「모든 세력과 강하게 연대한다」라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대통령 선거 사상,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 후보가 내리고, 무소속의 후보를 옹립 한 예는 전무이다.
따라서, 한수상에 일관되기 위해서는 11일의 후보 등록 마감일까지 한전수상이 「국민 힘」에 입당해, 대화 혹은 선거로 선출하는 것 외 길은 없다.
(민중당→)
(무소속→)
(민주 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세누리당→)
(자유 한국당→)
(자유 통일당(조선어판)→)
(자유 공화당→)
(그리스도 자유 통일당→)
(국민 혁명당(조선어판)→)
(무소속→)
국민 힘
소속 정당도 점점이 해 신념이나 신조도 없는 님 아이는 이재명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