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北金堤市広活面干拓地は日帝強制占領期間に造成されました.
1920年代日製の 産米増殖計画によって日本の財閥であるAbe厚謝誌で(阿部房次郎)がトンジン農業株式会社を設立してトンジン川下流の干潟に大規模防潮堤を逐造して干拓地を作りました. この干拓事業は当時我が国の最大規模の事業でした.
こんなに造成された農地で生産された米は主に群山港を通じて日本に搬出されたし, これは日帝強制占領期間米収奪の痛い歴史とも関連が深いです. 現在の広活面は 1949年進鳳面で分離して新設された行政区域です.
広活面干拓地が日本財閥であるAbe厚謝誌へのトンジン農業株式会社によって造成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 その過程と結果は次のような方式で朝鮮人に対する 徹底的な収奪につながりました.
1. 土地収奪 (所有権掌握)
- チープな払下げまたは買入: トンジン農業株式会社は干拓事業を通じて確保した莫大な良医土地を朝鮮総督府からほとんど無想に近く払下げ受けるとか捨値に買い入れました. これは朝鮮人たちが長い間生の基盤にした干潟を含んだ広闊な地が日本企業の所有になったことを意味します.
- 朝鮮人自作農の沒落: 日製は既存朝鮮人地主やザヤングノングの土地を多様な方式で強奪するとか買い入れて日本人地主たちの土地所有を拡大しました. 産米増殖計画はスリゾハブビなど過度な費用を朝鮮人農民たちに賦課して, 結局土地を売るとか無想で渡すしかなくしたりしました.
2. 小作制度を通じる米収奪
- 過度な小作料: 干拓された地は大部分トンジン農業株式会社のような日本人持ち株会社の所有になったし, 朝鮮人農民たちはその地で農業をする 小作農で転落しました. 小作農たちは上がり高の 40‾60%に達する非常に高い小作料を地主に捧げ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す. 甚だしくは米生産量が多くなくても小作人たちは常に貧しさに苦しま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 自発的な小作農だと言っても高い小作料のため生は奴隷に近かったという記録もあります.
- 生産管理及び統制: トンジン農業株式会社のような日本人持ち株会社たちは農場事務所を設置して事務員, 指導員, 濃霧院などを配置して小作人たちを厳格に監督しました. 夜明けから夜おそくまでつらい労動を強要したし, これは米生産量を極大化して日本への搬出をふやすためでした.
- 移住民統制: 広活面干拓地に定着した移住民たちには家と少量の地が割り当てられたが, トンジン農業株式会社が積立金を受けるなどの方式で事実上移住民たちが広活面を去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ました. これは農民たちを統制して持続的な労動力を確保しようとする意図でした.
3. 産米増殖計画との連携
- 日本食糧難解消: 日製は 1次世界大戦以後日本内の米不足と米代暴騰問題(米騷動)を解決するために産米増殖計画を推進しました. 朝鮮を日本の食糧供給基地にして米生産量をふやしてこれを日本で大量搬出することが主な目的でした.
- 基盤施設拡充: 広大干拓地造成は産米増殖計画の一環で成り立ちました. トンジン修理調合を通じて雲岩貯水池の水を引っぱって潅漑水路を拡充して, 朝鮮総督府農事試験場まで設置して米生産量拡大に総力を傾けました. また, 米収奪の前哨基地だった群山港と金堤から群山までのペーブメント開設も米を日本で積んで運ぶのに容易くしました.
4. 朝鮮人農民の生悪化
- 米消費量減少: 産米増殖計画で朝鮮の米生産量は増加したが, 大部分の米が日本に搬出されながらいざ朝鮮人たちの 1人当り米消費量はむしろ減少しました. これにより多い朝鮮人たちは包む代わりに満洲で輸入した雑穀(ゾブサルなど)を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など生活がもっと貧しくなりました.
- 農業構造歪曲: 米中心の単作型農業構造が強化されながら朝鮮農業の自立性は弱化されたし, 農民たちの経営はもっと不安定になりました.
結論的に広活面干拓地は日本の食糧難を解決して自国の利益を極大化するために日本財閥が朝鮮総督府の飛虎の下朝鮮の土地と労動力を徹底的に搾取して収奪した代表的な事例と言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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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시 광활면 간척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습니다.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일본의 재벌인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郞)가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동진강 하류의 갯벌에 대규모 방조제를 축조하여 간척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간척사업은 당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농지에서 생산된 쌀은 주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아픈 역사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현재의 광활면은 1949년 진봉면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행정구역입니다.
광활면 간척지가 일본 재벌인 아베 후사지로의 동진농업주식회사에 의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과 결과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인에 대한 철저한 수탈로 이어졌습니다.
1. 토지 수탈 (소유권 장악)
- 저렴한 불하 또는 매입: 동진농업주식회사는 간척 사업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양의 토지를 조선총독부로부터 거의 무상에 가깝게 불하받거나 헐값에 매입했습니다. 이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갯벌을 포함한 광활한 땅이 일본 기업의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 한국인 자작농의 몰락: 일제는 기존 한국인 지주나 자영농의 토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강탈하거나 매입하여 일본인 지주들의 토지 소유를 확대했습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조합비 등 과도한 비용을 한국인 농민들에게 부과하여, 결국 토지를 팔거나 무상으로 내줄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2. 소작제도를 통한 쌀 수탈
- 과도한 소작료: 간척된 땅은 대부분 동진농업주식회사와 같은 일본인 지주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한국인 농민들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소작농들은 수확량의 40~60%에 달하는 매우 높은 소작료를 지주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심지어 쌀 생산량이 많지 않아도 소작인들은 늘 빈궁함에 시달려야 했으며, 자발적인 소작농이라고 할지라도 높은 소작료 때문에 삶은 노예에 가까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생산 관리 및 통제: 동진농업주식회사와 같은 일본인 지주회사들은 농장 사무소를 설치하고 사무원, 지도원, 농무원 등을 배치하여 소작인들을 엄격하게 감독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된 노동을 강요했으며, 이는 쌀 생산량을 극대화하여 일본으로의 반출을 늘리기 위함이었습니다.
- 이주민 통제: 광활면 간척지에 정착한 이주민들에게는 집과 소량의 땅이 배당되었지만, 동진농업주식회사가 적립금을 받는 등의 방식으로 사실상 이주민들이 광활면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농민들을 통제하고 지속적인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3. 산미증식계획과의 연계
- 일본 식량난 해소: 일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내의 쌀 부족과 쌀값 폭등 문제(쌀 소동)를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 기지로 삼아 쌀 생산량을 늘리고 이를 일본으로 대량 반출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 기반 시설 확충: 광활 간척지 조성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동진수리조합을 통해 운암저수지의 물을 끌어와 관개수로를 확충하고,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까지 설치하여 쌀 생산량 확대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던 군산항과 김제에서 군산까지의 포장도로 개설도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데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4. 한국인 농민의 삶 악화
- 쌀 소비량 감소: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쌀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정작 한국인들의 1인당 쌀 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은 쌀 대신 만주에서 수입한 잡곡(좁쌀 등)을 먹어야 하는 등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 농업 구조 왜곡: 쌀 중심의 단작형 농업 구조가 강화되면서 조선 농업의 자립성은 약화되었고, 농민들의 경영은 더욱 불안정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광활면 간척지는 일본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 재벌이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조선의 토지와 노동력을 철저히 착취하고 수탈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