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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メの群がる海に生きたまま…韓国漁船「大量殺人事件」が示唆する闇

ぺスカマ号(デイリー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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昨年末の時点で、韓国の総人口約5121万人に占める外国人は、約265万人、全体の5.2%を占める。居住外国人のうちの3割強に当たる約96万人は中国国籍で、その7割が中国東北地方出身の朝鮮族と言われる人たちだ。1992年の中韓国交樹立後に韓国に出稼ぎに来る人が徐々に増え、現在の韓国では欠かせない働き手となっている。

その一方で、韓国国民の間には「朝鮮族=犯罪予備軍」という偏見も強い。ファクトチェックで事実ではないと否定されているが、朝鮮族が凶悪事件を起こすたびに韓国メディアは大きく報道し、また映画などでも凶悪犯として描かれることが多く、そのような偏見を助長する。その走りともいうべき事件が、1996年に起きたペスカマ15号(以下ペスカマ号)での大量殺人だ。

船長らの暴言、暴力などに耐えかねた朝鮮族の船員が、合わせて11人を殺害するという凶悪事件を起こしたというもので、1996年12月に釜山地裁は被告全員に死刑判決を下した。しかし、その後の2審で無期懲役に減刑され、大法院で判決が確定し、現在も服役中だ。担当の弁護士は、後に大統領となる文在寅氏だった。また、6人の中で唯一死刑判決が支持された被告も、文氏が盧武鉉政権の大統領秘書室長だった時代に無期懲役に減刑した。

人権弁護士と言われた文氏の面目躍如とも思えるエピソードだが、いざ政権を取るや、同様の立場に置かれた脱北者に対し、深刻な差別的態度を見せた。その件は後に触れるとして、まずはぺスカマ号事件について振り返ってみよう。ここでは韓国の月刊朝鮮とニューデイリーの記事をもとに、事件を再構成した。

激しい暴力と差別に募る憎悪

遠洋マグロ漁船ペスカマ号は、今から29年前の1996年6月7日、韓国人船員8人、インドネシア人船員10人を乗せて釜山港を出港し、同月15日にグアムで朝鮮族船員7人を乗船させた。韓国語で意思疎通ができる点が、有利だと考えられていたからだ。

同月27日から操業に入ったが、船上の空気は異様なものだった。主犯とされた全在千受刑者は、法廷に提出した嘆願書で次のように主張した。以下、月刊朝鮮から引用する。

18日、甲板長は中国人(編集部注:朝鮮族)船員をからかい始めました。甲板長は李春勝に「おい、メス犬はいるのか?子どもはいるのか?」と尋ねたが、李春勝が意味を理解できなかったため、「おい、赤ん坊はいるのか?お前はメス犬の陰部から出てきたんじゃないのか」と言いました。それを聞いた韓国人の一等航海士や機関長などは手を叩いて笑い、甲板長は李春勝の頭を手ではたいて転ばせました。まるで動物をもてあそぶかのような振る舞いでした。船員たちは内心の怒りをこらえながら、苦笑を浮かべていました。この時から、船員たちは韓国人にからかいや暴力、暴行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崔錦浩受刑者も、朝鮮族やインドネシア人の船員が船長や甲板長から鉄パイプや棍棒で殴られていたと証言した。全在千以外の全員がそもそも乗船経験自体がなく、仕事をまともにこなせないことに対する腹いせだった。一方、韓国人で唯一生き残った李仁錫一等航海士も、暴力があったことは認めたが、「そこまでひどいものではなかった」と主張した。

深い絶望

チェ・ギテク船長は、上述の李春勝受刑者を鉄パイプで殴ろうとしたが、李は肩に一発受けたのち船長を殴り返し、甲板にあったマグロ解体用のナイフを手にした。こうして韓国人と朝鮮族の間で、ナイフや棒、斧を手にしての睨み合いが発生。朝鮮族の船員は操業を拒否し、「陸に下ろしてほしい」と要求したという。

船長は激怒したものの、話し合いの結果、いったんは謝罪して今後は暴力を振るわないと約束。甲板長も同様に暴力の再発防止を誓ったことで、朝鮮族と韓国人船員の対立は収束した。

だが、この対立のしこりは残っていた。白忠范受刑者は、船長や甲板長による暴力はその後も続いたと供述した。船長は、手に鉄パイプを持って船員に指示を出し、漁船乗船が初めての船員たちを殴りつけた。ただでさえ強度の高い労働、いくら働いてもインセンティブのない固定給に対して朝鮮族とインドネシア人船員の不満は高まった。

29日の休憩終了後、一等航海士の李仁錫氏が操業参加を求めたが、全在千と崔萬奉を除く朝鮮族5人は体調不良を理由にこれを拒否し、下船を主張。チェ船長が確認を行った上で、30日に懲戒委員会が開かれ、5人の下船が決められた。この決定が、後の悲劇の引き金となった。

ここで問題が再燃した。船長が下船命令書に署名を求めたが、そこには「反乱及び操業拒否により下船」という記載があったうえ、サモアまでの下船費用を朝鮮族船員が負担することになっていた。

全在千を含む朝鮮族船員たちは、乗船時に派遣会社に紹介料として、1万元(当時のレートで約13万円)、船会社には担保金として5万元(約65万円)を支払っていた。また、サモアでの滞在費まで含めると最終的には20万元(約260万円)の自己負担になると知らされた。当時の中国では、国営企業の労働者の平均月収が約1300元(約1万6900円)だったことを考えると、彼らの絶望は想像しても余りある。

ただ実際には、担保金から差し引かれるのは航空費と滞在費のみだったとされ、船長の説明は事実とは異なっていた可能性がある。もし朝鮮族船員の主張が正しければ、船長の発言が彼らを精神的に追い詰めたことになる。

凶行の始まり

朝鮮族船員たちは絶望して酒浸りとなり、韓国人船員への深い恨みから8月1日午後9時に殺害を決意した。最初の標的は船長。凶器として刃物5本が用意され、全在千が指揮を取り、深夜に一人ずつ殺害する段取りが整えられた。

8月2日午前1時、全在千が操舵室で当直を開始し、30分後に船長が現れると、一瞬、人間的な葛藤を抱くも、「殺さねば自分が殺される」という恐怖がその思いを打ち消した。午前3時ごろ、全は「他の船から呼び出しがあった」と偽り、チェ船長を操舵室に誘い込んだ。その直後、外から扉をロックして閉じ込めた。

そして暗闇の中で待ち構えていた李春勝が、マグロ処理用ナイフでチェ船長の腹部を刺し、倒れたところを首を刺した。続いて白忠範と崔錦浩が膝や腹部を刺した。船長は「あッ」という断末魔の声を上げて息絶えた。

全在千はさらに、「船長が呼んでいる」と偽って甲板長を操舵室へ誘導。操舵室のドアを開けた瞬間、崔錦浩が斧で襲撃したが、甲板長はドアを閉めて防御。斧の刃を握って耐える甲板長の背後に、崔日奎が回り込んでナイフで臀部を刺し、甲板長は階段下に転落。その後、崔錦浩が斧で甲板長の首を、朴君男が腹部を刺した。遺体は太平洋に投棄された。

午前4時、朝鮮族船員たちは、航海継続に必要だとして李仁錫一等航海士を生かしておくことにし、操舵室に誘導した。そして首を絞め殴りつけて両手を縛り、猿ぐつわを噛ませて拘束した。その後、1時間半を掛けて他の韓国人船員3人を殺害し、遺体を海に投げ込んだ。その様子をインドネシア人船員の3人が目撃してしまったう。

朝鮮族船員たちは、インドネシア人船員を共犯にするため、ナイフで脅し、19歳の韓国人実習生を生きたまま、サメの群がる海に投げ込むように強いた。5時間にわたる連続殺人はいったん幕を閉じた。しかし、それで終わ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

6人の朝鮮族の船員たちは、現場を目撃したインドネシア人船員3人と、反乱に加わらなかった朝鮮族の崔萬奉氏を冷凍庫に閉じ込め、外から鍵をかけた。マイナス45度に保たれた冷凍庫の中では低体温症で一日も生きてられないはずだった。ところが4人は生きていた。冷凍庫の電源が入っていなかったのだ。

7日夜、朝鮮族の船員たちは4人を殴打して海へと投げ込んだ。殺戮の嵐はようやく収まった。

朝鮮族の船員6人は、生き残った李仁錫一等航海士とインドネシア人船員6人を操舵室に呼び出した上で、日本への密航を企てた。だが、李氏とインドネシア人のアサット氏は目配せで意思疎通を図った上で、意図的に船を傾けて、朝鮮族の船員5人を船倉に閉じ込めることに成功した。そして全在千を縄で縛り上げた上で、日本の海上保安庁に通報し、保護された。

文在寅のダブスタ

労働現場における暴言、暴力、差別が根底にあったこの事件に対して、中国と韓国の双方で助命運動が起きた。弁護に当たった文在寅氏は、2011年11月、韓国日報とのインタビューで次のように答えた。

「朝鮮族同胞は祖国(韓国)で助けを求めているが、われわれ韓国人の間には(朝鮮族を)蔑視したり下に見たりする心理がある。ペスカマ15号事件の加害者も同胞として暖かく(祖国の懐に)抱くべきで、その考えには今も変わりはない」

ところがそれから8年後、彼が率いる共に民主党の政権は、同じような動機で同僚16人を殺害したと疑われた脱北漁民2人を北朝鮮に強制送還した。事件はあくまで疑惑の段階にとどまっ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ろくな捜査も行われないまま、韓国憲法にも国際条約にも違反する状況で、北朝鮮の歓心を買うため送還は強行されたのだ。彼らが北朝鮮で、凄惨な拷問を受けるであろうことは誰もが予測できた。

(参考記事:“拷問室へ向かう男”の衝撃写真…北朝鮮国民も「ありえない」驚愕

当時、共に民主党からは強制送還に対する批判も反省も、まったくと言っていいほど出てこなかった。

政権は今また共に民主党の手に戻った。彼らは人権問題に対し、どのような態度を取るのだろうか。



한국인이 깊은 어둠, 한국 어선 대량 살인 사건

상어가 모이는 바다에 산 채로…한국 어선 「대량 살인 사건」이 시사하는 어둠

스카마호(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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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의 시점에서, 한국의 총인구 약 5121만명에 차지하는 외국인은, 약 265만명, 전체의 5.2%를 차지한다.거주 외국인 중 3할강에 해당되는 약 96만명은 중국 국적으로, 그 7할이 중국 동북지방 출신의 조선족이라고 해지는 사람들이다.1992년의 중한 국교 수립 후에 한국에 객지벌이하러 오는 사람이 서서히 증가해 현재의 한국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일꾼이 되고 있다.

그 한편, 한국 국민의 사이에는 「조선족=범죄 예비군」이라고 하는 편견도 강하다.팩트 체크로 사실은 아니라고 부정되고 있지만, 조선족이 흉악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한국 미디어는 크게 보도해, 또 영화등에서도 흉악범으로서 그려지는 것이 많아, 그러한 편견을 조장 한다.그 주행이라고도 해야 할 사건이, 1996년에 일어난 페스카마 15호(이하 페스카마호)로의 대량 살인이다.

선장들의 폭언, 폭력 등에 참기 힘든 조선족의 선원이, 합해 11명을 살해한다고 하는 흉악 사건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으로, 1996년 12월에 부산 지방 법원은 피고 전원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그러나, 그 후의 2심으로 무기 징역에 감형되어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해, 현재도 복역중이다.담당의 변호사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문 재토라씨였다.또, 6명중에서 유일 사형 판결이 지지를 받은 피고도, 문씨가 노무현 정권의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시대에 무기 징역에 감형했다.

인권 변호사라고 해진 문씨의 면목약여라고도 생각되는 에피소드이지만, 막상 정권을 취하자 마자, 같은 입장에 놓여진 탈북자에 대해, 심각한 차별적 태도를 보였다.그 건은 후에 접한다고 하여, 않고 스카마호사건에 대해 되돌아 보자.여기에서는 한국의 월간 조선과 뉴 데일리의 기사를 기초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격렬한 폭력과 차별로 모집하는 증오

원양 마구로 어선 페스카마호는, 지금부터 29년전의 1996년 6월 7일, 한국인 선원 8명, 인도네시아인 선원 10명을 태워 부산항을 출항해, 같은 달 15일에 괌에서 조선족선원 7명을 승선시켰다.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점이, 유리하다고 생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달 27일부터 조업에 들어갔지만, 선상의 공기는 이상한 것이었다.주범으로 여겨진 전 재천 수형자는, 법정에 제출한 탄원서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이하, 월간 조선으로부터 인용한다.

18일, 갑판장은 중국인(편집부주:조선족) 선원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갑판장은 리춘승에 「두어 메스개는 있는지?아이는 있는지?」라고 물었지만, 리춘승이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고 갓난아기는 있는지?너는 메스개의 음부로부터 나왔지 않은 것인가」라고 했습니다.그것을 (들)물은 한국인의 일등 항해사나 기관장 등은 손뼉을 쳐 웃어, 갑판장은 리춘승의 머리를 손에서는 도미라고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마치 동물도라고 놀 것 같은 행동이었습니다.선원들은 내심의 분노를 참으면서, 쓴웃음을 띄우고 있었습니다.이 때부터, 선원들은 한국인에때문인지 아니 폭력, 폭행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금호수형자도, 조선족이나 인도네시아인의 선원이 선장이나 갑판장으로부터 철파이프나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고 증언했다.전 재천 이외의 전원이 원래 승선 경험 자체가 없고, 일을 온전히 해낼 수 없는 것에 대하는 울분이었다.한편, 한국인으로 유일 살아 남은 이 히토시 주석 일등 항해사도, 폭력이 있던 것은 인정했지만, 「거기까지 심한 것으로는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깊은 절망

최·기테크 선장은, 상술의 리춘승수형자를 철파이프로 때리려고 했지만, 이는 어깨에 일발 받은 후 선장을 되받아 쳐, 갑판에 있던 마구로 해체용의 나이프를 손에 넣었다.이렇게 해 한국인과 조선족의 사이로, 나이프나 봉, 도끼를 손에 넣은 대립이 발생.조선족의 선원은 조업을 거부해, 「육지에 구제하면 좋겠다」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선장은 격노했지만, 대화의 결과, 일단은 사죄해 향후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고 약속.갑판장도 이와 같이 폭력의 재발 방지를 맹세한 것으로, 조선족과 한국인 선원의 대립은 수습했다.

하지만, 이 대립의 응어리는 남아 있었다.백충범수형자는, 선장이나 갑판장에 의한 폭력은 그 후도 계속 되었다고 진술했다.선장은, 손에 철파이프를 가지고 선원에 지시를 내려, 어선 승선이 첫 선원들을 후려갈겼다.그렇지 않아도 강도의 비싼 노동, 아무리 일해도 인센티브가 없는 고정급에 대해서 조선족과 인도네시아인 선원의 불만은 높아졌다.

29일의 휴식 종료후, 일등 항해사 이 히토시 주석씨가 조업 참가를 요구했지만, 전 재천으로 최만봉을 제외하는 조선족 5명은 컨디션 불량을 이유로 이것을 거부해, 하선을 주장.최 선장이 확인을 실시한 다음, 30일에 징계 위원회가 열려 5명의 하선을 결정할 수 있었다.이 결정이, 후의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재연했다.선장이 하선 명령서에 서명을 요구했지만, 거기에는 「반란 및 조업 거부에 의해 하선」이라고 하는 기재가 있던 뒤, 사모아까지의 하선 비용을 조선족선원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전 재천을 포함한 조선족선원들은, 승선시에 파견 회사에 소개료로서 1만원(당시의 레이트로 약 13만엔), 선박 회사에는 담보금으로 해서 5만원( 약 65만엔)을 지불하고 있었다.또, 사모아에서의 체재비까지 포함하면 최종적으로는 20만원( 약 260만엔)의 자기 부담이 되면 알게 되었다.당시의 중국에서는, 국영기업의 노동자의 평균 월수가 약 1300원( 약 1만 6900엔)이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의 절망은 상상해도 남음이 있다.

단지 실제로는, 담보금부터 공제되는 것은 항공비와 체재비만이었다고 되어 선장의 설명은 사실과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만약 조선족선원의 주장이 올바르면, 선장의 발언이 그들을 정신적으로 추적한 것이 된다.

흉행의 시작

조선족선원들은 절망해 장취가 되어, 한국인 선원에의 깊은 원한으로부터 8월 1일 오후 9시에 살해를 결의했다.최초의 표적은 선장.흉기로서 칼날 5개가 준비되어 전 재천이 지휘를 취해, 심야에 한 명씩 살해하는 절차가 정돈되었다.

8월 2일 오전 1시, 전 재천이 조타실에서 당직을 개시해, 30 분후에 선장이 나타나면, 일순간, 인간적인 갈등을 안는 것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해당한다」라고 하는 공포가 그 생각을 부정했다.오전 3시경, 전은 「다른 배로부터 호출이 있었다」라고 속여, 최 선장을 조타실로 끌어들였다.그 직후, 밖으로부터 문을 잠그어 가두었다.

그리고 어두운 곳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춘승이, 마구로 처리용 나이프로 최 선장의 복부를 찔러, 넘어진 것을을 목을 찔렀다.계속 되어 백충범과 최금호가 무릎이나 복부를 찔렀다.선장은 「아」(이)라고 하는 단말마가 소리를 높여 숨 끊어졌다.

전 재천은 게다가 「선장이 부르고 있다」라고 속여 갑판장을 조타실에 유도.조타실의 도어를 연 순간, 최금호가 도끼로 습격했지만, 갑판장은 도어를 닫아 방어.도끼의 칼날을 잡아 참는 갑판장의 배후에, 최일규가 돌아 나이프로 좌석부를 찔러, 갑판장은 계단하에 전락.그 후, 최금호가 도끼로 갑판장의 목을, 박군남이 복부를 찔렀다.사체는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오전 4시, 조선족선원들은, 항해 계속에 필요하다고 해 이 히토시 주석 일등 항해사를 살려 두기로 해, 조타실에 유도했다.그리고 목을 매어 후려갈기고 양손을 묶어, 재갈을 씹게 해 구속했다.그 후, 1 시간 반을 걸어 다른 한국인 선원 3명을 살해해, 사체를 바다에 던졌다.그 님 아이를 인도네시아인 선원의 3명이 목격하고 해.

조선족선원들은, 인도네시아인 선원을 공범으로 하기 위해, 나이프로 위협해, 19세의 한국인 실습생을 산 채로, 상어가 모이는 바다에 던지도록(듯이) 강요했다.5시간에 걸치는 연속 살인은 일단 막을 닫았다.그러나, 그래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6명의 조선족의 선원들은, 현장을 목격한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으로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던 조선족의 최만봉씨를 냉동고에 가두어 밖으로부터 열쇠를 잠그었다.마이너스 45도로 유지된 냉동고안에서는 저체온증으로 하루도 생이라고 없을 것이었다.그런데 4명은 살아 있었다.냉동고의 전원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7일밤, 조선족의 선원들은 4명을 구타하고 바다로 던졌다.살륙의 폭풍우는 간신히 들어갔다.

조선족의 선원 6명은, 살아 남은 이 히토시 주석 일등 항해사와 인도네시아인 선원 6명을 조타실에 호출한 다음, 일본에의 밀항을 기획했다.하지만, 이씨와 인도네시아인의 아삿트씨는 눈짓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한 다음, 의도적으로 배를 기울이고, 조선족의 선원 5명을 선창에 가두는 것에 성공했다.그리고 전 재천을 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일본의 해상보안청에 통보해, 보호되었다.

문 재인의 이중 표준

노동 현장에 있어서의 폭언, 폭력, 차별이 근저에 있던 이 사건에 대해서, 중국과 한국의 쌍방에서 조명 운동이 일어났다.변호에 임한 문 재토라씨는, 2011년 11월, 한국 일보와의 인터뷰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조선족동포는 조국(한국)에서 도움을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 한국인의 사이에는(조선족을) 멸시 하거나 깔보거나 하는 심리가 있다.페스카마 15호 사건의 가해자도 동포로서 따뜻하게(조국의 품에) 안아야 하는 것으로,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화는 없다」

곳이 그리고 8년 후, 그가 인솔하는 모두 민주당의 정권은, 같은 동기로 동료 16명을 살해했다고 의심된 탈북 어민 2명을 북한에 강제송환 했다.사건은 어디까지나 의혹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수사도 행해지지 않은 채, 한국 헌법에도 국제 조약에도 위반하는 상황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송환은 강행되었던 것이다.그들이 북한에서, 처참한 고문을 받을 것이다 (일)것은 누구나가 예측할 수 있었다.

(참고 기사:“고문실로 향하는 남자”의 충격 사진…북한 국민도 「있을 수 없다」경악)

당시 , 모두 민주당에서는 강제송환에 대한 비판도 반성도, 완전히라고 말해도 좋은 만큼 나오지 않았다.

정권은 지금 또 모두 민주당의 손으로 돌아왔다.그들은 인권문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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