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者は社会の寄生虫だ. もっと長く生きるということがどんな場合には恥ずかしい一日ことがある. 生の意味とサルアサル権利が喪失されてしまった後にも医者さんたちとその処方に卑怯に寄り掛かって植物人間の生をやっと引き続くということは社会からひどさ軽蔑を受けるべきだ. 医者さんたちはまたこのような軽蔑を伝達する者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 処方せんをくれるのではなく毎日毎日新しい嫌悪感を患者たちに仄めかさ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生, 上昇する人の最高の関心が退化する生を容赦なく押えつけてとり除くことを要求する場合に対して例えば生殖の権利, 生まれる権利, 肉権利に対して一つの新しい責任, 意思が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責任を新たにつくること...., これ以上矜持を持って暮すことができない時堂堂と死ぬこと. 自発的に選択した死, 明瞭な意識を行われて喜びながら子たちと違う人々が見る中に適時に成り立つ死, そして去る者がまだ生きている間にまともにお別れを告げるのが可能な死, も在世に成就したことと願ったことに対する真正な評価と生に対する総決算の可能な死このすべてのものはキリスト教が臨終の時間に演出して来た可憐でおののくに値するコメディーとは反対されるのだ.
ニーチェ -偶像の夕暮れ-
병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삶의 의미와 살아살 권리가 상실되어버린 후에도 의사들과 그 처방에 비겁하게 의존하며 식물인간의 삶을 근근이 이어간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심함 경멸을 받아야 마땅하다. 의사들은 다시 이러한 경멸을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처방전을 줄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운 혐오감을 환자들에게 내비쳐야 할 것이다. 삶, 상승하는 사람의 최고의 관심이 퇴화하는 삶을 가차 없이 억누르고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에 대해 예를 들면 생식의 권리, 태어날 권리, 살 권리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책임, 의사가 가져야 할 책임을 창출하는 것...., 더 이상 긍지를 갖고 살 수 없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명료한 의식을 갖고 기뻐하면서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적시에 이루어지는 죽음, 그리하여 떠나는 자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제대로 작별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죽음, 또한 생전에 성취한 것과 원했던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삶에 대한 총결산이 가능한 죽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가 임종의 시간에 연출해온 가련하고 전율할 만한 코미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니체 -우상의 황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