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世紀後半日本の知識人だった福沢勇吉の ‘脱亜入欧(脱亜入欧)’ 思想は日本近代化の理念的礎石だった. 彼は朝鮮と中国など東アジア国々と日本が一緒に行くことができないと判断して, 西欧文明に日本が編入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 この脱亜論は単純な外交や文化的志向ではなく国家戦略の方向設定だった.
20世紀中盤以後, 日本が科学技術・産業分野で世界最上の水準に到逹しながら, その成就を世界に認められる一番力強いスーダンの中で一つで ‘ノーベル賞’が選択された. 日本政府は 1980年代以後本格的に ‘ノベル科学上受賞者排出’を国家戦略にしたし, 大学と研究所に対する大規模投資を通じてその基盤を押し堅めた. これは科学技術先進国と同時に ‘西欧文明の一員’に完全に編入されようとする欲望の表現だった.
このような流れは ‘仮面よ’の象徴的完成に解釈されることができる. 日本が朝鮮や中国のような ‘アジア伝統国家’と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断絶して, 西欧の基準で ‘知性’と ‘文明’の資格を証明しようとする努力がすぐ ノーベル賞という西欧の指摘認証装置を通じて具体化されたのだ.
したがって日本の国策ノーベル賞戦略は単純な科学技術振興政策ではなく, 100年前福沢が夢見た ‘脱亜入欧’の実質的成就を象徴するプロジェクトだったと言える. これは日本が相変らずアジアの一部で残るのを拒否して, 指摘・文明的アイデンティティを西欧のフレーム中で再正義しようとした意志の産物だった.
19세기 후반 일본의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사상은 일본 근대화의 이념적 초석이었다. 그는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일본이 함께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구 문명에 일본이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탈아론은 단순한 외교나 문화적 지향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방향 설정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일본이 과학기술·산업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의 수준에 도달하면서, 그 성취를 세계에 인정받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로 ‘노벨상’이 선택되었다. 일본 정부는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노벨 과학상 수상자 배출’을 국가 전략으로 삼았고, 대학과 연구소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그 기반을 다졌다. 이는 과학기술 선진국이자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 완전히 편입되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탈아’의 상징적 완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과 같은 ‘아시아 전통 국가’와의 정체성을 단절하고, 서구의 기준에서 ‘지성’과 ‘문명’의 자격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바로 노벨상이라는 서구의 지적 인증장치를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국책 노벨상 전략은 단순한 과학기술 진흥 정책이 아니라, 100년 전 후쿠자와가 꿈꾼 ‘탈아입구’의 실질적 성취를 상징하는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여전히 아시아의 일부로 남기를 거부하고, 지적·문명적 정체성을 서구의 틀 안에서 재정의하고자 했던 의지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