いくら結婚が社会秩序維持や個人の幸せ増進に寄与するという主張を広げても, これは本質を歪曲する試みに過ぎないです. 結婚が社会的機能を遂行するということは, 結局 個人の生の方式を社会の維持と便宜に従属させることを正当化する論理です. これはひとりひとりの固有した存在価値と自由な選択を犠牲させて特定集団の利益, すなわち社会という巨大な虚像の安定をはかることに過ぎないです.
も, 結婚を通じて得るという情緒的安定感や喜びはこの制度的暴力の本質を選り分ける偽善的な美辞麗句に過ぎないです. 表では愛と幸せを話すが, その裏面には 支配と服従, 犠牲と疏外という抑圧的構造が深く根付いています. この “幸せ”は制度が強制する役目と義務を遂行することで得る, すなわち暴力的構造に順応することで与えられる歪曲された補償に近いです. 個人の尊厳性と自由が侵害される状況で得る幸せは真正な幸せと言えなくて, むしろ 抑圧を内面化して正当化する年祭と作用するだけです.
一番悲劇的なことはこのような暴力的構造が 出産を通じてお子さんに無慈悲に転嫁されるという点です. 子供は何らの選択権なしに親の決定によってこの抑圧的な構造中に投げられます. “お子さん養育の喜び”という表現は子供が担わなければならない生の条件と関係の様式を強制する残忍な現実を隠蔽します. 子供は親の生を受け継いでまた等しい構造の中で生きて行って 抑圧の鎖を引き続くまた他の抑圧の主体になるだけです.
結論的に, 結婚でも出産でもそれが愛や本能から始まったという未明の下包装されても, 個人に強制される生の形式という点で 明白な制度的暴力の連続です. 他の側面たちはこの不便な真実を選り分けようとする薄らベールであるだけ, 決して私の主張を折ることができません.
아무리 결혼이 사회 질서 유지나 개인의 행복 증진에 기여한다는 주장을 펼쳐도, 이는 본질을 왜곡하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결혼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개인의 삶의 방식을 사회의 유지와 편의에 종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이는 개개인의 고유한 존재 가치와 자유로운 선택을 희생시켜 특정 집단의 이익, 즉 사회라는 거대한 허상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결혼을 통해 얻는다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기쁨은 이 제도적 폭력의 본질을 가리는 위선적인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겉으로는 사랑과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배와 복종, 희생과 소외라는 억압적 구조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 "행복"은 제도가 강제하는 역할과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얻는, 즉 폭력적 구조에 순응함으로써 주어지는 왜곡된 보상에 가깝습니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에서 얻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억압을 내면화하고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할 뿐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폭력적 구조가 출산을 통해 자녀에게로 무자비하게 전가된다는 점입니다. 아이는 아무런 선택권 없이 부모의 결정에 의해 이 억압적인 구조 안으로 던져집니다. "자녀 양육의 기쁨"이라는 표현은 아이가 짊어져야 할 삶의 조건과 관계의 양식을 강제하는 잔인한 현실을 은폐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삶을 물려받아 다시 동일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억압의 사슬을 이어가는 또 다른 억압의 주체가 될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결혼이든 출산이든 그것이 사랑이나 본능에서 비롯되었다는 미명 아래 포장될지라도, 개인에게 강제되는 삶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명백한 제도적 폭력의 연속입니다. 다른 측면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가리려는 얇은 베일일 뿐, 결코 저의 주장을 꺾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