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経済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韓国政府は1965年6月22日に調印された「韓日基本条約」について、「主権の相互尊重と互恵平等の原則に基づいた国交正常化を実現した」とし、「韓国と日本の間に結ばれたすべての条約の無効が確認され、韓日関係は新たに出発することになった」と説明している。しかし、その後も歴史問題は完全には解決されておらず、日本は「未来志向」を強調し、これ以上謝罪しない国への道を歩んでいる。両国の軋轢と雪解けは繰り返されており、在日コリアンを含む多くの人々の暮らしは荒波にさらされてきた。光復(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からの開放)80年と韓日国交正常化60年を迎える今年、韓日関係を振り返り、残された課題を再照明してみる。>


 「大阪生野区に今でも古い焼肉屋が多いのは理由があります」


 5月16日に会った大阪出身のある在日コリアン2世が淡々と語り出した。当時、日本人は牛や豚の内臓を食べず、朝鮮人たちはこれを安価で仕入れて生計を立てていた。「解放前後に日本に来た朝鮮人たちは大阪生野区を中心に集まって暮らし、ゴミや不用品を取り扱って生計を立てるのが一般的だった。また当時は、日本人にタバコ代を握らせておけば、『ほうるもの(捨てるもの)』を手に入れことができた。家族みんながそれを食べて、またお金をもらって(料理をして)売ったりもした」と語った。日本で人気の高い韓国式の「ホルモン」は「放るもの」という日本語から始まったという。


 日帝強占期、日本に渡ってきた植民地朝鮮出身の下層階級の労働者の暮らしは厳しかった。生野区の旧名が「猪を飼うところ」という意味の「猪飼野」だったほど環境は劣悪だった。崩れかけたバラック小屋、川や街には汚物があふれていたという。在日朝鮮人の人生を描いた本『パチンコ』で、当時バラック小屋の中で豚を飼う場面が登場したりもした。差別は日常だった。朝鮮人たちが商売をしたくても日本人問屋は酒を売らず、客が酒を注文すると裏口から抜け出して日本人が運営する店で酒を買ってくることもあったという。朝鮮人たちは故郷を思い浮かべながら「青空には星が多いが/己の身体には苦労ばかり!/己はこんなに哀れにも/日本の隅に放り捨てられたのか」(「恨(ハン)多き君代丸」)と歌い、深い悲しみを飲み込んだ。


 在日コリアン2世のイ・チョルさん(76)はハンギョレに、「父は金を稼ぐために当時『クンデファン』と呼ばれていた船『君が代丸』に乗って済州(チェジュ)から大阪に渡り、鉄を扱う鋳物工場で働いていた」とし、「1世の在日朝鮮人はもうほとんど亡くなったが、当時はトイレや水道もまともにない『長屋』という粗悪な合宿所のようなところで、苦労しながら朝鮮人部落を作っていったという話をよく聞かされた」と語った。彼は「父は解放後、済州に戻り、済州4・3事件の惨禍を逃れて再び大阪に来たが、日本の第2次大戦敗戦後にも朝鮮人は働き口だけでなく日常でも差別が多かった」と話した。


 1920年代以後、日本最大の朝鮮人定着地だった大阪市生野区一帯には一時「朝鮮市場」と呼ばれたところがあった。ここは1990年代以降、「大阪コリアタウン」に名前を変えた。日本全域にこのような市場がここにしかなかった時代には、故郷の服を求めて朝鮮人たちが1千キロも離れた北海道から韓服(チョゴリ)を買いに来たという。5月14日に訪れた400メートルのコリアタウンのあちこちでは、キムチをはじめキムパ(海苔巻き)、豚肉やスンデ(腸詰め)のクッパなどが、ピリッと香ばしい匂いを漂わせていた。「慶州商店」、「昔々フンブとノルブ」、「韓流ショップK」のような韓国商店は、国籍を問わず多くの客で賑わっていた。近隣の「鶴橋市場」にある商店街と共に日本で最大規模のコリアタウンだ。


 生野区は日本の植民地政策が作り出した「オールドカマー」の過酷な暮らしが刻み込まれている場所だ。「内鮮一体」を強調していた日本は、敗戦から2年後の1947年、日本に居住する朝鮮人を外国人として登録させた。1952年に日本が連合国と結んだ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が発効すると、在日朝鮮人は日本国籍喪失を通達された。在日朝鮮人は事実上無国籍状態で日本で暮らすことになった。1965年の韓日国交正常化以降、韓国国籍に変える在日コリアンが増えたが、多くの在日コリアンが現実にはもはや存在しない国の国籍である「朝鮮籍」を保持し続けた。日本に帰化していない韓国国籍や朝鮮籍の人々は「特別永住者」として日本で暮らすことになった。「オールドカマー」と呼ばれる人たちだ。


 1920年代ごろから平凡なオールドカマーの拠点だった生野区の歴史は、「コリアタウン」の南側の道の端に接する平野川から始まる。1920年代初めまで曲がりくねった形の蛇行川だった平野川で洪水が起きた。鶴橋耕地整理組合は幅16メートル、長さ2144メートル規模の大規模な河川整備工事に乗り出した。第1次世界大戦などの余波で労働力不足だったため、植民地朝鮮から多くの労働者を連れてくることになった。このために1922年、大阪と済州を結ぶ定期旅客船「君が代丸」が運行され、日雇いの肉体労働者である「朝鮮人土方」が数多く流入した。日本の植民地政策により生活の根幹が崩れた朝鮮でなかなか職に就けなかった人々は、済州から「君が代丸」に乗った。1923年当時の日本内務省の資料「在日朝鮮人人口推移」によると、この影響で日本全域の朝鮮人8万人余りのうち済州出身者が1万人余りに達した。1934年当時、済州道民全体の約25%にあたる5万人余りが日本に渡ったという資料もある。今も日本に済州出身が多いのはこのためだ。


 国史編纂委員会の「在外同胞史叢書」によると、大阪の在日朝鮮人は1921年の5千人規模から1925年には3万4千人、1930年には9万6千人に急増した。だが、彼らに与えられた暮らしは過酷なものだった。在日朝鮮人たちは長屋で生活し、日雇い労働者、雑夫など最も低い地位で働いた。植民地出身労働者の賃金は日本人の半分程度だった。太平洋戦争末期の1945年には、米軍の大阪大空襲で多くの朝鮮人が死亡。かろうじて生き長らえた人も多かった。生野区で総合商社を経営してきたホン・ヨピョさんは、在日朝鮮人の暮らしを記録した本『在日一世の記憶』(姜尚中、小熊英二著)で、「(空襲後)避難する時、周辺に死体が山のように積まれていた」とし、「地獄絵図とはこんなものかもと思った」と証言した。


 東京をはじめ神奈川、九州などにも小規模の朝鮮人部落があったが、日本全域の朝鮮人の拠点の役割をした大阪には特別な意味があった。在日コリアンのドキュメンタリー監督でジャーナリストの高賛侑(コウ・チャニュウ)さんはハンギョレに「生野区を中心に朝鮮人が集団居住していた大阪は、1923年の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大虐殺事件をはじめ強制動員の被害者などが、同胞社会を信じて身を寄せられる避難所だった」と語った。解放後には韓国現代史の惨劇である済州4・3事件を逃れ、済州島民1万人余りが生き残るために移り住んだ土地でもあった。1944年に200万人余りに達した在日朝鮮人は、解放直後にも大阪をはじめ日本全域に60万人余りが残った。1950年の朝鮮戦争勃発などで混乱した朝鮮半島情勢のため、帰国できなかった人々が多かった。


 韓日は1965年に韓日基本条約と請求権協定を結んで国交を回復したが、根本的な問題は解決していない。日本軍「慰安婦」被害問題、強制動員被害賠償問題などは完全に解決されない状態で条約と協定を結んだことで、その後も続いた両国関係における軋轢の原因になっている。


 在日コリアンの生活も厳しかった。国交正常化後も相変わらず差別が続いた。日本政府は外国人登録をする際に、犯罪者だけに義務化されていた「指紋押印」を在日同胞にも強要した。住所変更をしていなかったり、外国人登録証を携帯していなかったとの理由で、尋問もしくは逮捕されることもあった。まともな仕事を見つけることも容易ではなかった。多くの人が不用品やゴミ、古物を扱うことで生計を立てた。一部は日本人が手を出すことを敬遠するパチンコや「サラ金」業界にも飛び込んだ。


 税金は納めているのに、地方自治体の選挙を含めた参政権は今も認められていない。韓国は2006年から自治体選挙における外国人住民の投票権を認めている。日本の保守団体は在日コリアンの多い地域で「死ね」などの言葉を叫びながら「ヘイトスピーチ」を繰り広げ、在日コリアンたちは恐怖に怯えた。


 在外韓国人学会のイム・ヨンオン会長(全南大学教授)は「オールドカマーの在日コリアン一世・二世が次第に減り、日本で生まれ育った三世・四世と(1965年の韓日国交正常化後に定着した韓国人の)ニューカマーが浮上し、在日コリアン社会の色が薄くなっているのが事実」だとしたうえで、「彼ら自らが結束を図り、韓国政府も彼らの困難を解決するために行政・外交的支援をする必要がある」と指摘した。


大阪/ホン・ソクジェ特派員


차별과 멸시를 받은 재일 코리안들…오사카 이쿠노구는 「피난소」였다, 지금도 계속 되는 안보이는 재일 코리안에게의 차별

 <한국 정부는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 기본 조약」에 대해서, 「주권의 상호 존중과 호혜 평등의 원칙에 근거한 국교 정상화를 실현했다」라고 해,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연결된 모든 조약의 무효가 확인되어 한일 관계는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그 후도 역사 문제는 완전하게는 해결되지 않고, 일본은 「미래 지향」을 강조해,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 나라에의 길을 걷고 있다.양국의 알력과 눈 풀 수 있어는 반복해지고 있어 재일 코리안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생활은 거센 파도에 노출되어 왔다.광복(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개방) 80년과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이하는 금년, 한일 관계를 되돌아 봐, 남겨진 과제를 재조명 해 본다.>


 「오사카 이쿠노구에 지금도 낡은 불고기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어요」


 5월 16일에 만난 오사카 출신이 있는 재일 코리안 2세가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당시 , 일본인은 소나 돼지의 내장을 먹지 않고, 한국인들은 이것을 염가로 구매하고 생계를 세우고 있었다.「해방 전후에 일본에 온 한국인들은 오사카 이쿠노구를 중심으로 모이며 살아, 쓰레기나 불용품을 취급하고 생계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또 당시는, 일본인에 담배대를 잡게 해 두면, 「파는 것(버리는 것)」를 손에 넣어 일이 생겼다.가족 모두가 그것을 먹고, 또 돈을 받아(요리를 해) 팔기도 했다」라고 말했다.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한국식의 「호르몬」은 「던질 것」이라고 하는 일본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건너 온 식민지 조선 출신의 하층계급의 노동자의 생활은 어려웠다.이쿠노구의 구명이 「멧돼지를 기르는 곳(중)」이라고 하는 의미의 「이카이노」였다(정도)만큼 환경은 열악했다.무너져 간 발락 오야, 카와나 거리에는 오물이 넘치고 있었다고 한다.재일 한국인의 인생을 그린 책 「파칭코」에서, 당시 발락 오두막안에서 돼지를 기르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차별은 일상이었다.한국인들이 장사를 하고 싶어도 일본인 도매상은 술을 팔지 않고, 손님이 술을 주문하면 뒷문으로부터 빠져 나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술을 사 오기도 했다고 한다.한국인들은 고향을 떠올리면서 「푸른 하늘에는 별이 많지만/당신의 신체에는 고생(뿐)만!/당신은 이렇게 불쌍하게도/일본의 구석에 던져 버려졌는가」( 「한(한) 많은 키미요환」)과 노래해, 깊은 슬픔을 삼켰다.


 재일 코리안 2세의 이·쵸르씨(76)는 한겨레에,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당시 「쿤데 팬」으로 불리고 있던 배 「키미가요(일본국가)환」을 타 제주(제주)로부터 오사카로 건너, 철을 취급하는 주물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라고 해, 「1세의 재일 한국인은 이제(벌써) 거의 죽었지만, 당시는 화장실이나 수도도 온전히 없는 「연립 주택」이라고 하는 투박한 합숙소와 같은 곳에서, 고생하면서 한국인 부락을 만들고 갔다고 하는 이야기를 잘 들었다」라고 말했다.그는 「아버지는 해방 후, 제주로 돌아와, 제주 4·3 사건의 참화를 피해 다시 오사카에 왔지만, 일본의 제2차 대전 패전 후에도 한국인은 일자리 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차별이 많았다」라고 이야기했다.


 1920년대 이후, 일본 최대의 한국인 정착지였던 오사카시 이쿠노구 일대에는 한때 「조선 시장」이라고 불린 곳(점)이 있었다.여기는 1990년대 이후, 「오사카 코리아 타운」에 이름을 바꾸었다.일본 전역에 이러한 시장이 여기 밖에 없었던 시대에는, 고향의 옷을 요구해 한국인들이 1천 킬로나 멀어진 홋카이도로부터 한복(저고리)을 사러 왔다고 한다.5월 14일에 방문한 400미터의 코리아 타운의 여기저기에서는, 김치를 시작해 킴파(김말이 스시나무), 돼지고기나 순대(소시지)의 쿠파등이, 피릭과 고소한 냄새를 감돌게 하고 있었다.「경주 상점」, 「옛날들훈브와 노르브」, 「한류숍 K」와 같은 한국 상점은,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손님으로 활기차 있었다.근린의 「쓰루하시 시장」에 있는 상가와 함께 일본에서 최대 규모의 코리아 타운이다.


 이쿠노구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들어 낸 「올드 솥-」의 가혹한 생활이 새겨져 있는 장소다.「 안센이치체」를 강조하고 있던 일본은, 패전으로부터 2년 후의 1947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외국인으로서 등록시켰다.1952년에 일본이 연합국과 묶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하면, 재일 한국인은 일본국적 상실이 통지되었다.재일 한국인은 사실상 무국적 상태로 일본에서 살게 되었다.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국적으로 바꾸는 재일 코리안이 증가했지만, 많은 재일 코리안이 현실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적인 「조선국적」을 계속 보관 유지했다.일본에 귀화하고 있지 않는 한국 국적이나 조선국적의 사람들은 「특별 영주자」로서 일본에서 살게 되었다.「올드 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1920년대경부터 평범한 올드 솥-의 거점이었던 이쿠노구의 역사는, 「코리아 타운」의 남쪽의 길의 구석에 접하는 평야강으로부터 시작된다.1920년대 초까지 구부러진 형태의 사행강이었던 평야강에서 홍수가 일어났다.쓰루하시 경지 정리 조합은 폭 16미터, 길이 2144미터 규모의 대규모 하천 정비 공사에 나섰다.제1차 세계대전등의 여파로 노동력 부족했던 모아 두어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많은 노동자를 데려 오게 되었다.이 때문에 1922년, 오사카와 제주를 연결하는 정기 여객선 「키미가요(일본국가)환」이 운행되어 일용의 육체 노동자인 「한국인 막노동자」가 많이 유입했다.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생활의 근간이 무너진 조선에서 좀처럼 취직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제주로부터 「키미가요(일본국가)환」을 탔다.1923년 당시의 일본 내무성의 자료 「재일 한국인 인구 추이」에 의하면, 이 영향으로 일본 전역의 한국인 8 만여명 중 제주 출신자가 1 만여명에 이르렀다.1934년 당시 , 제주도민 전체의 약25%에 해당하는 5 만여명이 일본에 건넜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지금도 일본에 제주 출신이 많은 것은 이 때문에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재외 동포사 총서」에 의하면, 오사카의 재일 한국인은 1921년의 5천명 규모로부터 1925년에는 3만 4천명, 1930년에는 9만 6천명에게 급증했다.하지만, 그들에게 줄 수 있었던 생활은 가혹한 것이었다.재일 한국인들은 연립 주택에서 생활해, 일용 노동자, 잡부등 가장 낮은 지위에서 일했다.식민지 출신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반정도였다.태평양전쟁 말기의 1945년에는, 미군의 오사카대학교 공습으로 많은 한국인이 사망.간신히 장수한 사람도 많았다.이쿠노구에서 종합상사를 경영해 온 폰·요표씨는, 재일 한국인의 생활을 기록한 책 「재일 일세의 기억」(강상중, 작은 곰 에이지저)로, 「(공습 후) 피난할 때, 주변에 시체가 산과 같이 쌓여 있었다」라고 해, 「지옥 그림과는 이런 것일지도라고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


 도쿄를 시작해 카나가와, 큐슈 등에도 소규모의 한국인 부락이 있었지만, 일본 전역의 한국인의 거점의 역할을 한 오사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재일 코리안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져널리스트의 고찬유(코우·체뉴우)씨는 한겨레에 「이쿠노구를 중심으로 한국인이 집단 거주하고 있던 오사카는, 1923년의 관동 대지진에 있어서의 한국인대학살 사건을 시작해 강제 동원의 피해자등이, 동포 사회를 믿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피난소였다」라고 말했다.해방 후에는 한국 현대사의 참극인 제주 4·3 사건을 피해 제주도민 1 만여명이 살아 남기 위해서 이주한 토지이기도 했다.1944년에 200 만여명에 이른 재일 한국인은, 해방 직후에도 오사카를 시작해 일본 전역에 60 만여명이 남았다.1950년의 한국 전쟁 발발등에서 혼란한 한반도 정세 때문에, 귀국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한일은 1965년에 한일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을 체결해 국교를 회복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고 있지 않다.일본군 「위안부」피해 문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 문제 등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조약과 협정을 연결한 것으로, 그 후도 계속 된 양국 관계에 있어서의 알력의 원인이 되어 있다.


 재일 코리안의 생활도 어려웠다.국교 정상화 후도 변함 없이 차별이 계속 되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을 할 때에, 범죄자에게만 의무화되고 있던 「지문 날인」을 재일 동포에게도 강요했다.주소 변경을하지 않거나,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하지 않았다고의 이유로, 심문 혹은 체포되기도 했다.착실한 일을 찾아내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많은 사람이 불용품이나 쓰레기, 고물을 취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세웠다.일부는 일본인이 손을 대는 것을 경원하는 파칭코나 「샐러리맨 금융」업계에도 뛰어들었다.


 세금은 담고 있는데, 지방 자치체의 선거를 포함한 참정권은 지금도 인정되지 않았다.한국은 2006년부터 자치체 선거에 있어서의 외국인 주민의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다.일본의 보수 단체는 재일 코리안이 많은 지역에서 「죽을 수 있다」등의 말을 외치면서 「헤이트 스피치」를 펼쳐 재일 코리안들은 공포에 무서워했다.


 재외 한국인 학회의 임·욘 온 회장(전남 대학교수)은 「올드 솥-의 재일 코리안 일세·2세가 점차 줄어 들어,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3세·4세와(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후에 정착한 한국인의) 신참자가 부상해, 재일 코리안 사회의 색이 진하지 않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 데다가, 「그들 스스로가 결속을 도모해, 한국 정부도 그들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행정·외교적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오사카/폰·소크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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