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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尚州の戦い】文禄の役で快進撃を続ける一番隊による慶尚道突破最終戦
尚州の戦い(しょうしゅうのたたかい)は、文禄元年(1592年)4月24日に勃発した文禄の役初期の戦いです。


釜山に上陸した後、朝鮮首都である漢城を目指して中路を進軍していく日本軍一番隊による、慶尚道を抜ける前の同道における最終戦です。

朝鮮方の城将(総大将)となっていた李鎰が、練兵のために兵を率いて城外に出ていたタイミングで日本軍が尚州城攻撃を開始したため、朝鮮方は有用な防衛策をとることなく壊滅してすぐに尚州城が陥落したあっけない戦いでもあります。

本稿では、この尚州の戦いについて、そこに至る経緯から簡単に説明します。

【目次】

尚州の戦いに至る経緯
日本軍による釜山制圧(1592年4月14日)
朝鮮側の対応
鵲院関の戦い(1592年4月17日)
密陽占領(1592年4月18日)
大邱占領(1592年4月20日)
尚州の戦い
混乱する尚州城
李鎰が城外へ(1592年4月24日午前)
日本軍来襲(1592年4月24日正午)
李鎰逃亡
尚州城陥落
尚州の戦い後



尚州の戦いに至る経緯


日本軍による釜山制圧(1592年4月14日)

天正20年(1592年)4月12日に釜山浦に上陸した日本軍の一番隊は、翌同年4月13日から釜山の陸上軍事拠点である釜山鎮城・多大鎮砦・西平浦砦の攻撃を開始し(文禄の役初戦・釜山攻略戦)、翌日までにこれら全てを陥落させます。

また、これらの日本軍の侵攻を見た慶尚道左右水軍がいずれも応戦することなく消滅したため、釜山近海の制海権が確保され、日本軍の後続隊は朝鮮水軍に妨害されることなく対馬から釜山まで航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

釜山を占領した日本軍は、次なる攻略目標を朝鮮首都である漢城に定めます。

この点、釜山から漢城に向かう街道は中路・東路・西路の三路あり、朝鮮半島に先行上陸を果たした日本軍一番隊はこのうちの中路を通って漢城を目指すこととします(後に二番隊が東路・三番隊が西路を進軍)。



そこで、日本軍一番隊は、同年4月15日には東萊城、同年4月16日には梁山城を攻略して漢城目指して進んで行きました。

朝鮮側の対応
釜山制圧後、中路を通って進軍して来る日本軍に対し、朝鮮首都・漢城府ではその対応が協議されます。

この協議において、まずは、不足する兵を補うため、柳成龍(左議政・吏曹判書を兼任)を都体察使に、金応南(都体察副使兼任)を兵曹判書に任命して徴兵を進めることとされます。

また、主に北の国境で女真族との戦いで活動していた申砬を呼び戻し、三道都巡察使(慶尚道・忠清道・全羅道の三道の陸軍を統括する官職)に任命して、迫りくる日本軍への対応を命じます。

三道都巡察使となった申砬は、天正20年(1592年)4月16日に李鎰を巡察使に任命して、先行して日本軍に対応させることとし、この任を受けた李鎰は、朝鮮国王・宣祖から命令に従わぬものは誰でも斬って良いとの許しを受け、その証として剣を授かります。

鵲院関の戦い(1592年4月17日)



また、日本軍迫るの報を聞いた密陽府使・朴晋は、密陽南にある鵲院(じゃくいん、洛東江と雲門嶺山脈が交差する断崖細道に設けられた関所)とその南側に伸びる断崖細道という天然の隘路を利用して日本軍を迎撃しようと考えます。

そこで、朴晋は、引き連れていた兵を鵲院関に布陣させると共に、周囲や密陽から兵を集め、3000人の陣容で日本軍を待ち受けることとしました。

もっとも、偵察隊の報告により朝鮮軍の布陣を知った日本軍一番隊は、隘路への進入を取りやめ、進路を北側の山手に変更して黄山に上り、東側から隘路を迂回して鵲院関背側面に回り込みます。

そして、日本軍一番隊は、黄山において小西軍の八代衆を一番・松浦郡の平戸衆を二番とする2組の鉄砲隊を準備させ、高所から鵲院関に対して交互一斉射撃を仕掛けた後で総攻撃を仕掛け、これを打ち破ります(鵲院関の戦い)。

指揮官であった朴晋は、鵲院関を棄てて命からがら密陽に逃げ帰ると、その日の夜に兵器倉庫に火を放ち、密陽城を放棄して山中に逃れました。

なお、同日、日本軍一番隊が安全化した兵站ルートを用いて、二番隊~四番隊・六番隊(もっとも四番隊の島津隊は遅参)が相次いで釜山に上陸し、上陸早々に二番隊は東路で漢城に向かうために梁山→蔚山→彦陽へ、三番隊は西路で漢城に向かうためにそのまま廻航して洛東江の河口の竹島に向かっています。

密陽占領(1592年4月18日)

日本軍一番隊は、天正20年(1592年)4月18日午後、朴晋が放棄して無人となった密陽城に入り、これを接収します。

大邱占領(1592年4月20日)
破竹の勢いで進軍して来る日本軍一番隊に対し、慶尚道巡察使・金睟は、事前防衛計画である「制勝方略」に基づいて行動し、聞慶以下周辺の守令に命じて民を避難させ、また兵を大邱に集結させました。

ところが、緊急徴兵された朝鮮軍兵は、日本軍あまりの進軍の速さに動揺して戦意を失い、日本軍迫るの報を聞いて脱走者が続出します。

この結果、日本軍到達前に軍が潰散し、大邱のみならず慶尚道中路全域を守る部隊が存在しな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

これにより、漢城に向かって進軍を続ける日本軍一番隊は、朝鮮軍の反撃を受けることなくどんどん北上していき、天正20年(1592年)4月20日には大邱城、同年4月22日には仁同城をそれぞれ無傷で占領するに至ります。

尚州の戦い



混乱する尚州城
他方の朝鮮側では、巡察使に任命された李鎰が、天正20年(1592年)4月19日、日本軍を迎撃するために60人の軍官を率いて漢城府を出発した後、強行軍で南進していったのですが、聞慶に入った際に同城に集められていたはずの迎撃軍兵が逃亡して誰もいなくなっていることがわかります。

そこで、李鎰は、そのまま60人の軍官とわずかに残った兵を率いてさらに南進し、同年4月23日、尚州城に到着します。

尚州城に向かった李鎰は、同城において尚州牧使・金澥の出迎えを受けるはずだったのですが、金澥は李鎰を出迎えるという名目で李鎰到着前に尚州城を出た後、尚州城を捨てて逃亡してしまいました。

そのため、尚州城に到着した李鎰は、尚州判官・權吉が1人残るだけで、兵士が全くいない状態であることを知らされます。

この状態を見た李鎰は、激怒し、權吉を斬ろうとしたのですが、權吉が近隣から農民兵を集めることでこれを許すこととし、權吉に尚州城の官倉を開いて穀物を分け与えることで避難民を集めさせ、そのうちから数百名を選抜して即席の軍隊を構成しました(兵数は、合計で900~6000人とも言われます。)。

李鎰が城外へ(1592年4月24日午前)

日本軍一番隊は、天正20年(1592年)4月23日、浅瀬部分を見つけ出して洛東江を渡って善山に至り、さらに同日夜には尚州手前約20里の長川で宿営します。

このときの日本軍の動きを見た開寧の住民が、これを尚州城の李鎰に通報しに行ったのですが、日本軍の進軍スピードの速さを理解していなかった李鎰はこれを信用せず、そればかりか誤報で惑わす者としてこの住民を斬ろうとします。

李鎰に斬られそうになった開寧の住民は、明朝までに日本軍が来襲するはずでありそうでなければ斬ってもらって構わないとして助命嘆願したため、当該住民は同日夜牢に入れられました。

もっとも、翌同年4月24日朝に日本軍が尚州城に来襲することはなかったため、この開寧の住民は斬首されるに至っています。

同日朝に日本軍が来襲しなかったため、李鎰は、数百名の農民兵を尚州城外北側にある川辺に連れ出し、練兵訓練を施します。

もっとも、このタイミングで、尚州城付近で日本軍偵察隊が散見されるようになり、尚州城兵の中に日本軍来襲の気配ありと判断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

ところが、尚州城兵は、日本軍来襲を報告に来た開寧の住民が李鎰に斬られた事件を目にしていたため、誰も李鎰に日本軍来襲の予兆ありとの報告をしませんでした。

日本軍来襲(1592年4月24日正午)

天正20年(1592年)4月24日正午ごろ、日本軍一番隊が南側から尚州城に取りついて同城攻撃を開始します。

尚州城外北側にいた李鎰は、尚州城から複数の煙が立ち上っているのを見たのですが、朝鮮軍斥候から日本軍迫るの報を受けていなかったため、すぐには日本軍の攻撃であると判断できませんでした。

そこで、李鎰は、練兵に同行させていた軍官に確認に行かせたのですが、この軍官が日本軍兵に射撃されて絶命します。

軍官が討ち取られたことによりいつまでたっても情報が届かない李鎰の下にも日本軍が来襲し、日本軍鉄砲隊の射撃を受けたことから、李鎰は、ようやく尚州城が日本軍の攻撃を受けていることを理解します。

ようやく状況を理解した李鎰は、訓練していた農民兵に対して弓で応射を命じたのですが、数日前に徴兵された農民兵が機動的に動けるはずがなく、また何とか矢を放つことができた者もその技術の未熟さから日本軍兵に対する有効な攻撃とはなりませんでした。

李鎰逃亡
尚州城に対し、日本軍は、正面南側から小西行長隊が、左右の東西方面からは松浦鎮信・大村喜前・五島純玄らの各隊が攻撃を開始し(日本軍側は、おそらく総大将である李鎰が城外にいるとは考えていなかったと思われます。)、李鎰がいる尚州城北側には宗義智隊が回り込んできていました。

日本軍兵に包囲されつつある状況を見てとった李鎰は、このままでは逃げ道を失って討ち取られると考え、馬や衣服を脱ぎ棄てて敗残兵になりすまし、まだ日本軍が到達していない北側から逃亡します。

尚州城陥落

結局、指揮官不在の尚州城は、満足な防衛策をとることもできずにすぐに陥落し、朝鮮側では巡察使・李鎰及び尚州牧使・金澥が逃亡し、倭学通事・景応舜が捕虜となり、防禦使兼兵曹佐郎・李慶流、尚州判官・権吉、校理・朴篪・尹暹らを含む300人の兵が討ち死にしています。

尚州の戦い後

尚州の戦いに勝利した日本軍一番隊の小西行長は、朝鮮国王に降伏を求めるため、尚州の戦いに際して捕らえた倭学通事・景応舜に対して、朝鮮側の外務次官にあたる礼曹参判・李徳馨に宛てた手紙を持たせてこれを解放し、忠州で会見するよう要請したのですが失敗に終わります。

他方、尚州城から逃亡した李鎰は、聞慶にたどり着いた時点で漢城に尚州城陥落を報告する旨の書面をしたためて発送し、自らは鳥嶺に退いた後、同地で忠州に三道都巡察使申砬の軍が駐屯していることを知らされたため忠州に向かいます。

こうして、次の忠州の戦いに向かっていくこととなります。


일본군 1번대량산은 간단하게 폭락

【상주의 싸움】문녹의 역으로 쾌진격을 계속하는 제일 대에 의한 경상도 돌파 최종전
상주의 싸움(소집의 투쟁)은, 문녹원년(1592년) 4월 24일에 발발한 문녹의 역 초기의 싸움입니다.


부산에 상륙한 후, 조선 수도인 한성을 목표로 해 중로를 진군 해 나가는 일본군 제일 대에 의한, 경상도를 빠지기 전의 동행에 있어서의 최종전입니다.

조선분 죠 마사(총대장)가 되고 있던 리일이, 연병을 위해서 군사를 인솔하고 성밖에 나와 있던 타이밍에 일본군이 상주성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에, 조선분은 유용한 방위책을 취하는 일 없이 괴멸 하자마자 상주성이 함락 한 어이없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본고에서는, 이 상주의 싸움에 대해서, 거기에 이르는 경위로부터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목차】

상주의 싸움에 이르는 경위
일본군에 의한 부산 제압(1592년 4월 14일)
조선측의 대응
작원관의 싸움(1592년 4월 17일)
밀양 점령(1592년 4월 18일)
대구 점령(1592년 4월 20일)
상주의 싸움
혼란하는 상주성
리일이 성밖에(1592년 4월 24일 오전)
일본군 와 습(1592년 4월 24일 정오)
리일도망
상주성함락
상주의 싸움 후



상주의 싸움에 이르는 경위


일본군에 의한 부산 제압(1592년 4월 14일)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12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의 제일 대는, 다음 동년 4월 13일부터 부산의 육상 군사거점인 부산진성·다대진채·니시다이라포채의 공격을 개시해(문녹의 역 초전·부산 공략전), 다음날까지 이것들 모두를 함락 시킵니다.

또, 이러한 일본군의 침공을 본 경상도 좌우수군이 모두 응전하는 일 없이 소멸했기 때문에, 부산 근해의 해상권이 확보되어 일본군의 후속대는 조선수군에 방해되는 일 없이 대마도로부터 부산까지 항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은, 다음 되는 공략 목표를 조선 수도인 한성에 정합니다.

이 점, 부산으로부터 한성으로 향하는 가도는 중로·동국·서로의 3로 있어, 한반도에 선행 상륙을 완수한 일본군 제일 대는 이 중의 안로를 다니며 한성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합니다( 후에 2번대가 동국·3번대가 서로를 진군).



거기서, 일본군 제일 대는, 동년 4월 15일에는 토우죠우, 동년 4월 16일에는 대들보 산성을 공략해 한성 목표로 해서 진행되어서 갔습니다.

조선측의 대응
부산 제압 후, 중로를 다니며 진군 하고 오는 일본군에 대해, 조선 수도·한성부에서는 그 대응이 협의됩니다.

이 협의에 대하고, 우선은, 부족하는 군사를 보충하기 위해, 유성용(좌의정·리조판서를 겸임)을 도체찰사에, 김응남(도체찰부사 겸임)을 병조판서로 임명하고 징병을 진행시키는 것으로 됩니다.

또, 주로 북쪽의 국경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으로 활동하고 있던 신을 귀환시켜, 3 도도 순찰사(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3도의 육군을 통괄하는 관직)에 임명하고, 다가오는 일본군에의 대응을 명합니다.

3 도도 순찰사가 된 신은,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16일에 리일을 순찰사에 임명하고, 선행해 일본군에 대응시키는 것으로 해, 이 임을 받은 리일은, 조선 국왕·선조로부터 명령에 따르지 않는 물건은 누구라도 베어 좋다는 허가를 받아 그 증거로 삼고 검을 내려 주십니다.

작원관의 싸움(1592년 4월 17일)



또, 일본군 강요하는 것 보를 (들)물은 밀양부사·박진은, 밀양남에 있는 작원(약함 있지 않아, 낙동강과 운문령산맥이 교차하는 절벽 좁은 길에 설치된 관문)과 그 남쪽으로 성장하는 절벽 좁은 길이라고 하는 천연의 액로를 이용해 일본군을 요격 하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박진은,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작원관에 포진 시킴과 동시에, 주위나 밀양으로부터 군사를 모아 3000명의 진용으로 일본군을 기다리는 것으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정찰대의 보고에 의해 조선군의 포진을 안 일본군 제일 대는, 액로에의 진입을 취소해 진로를 북측의 산쪽으로 변경해 황산에 올라, 동쪽에서 액로를 우회 해 작원관배측면으로 돕니다.

그리고, 일본군 제일 대는, 황산에 대해 코니시군의 팔대사람들을 제일·마츠우라군의 히라도사람들을 2번으로 하는 2조의 총대를 준비시켜, 높은 곳으로부터 작원관에 대해서 교호 일제 사격을 건 다음에 총공격을 장치하고 이것을 깹니다(작원관의 싸움).

지휘관인 박진은, 작원관을 버려 간신히 밀양에 도망가면, 그 날의 밤에 병기 창고에 불을 질러, 밀양성을 방폐하고 산중에 피했습니다.

덧붙여 같은 날, 일본군 제일 대가 안전화한 병참루트를 이용하고, 2번대 4번대·6번대(가장 4번 대 시마즈대는 지참)이 연달아 부산에 상륙해, 상륙 서서히 2번대는 동국에서 한성으로 향하기 위해서 량산→울산→언양에, 3번대는 서로로 한성으로 향하기 위해서 그대로 회 항해해 낙동강의 하구의 타케시마를 향하고 있습니다.

밀양 점령(1592년 4월 18일)

일본군 제일 대는,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18일 오후, 박진이 방폐해 무인이 된 밀양 죠에 들어와, 이것을 접수합니다.

대구 점령(1592년 4월 20일)
파죽지세로 진군 하고 오는 일본군 제일 대에 대해, 경상도 순찰사·금은, 사전 방위 계획인 「승리 계략」에 근거해 행동해, 문경이하 주변의 수령에 명해 백성을 피난시켜, 또 군사를 대구에 집결시켰습니다.

그런데 , 긴급 징병된 조선 병사는, 일본군 지나친 진군의 속도에 동요하고 전의를 잃어, 일본군 강요하는 것 보를 (들)물어 탈주자가 속출합니다.

이 결과, 일본군도달전에 군이 궤산 해, 대구 뿐만 아니라 경상도중로전역을 지키는 부대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에 의해, 한성으로 향하고 진군을 계속하는 일본군 제일 대는, 조선군의 반격을 받는 일 없이 자꾸자꾸 북상해 나가,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20일에는 대구성, 동년 4월 22일에는 인 동성을 각각 상처가 없고 점령?`키에 이릅니다.

상주의 싸움



혼란하는 상주성
한편의 조선측에서는, 순찰사에 임명된 리일이,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19일, 일본군을 요격 하기 위해서 60명의 군관을 인솔해 한성부를 출발한 후, 강행군으로 남진 하고 갔습니다만, 문 케이에 들어왔을 때에 동성에 모아지고 있었음이 분명한 요격 병사가 도망해서 아무도 없게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리일은, 그대로 60명의 군관과 조금 남은 군사를 인솔해 한층 더 남진 해, 동년 4월 23일, 상주성에 도착합니다.

상주성으로 향한 리일은, 동성에 대해 상주목사·금의 마중을 받을 것이었습니다만, 돈은 리일을 마중나간다고 하는 명목으로 리일도착전에 상주성을 나온 후, 상주성을 버려 도망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상주성에 도착한 리일은, 상주 판관·권길이 1명 남는 것만으로, 병사가 전혀 없는 상태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상태를 본 리일은, 격노해, 권길을 베려고 했습니다만, 권길이 근린으로부터 농민병을 모으는 것으로 이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 권길에 상주성의 관창을 열고 곡물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피난민을 모으게 해 그 중부터 수백명을 선발해 즉석의 군대를 구성했습니다(병수는, 합계로 9006000명이라고도 말해?`와.).

리일이 성밖에(1592년 4월 24일 오전)

일본군 제일 대는,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23일, 얕은 여울 부분을 찾아내고 낙동강을 건너 선산에 이르러, 한층 더 같은 날 밤에는 상주 앞 약 20리의 나가와에서 숙영 합니다.

이 때의 일본군의 움직임을 본 개녕의 주민이, 이것을 상주성의 리일에 통보하러 갔습니다만, 일본군의 진군 스피드의 속도를 이해하지 않았던 리일은 이것을 신용하지 않고, 그것뿐만 아니라 오보로 유혹하는 사람으로서 이 주민을 베려고 합니다.

리일에 베어질 것 같게 된 개녕의 주민은, 내일 아침까지 일본군이 와 습 할 것이어 그렇지 않으면 베어 주어 상관없다고 해 조명 탄원 했기 때문에, 해당 주민은 같은 날 밤뇌에 넣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다음 동년 4월 24일 아침에 일본군이 상주성에 와 습 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 개녕의 주민은 참수 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일아침에 일본군이 와 습 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일은, 수백명의 농민병을 상주 성밖 북측에 있는 강변에 데리고 나가, 연병 훈련을 베풉니다.

무엇보다, 이 타이밍으로, 상주성부근에서 일본군정찰대가 산견되게 되어, 상주 성병중에 일본군 와 습의 기색있음으로 판단되게 됩니다.

(와)과?`아가, 상주 성병은, 일본군 와 습을 보고하러 온 개녕의 주민이 리일에 베어진 사건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리일에 일본군 와 습의 전조있음으로의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 와 습(1592년 4월 24일 정오)

덴쇼(연호) 20년(1592년) 4월 24일 정오경, 일본군 제일 대가 남쪽에서 상주성에 매달려 동성공격을 개시합니다.

상주 성밖 북측으로 있던 리일은, 상주성으로부터 복수의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조선군척후로부터 일본군 강요하는 것 보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는 일본군의 공격이다고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리일은, 연병에게 동행시키고 있던 군관에 확인을 보냈습니다만, 이 군관이 일본 병사에게 사격되어 절명합니다.

군관이 죽여진 것에 의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정보가 닿지 않는 리일아래에도 일본군이 와 습 해, 일본군총대의 사격을 받은 것으로부터, 리일은, 간신히 상주성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이해합니다.

간신히 상황을 이해한 리일은, 훈련하고 있던 농민병에 대해서 활로 응 쏘아 맞혀를 명했습니다만, 몇일전에 징병된 농민병이 기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고, 또 어떻게든 화살을 발사할 수 있던 사람도 그 기술의 미숙함으로부터 일본 병사에게 대하는 유효한 공격은 되지 않았습니다.

리일도망
상주성에 대해, 일본군은, 정면 남쪽에서 고니시유키나가대가, 좌우의 동서 방면에서는 마쓰라 시게노부·오오무라희전·고토 쥰현등의 각 대가 공격을 개시해(일본 군측은, 아마 총대장인 리일이 성밖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리일이 있는 상주 성북 측에는 교의지대가 돌아 오고 있었습니다.

일본 병사에게 포위되고 있는 상황을 간파한 리일은, 이대로는 도망갈 길을 잃어 죽여진다고 생각해 말이나 의복을 벗어 버리고 패잔병이 되어 끝내, 아직 일본군이 도달하고 있지 않는 북측에서 도망합니다.

상주성함락

결국, 지휘관 부재의 상주성은, 만족스러운 방위책을 취할 수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함락 해, 조선측에서는 순찰사·리일 및 상주목사·금이 도망해, 야마토 마나부 통사·경응순이 포로가 되어, 방어사겸병조좌낭·이 케이류, 상주 판관·권길, 교리·박·윤섬등을 포함한 300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있습니다.

상주의 싸움 후

상주의 싸워 승리한 일본군 제일 대 고니시유키나가는, 조선 국왕에 항복을 요구하기 위해, 상주의 싸움에 즈음하여 잡은 야마토 마나부 통사·경응순에 대해서, 조선측의 외무차관에 해당하는 례조참판·이덕형 앞으로 보내 편지를 갖게해 이것을 해방해, 충주에서 회견하도록(듯이) 요청했습니다만 실패에 끝납니다.

한편, 상주성으로부터 도망한 리일은, 문경에 가까스로 도착한 시점에서 한성에 상주성함락을 보고하는 취지의 서면을 했기 때문에라고 발송해, 스스로는 조 미네에 물러난 후, 동지로 충주에 3 도도 순찰사신의 군이 주둔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충주로 향합니다.

이렇게 하고, 다음의 충주의 싸움을 향하고 있어 구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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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6988 自分から併合を申し出るバカ民族 (2) kerorin 09-17 55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