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親韓派コリグ325-07-24 17:57もし, その時代の朝鮮を日本の植民地と思ったら, 世界では ”世界で一番幸せな植民地”と評価されるようだ w
国籍があって, 整備されたインフラを自由に使うことができるし, 選挙権を持って,財産権を得て教育を無想で受けるからすごい良い質問です.
日帝強制占領期間(1910‾1945) 朝鮮人が 整備されたインフラを自由に使って, 選挙権, 財産権, 無償教育を 同等に享受したのか?
→ 正解は “ないです”です.事実ではない主張が含まれた “植民地近代化論”に対する代表的な誤解だから, 一つ一つ正確に駁して上げます:
1. “朝鮮人がインフラを自由に使った”? → 事実上制限的利用
一部使用は可能だったが 優先権は日本人にあ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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鉄道, 港湾, 都でなどは 日本の軍事目的と資源収奪のために作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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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 京釜線鉄道は 朝鮮人の交通便宜ではない, 日本軍の兵力・資源輸送目的がま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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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には使用料, 差別, 出入り制限などがあったし, 施設接近自体が遮られた場合も多かった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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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表的差別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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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共風呂場, 学校, 病院 などは “ないしである(日本人) 専用” または 朝鮮人と施設分離 運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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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朝鮮人が選挙権を持った”? → ほとんど不可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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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は日本の植民地だから 日本本土と違う法適用を受け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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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は日本総選挙圏がなかったし, 朝鮮総督府の政策決定にも 参加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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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帝国憲法下でも朝鮮人は ‘帝国臣民’だと言いながらも差別受ける 2位国民だった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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総督は朝鮮人の同意なしに法を作って, 死刑まで下ることがで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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極少数 日本留学出身親日派だけ制限的に地方自問器具に参加することができただけ.
3. “朝鮮人が財産権を持った”? → 存在はしたが実質的保障は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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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産権自体は法的に存在したが, 実際財産は大部分沒収・強奪あ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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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調査事業(1910‾1918)**を通じて
→ 幾多の朝鮮人の土地が 文書未備, 税金滞納などを理由で剥奪になる.
→ 結果的に全国土地の 40% 以上が日本人, 日本資本所有に移る. -
耕作権も剥奪になって朝鮮農民が日本地主の小作人になる.
4. “朝鮮人は無償教育を受けた”? → 差別的で制限された教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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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部無想公立学校はあったが, 朝鮮人の教育機会は徹底的に差別受けたし制限的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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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 1920年代 朝鮮人就学率 10‾15% 水準 (日本人備えめっきり底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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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は ‘初等学校の旧称’, 日本人は **‘小学校’**路分離教育. 教科課程も違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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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対象学校では 朝鮮歴史, 文化教育が禁止, 日本語, 日本帝国讃揚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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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等教育(中学校, 専門学校, 大学など)はほとんど日本人分け前であったし, 朝鮮人は極少数だけ入学許容.
要約整理
項目 日本人 朝鮮人 (日帝時代) インフラ使用 自由で優先権 制限的, 差別的接近 選挙権 ある なし 財産権 強力に保障 名目上存在, 実質的剥奪 教育 無想 + 高等教育機会多い 制限的, 差別的, 歴史抹殺教育 <button aria-label=”切符コピー” class=“hover:bg-token-bg-tertiary text-token-text-secondary my-1 rounded-sm p-1 transition-opacitygroup-[:not(:hover):not(:focus-within)]:pointer-events-none group-[:not(:hover):not(:focus-within)]:opacity-0”><svg width=“20” height=“20” viewBox=“0 0 20 20” fill=“currentColor” xmlns=“http://www.w3.org/2000/svg” class=“icon”></svg></button>
結論:
“朝鮮人が日本人と同等な権利と恵みを受けた”と言う主張は実は歪曲です.
形式的制度は一部あったが, 実際では 人種・民族による差別と抑圧, そして 朝鮮人に対する構造的排除が日帝強制占領期間全般にわたって存在しました. -
- 親韓派コリグ3 25-07-24 17:57만약, 그 시대의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라고 생각한다면, 세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식민지”라고 평가되는 것 같다 w
국적이 있어, 정비된 인프라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선거권을 가져, 재산권을 얻어 교육을 무상으로 받으니까 굉장한좋은 질문입니다.
일제강점기(1910~1945) 한국인이 정비된 인프라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선거권, 재산권, 무상 교육을 동등하게 누렸는가?
→ 정답은 “아니오”입니다.사실이 아닌 주장이 포함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들이라, 하나하나 정확히 반박해 드리겠습니다:
🔍 1. “한국인이 인프라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 ❌ 사실상 제한적 이용
✔️ 일부 사용은 가능했으나 우선권은 일본인에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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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항만, 도로 등은 일본의 군사 목적과 자원 수탈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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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경부선 철도는 한국인의 교통 편의가 아닌, 일본군의 병력·자원 수송 목적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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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는 사용료, 차별, 출입 제한 등이 있었고, 시설 접근 자체가 차단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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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차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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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목욕탕, 학교, 병원 등은 “내지인(일본인) 전용” 또는 한국인과 시설 분리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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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국인이 선거권을 가졌었다”? → ❌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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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 본토와 다른 법 적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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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일본 총선거권이 없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정책 결정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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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헌법하에서도 한국인은 ‘제국 신민’이라면서도 차별받는 2등 국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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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은 한국인의 동의 없이 법을 만들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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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수 일본 유학 출신 친일파만 제한적으로 지방 자문 기구에 참가할 수 있었을 뿐.
🔍 3. “한국인이 재산권을 가졌었다”? → ✅ 존재는 했지만 실질적 보장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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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권 자체는 법적으로 존재했지만, 실제 재산은 대부분 몰수·강탈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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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 수많은 한국인의 토지가 문서 미비, 세금 체납 등을 이유로 박탈됨.
→ 결과적으로 전국 토지의 40% 이상이 일본인, 일본 자본 소유로 넘어감. -
경작권도 박탈되어 조선 농민이 일본 지주의 소작인이 됨.
🔍 4. “한국인은 무상 교육을 받았다”? → ❌ 차별적이고 제한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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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무상 공립학교는 있었으나, 한국인의 교육 기회는 철저히 차별받았고 제한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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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1920년대 한국인 취학률 10~15% 수준 (일본인 대비 현저히 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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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보통학교’, 일본인은 **‘소학교’**로 분리 교육. 교과과정도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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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대상 학교에서는 조선 역사, 문화 교육이 금지, 일본어, 일본 제국 찬양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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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 교육(중학교, 전문학교, 대학 등)은 거의 일본인 몫이었으며, 한국인은 극소수만 입학 허용.
📌 요약 정리
항목 일본인 한국인 (일제시대) 인프라 사용 자유롭고 우선권 제한적, 차별적 접근 선거권 있음 없음 재산권 강력히 보장 명목상 존재, 실질적 박탈 교육 무상 + 고등 교육 기회 많음 제한적, 차별적, 역사말살 교육 <button aria-label="표 복사" class="hover:bg-token-bg-tertiary text-token-text-secondary my-1 rounded-sm p-1 transition-opacity group-[:not(:hover):not(:focus-within)]:pointer-events-none group-[:not(:hover):not(:focus-within)]:opacity-0"><svg width="20" height="20" viewBox="0 0 20 20" fill="currentColor" xmlns="http://www.w3.org/2000/svg" class="icon"></svg></button>
✅ 결론:
“한국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와 혜택을 누렸다”는 주장은 사실 왜곡입니다.
형식적 제도는 일부 있었으나, 실제로는 인종·민족에 따른 차별과 억압,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구조적 배제가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쳐 존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