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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万人のユダヤ人を救った日本人

 映画化(シンドラーのリスト)された事で、1200人のユダヤ人を救った人物としてOskar Schindler は有名ですが、日本人にも、多くのユダヤ人を救った人物がいます。6千人を救った外交官・杉原千畝、そして、樋口季一郎 は2万人のユダヤ人を救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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樋口季一郎

ユダヤ難民、2万人を救った日本人

 ナチス・ドイツの迫害から逃れる6000人のユダヤ人難民にビザを不眠不休で発給してその命を救った杉原千畝 領事代理の名前を知らない人はいないであろう。ところで、かつて、2万人ものユダヤ人の命を救った軍人が居た事をご存知だろうか。その人の名は、樋口季一郎。当時、満州国でハルビン特務機関長を務めていた。

 事件は昭和13年(1938年)3月8日に起こった。ナチスの迫害から逃れ、シベリア鉄道の貨車に乗り込み一路上海を目指すユダヤ人難民がソ満国境の駅オトポールに終結し、満州国への入国を求めたのである。その数、20000人。突然の事であった。満洲国が入国を拒否したため、雪の中で前に進めずに立ち往生していた。食糧はすでに尽き、飢餓と寒さのために凍死者が続出。それは危機的な情況であった。

 樋口は同胞の窮状を訴えに来たハルピンのユダヤ人協会会長・カウフマン博士にこの状況を聞くと「何という事だ・・・。満洲国は独立国家としての自主性を全く失っている。満洲建国の理想として世界に掲げた旗印は「五族協和」であり、「万民安居楽業」ではなかったか。」「博士、分かりました。誰が何と言おうと、私が引き受けた」樋口はすぐに満鉄本社の松岡総裁を呼び出し、列車の交渉を始めた。

 満洲国外務部(外務省)を飛び越えて、独断でユダヤ人を受け入れるのは、明らかな職務権限逸脱である。

 樋口季一郎は一介の特務機関長にすぎなかったが、関東軍司令部に何の許しも得ずに独断で満鉄を動かし救援列車を満州里に急行させた。

 2日後の3月12日。ハルピン駅では列車の到着を待つカウフマン博士をはじめ、十数人のユダヤ人協会の幹部が、救護班を指図しながら、温かい飲み物や、衣類などの点検に忙しそうに動きまわっていた。

 やがて、轟然たる地響きを立てて、列車がホームに滑り込んで来た。痩せた髭だらけの顔が、窓に鈴なりになって並んでいる。期せずして、激しいどよめきの声が、ホーム一杯に広がった。列車が停止すると、救護班が真っ先に車内に飛び乗った。病人や凍傷で歩けない人たちが、次々にタンカで運び出されてくる。

 相擁して泣き崩れる難民たち。痩せ細った子供たちは、ミルクの入った瓶をみると、狂ったように、泣きだした。
「良かった。本当に良かった!」カウフマン博士は、涙で濡れた顔をぬぐおうともせず、ホームを走りまわって、傷ついた難民にいたわりの声をかけている。

 数刻後、樋ロは、オトポールの難民全てが、ハルピンに収容されたという報告を受けた。凍死者は十数人、病人と凍傷患者20数名を除いた全員が、商工クラブや学校に収容され、炊き出しを受けているという。医師たちは救援列車の手配が、もう一日遅れたら、これだけの犠牲者では済まなかっただろうと言った。

 難民の8割は大連、上海を経由してアメリカへ渡っていったが、あとの4千人は開拓農民として、ハルピン奥地に入植することになった。樋口は部下に指示し、それらの農民のために、土地と住居をあっせんするなど、最後まで面倒を見た。

 後日、樋口の難民保護に対してドイツから強硬な抗議がきた。ヒトラー総統の計画と理想を妨害する行為だと文書が来た。関東軍司令部からの出頭命令が樋口に下った。そこで樋口は東条英機 参謀長に対して次のような意見を述べた。

 「日満両国が非人道的なドイツの国策に協力するのは人倫の道に背くものであるといわねばならない。わたしは日独間の親善と友好は希望するが、日本はドイツの属国ではないし、満州国もまた日本の属国ではない。すべからく対等な立場に立って、人道的な国策をまっとうすべきである」「東条参謀長!ヒトラーの言いなりになって、弱い者虐めをすることを、正しいとお思いになりますか?」
東条は、ぐっと返事につまり、天井を仰ぐしぐさをしてから、言った。
「樋口君、よく分かった。あなたの話は最もである。筋が通っている。私からも中央に対し、この問題は不問に付すように伝えておこう。」

 樋口は不問とされた。


 その後、樋口は、参謀本部第二部長、第五方面軍の司令官を歴任し終戦にいたる。第五方面軍では、終戦後に樺太と北千島におけるソ連軍の侵略に徹底抗戦、占守島においてソ連軍を撃退して北海道への上陸を阻止した。

 1942年(昭和17年) 8月1日、札幌に司令部を置く北部軍(のち北方軍・第5方面軍と改称) 司令官として北東太平洋陸軍作戦を指揮。アッツ島玉砕、キスカ島撤退、敗戦後の占守島、樺太における戦闘を指揮し、占守島の戦いではソ連軍千島侵攻部隊に打撃を与えた。そのためスターリンは当時軍人として札幌に在住していた樋口を戦犯に指名した。


 世界ユダヤ協会はいち早くこの動きを察知して、世界中のユダヤ人コミュニティーを動かし、在欧米のユダヤ人金融家によるロビー活動も始まった。世界的な規模で樋口救出運動が展開された結果、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はソ連からの引き渡し要求を拒否して、樋口の身柄を保護した。

「オトポールの恩を返す時が来たぞ」
 ユダヤ協会には、あのオトポールの駅で命を救われた人々がいたのだ。彼らは、樋口の身を守りきったのであった。エルサレムの丘に立つゴールデン・ブックに刻まれた「偉大なる人道主義者、ゼネラル・樋口」の銘はその証である。






 遡る事、8月にハルピンに赴任してきたばかりのハルピン特務機関長・樋口季一郎少将は、着任早々、「満洲国は日本の属国ではないのだ。だから満洲国、および、満洲国人民の主権を尊重し、よけいな内部干渉をさけ、満人の庇護に極力努めるようにしてほしい。」と部下に訓示し、「悪徳な日本人は、びしびし摘発しろ」と命じた。カウフマン博士は、その樋口に重大な頼み事を持ってきたのである。

 それは、ハルピンで極東ユダヤ人大会を開催するのを許可して欲しいということだった。ナチス・ドイツのユダヤ人迫害の暴挙を世界の良識に訴えたいというでのある。

 樋口はハルピンに来る前にドイツに駐在し、ロシアを旅行して、ユダヤ人達の悲惨な運命をよく知っていた。樋口は即座に快諾し、博士を励ました。

 翌13年1月15日、ハルピン商工倶楽部で、第一回の極東ユダヤ人大会が開催された。東京・上海・香港から、約2千人のユダヤ人が集まった。樋口も来賓として招待されたが、部下は身の危険を心配して辞退するよう奨めた。

 当時のハルピンでは、白系ロシア人とユダヤ人の対立が深刻化しており、治安の元締めである機関長がユダヤ人大会に出席しては、ロシア人過激分子を刺激して、不祥事を引き起こす恐れがあったからだ。

 しかし、樋口は構わず出席し、カウフマン博士から求められる来賓としての挨拶をした。「ヨーロッパのある一国は、ユダヤ人を好ましからざる分子として、法律上同胞であるべき人々を追放するという。いったい、何処へ追放しようというのか。追放せんとするならば、その行先をちゃんと明示し、あらかじめそれを準備すべきである。当然取るべき処置を怠って、追放しようとするのは虐殺に等しい行為と、断じなければならない。私は個人として、このような行為に怒りを覚え、心から憎まずにはいられない。ユダヤ人を追放する前に、彼らに土地を与えよ! 安住の地を与えよ! そしてまた、祖国を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

 演説が終わると、すさまじい歓声がおこり、熱狂した青年が壇上に駆け上がって、樋口の前にひざまずいて号泣し始めた。協会の幹部達も、感動の色を浮かべ、つぎつぎに握手を求めてきた。


 大会終了後、ハルピン駐在の各国特派員や新聞記者達が、いっせいに樋口を包囲した。イギリス系の記者が、核心をついた質問をしてきた。

「樋口少佐の演説は、日独伊の三国の友好関係にあきらかに水を差すような内容である。そこから波及する結果を承知してして、あのようなことを口にしたのか。」

 樋口はまわりを取り囲んだ十数人の新聞記者やカメラマンにやわらかい微笑をかえして言った。

 「日独関係は、あくまでもコミンテルンとの戦いであって、ユダヤ人問題とは切りはなして考えるべきである。祖国のないユダヤ民族に同情的であるということは、日本人の古来からの精神である。日本人はむかしから、義をもって、弱きを助ける気質を持っている。」


 「今日、ドイツは血の純血運動ということを叫んでいる。しかし、それだからといって、ユダヤ人を憎み、迫害することを、容認することはできない。世界の先進国が祖国のないユダヤ民族の幸福を真剣に考えてやらない限り、この問題は解決しないだろう。」

 樋口の談話は、それぞれの通信網をへて、各国の新聞に掲載された。関東軍司令部内部からは、特務機関長の権限から逸脱した言動だとの批判があがったが、懲罰までには至らなかった。ユダヤ人迫害は人種平等の国是に反するという国家方針に沿ったものであったからであろう。




ゴールデンブック表紙



●本来、ユダヤ人しか登録されないはずの『ゴールデン・ブック』に、なぜか日本人が登録されている。1997年現在、日本人の被登録者は次の6人と伝えられる。


安江仙弘(元陸軍大佐)
樋口季一郎(元陸軍中将)
小辻節三(ヘブライ語学者)
内田康哉(元外務大臣)
手島郁郎(テント主義の創始者)
古崎博(株式会社「近東」社長)

●元海軍大佐で海軍の「ユダヤ問題専門家」の犬塚惟重氏も、『ゴールデン・ブック』に記録される予告を受けたそうだが、当人は辞退したという。その後もいろいろな形で犬塚氏の功績を顕彰する計画がユダヤ人の間で行なわれたが、当人がこれを受けなかったので、のちにアメリカのユダヤ教会から、氏のユダヤに対する功労を讃えて彫刻した「銀製煙草入ケース」を贈られ、彼は大切にそれを保存していたという。



쉰들러-의 17배의 유태인을 구한 일본인

2만명의 유태인을 구한 일본인

 영화화(쉰들러-의 리스트)된 일로,1200명의 유태인을 구한 인물로서 Oskar Schindler 는 유명합니다만, 일본인에도, 많은 유태인을 구한 인물이 있습니다.6천명을 구한 외교관·스기하라천민, 그리고,히구치 키이치로우는 2만명의 유태인을 구했습니다.


한국어 wiki의 히구치 키이치로우의 페이지→ Link

히구치 키이치로우

유태 난민, 2만명을 구한 일본인

 나치스·독일의 박해로부터 피하는 6000명의 유태인 난민에게 비자를 불면 불휴로 발급해 그 생명을 구한스기하라천민 영사 대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런데, 일찌기,2만명의 유태인의 생명을 구한 군인이 있던일을 아시는 바일까.그 사람의 이름은,히구치 키이치로우.당시 , 만주국에서 하얼빈 특무 기관장을 맡고 있었다.

 사건은 쇼와 13년(1938년) 3월 8일에 일어났다.나치스의 박해로부터 피해 시베리아 철도의 화차에 탑승해 일로 샹하이를 목표로 한다유태인 난민이 소만국경의 역 소리 폴에 종결해, 만주국에의 입국을 요구했던 것이다.그 수, 20000명.갑작스런 일이었다.만주국이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에, 눈속에서 앞에 진행하지 않고 꼼짝 못하고 있었다.식량은 벌써 다해 기아와 추위때문에 동사자가 속출.그것은 위기적인 정황이었다.

 히구치는 동포의 궁상을 호소하러 온 하얼삔의 유태인 협회 회장·카우프만 박사에 이 상황을 (들)물으면 「뭐라고 하는 일이다···.만주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완전히 잃고 있다.만주 건국의 이상으로서 세계로 내건 기치는 「5족쿄와」이며, 「만민 안거락업」이지 않았나.」 「박사, 알았습니다.누가 뭐라고 말하려고, 내가 맡았다」히구치는 곧바로 만주철도 본사의 마츠오카 총재를 호출해, 열차의 교섭을 시작했다.

 만주국 외무부(외무성)를 뛰어넘고, 독단으로 유태인을 받아 들이는 것은, 분명한 직무 권한 일탈이다.

 히구치 키이치로우는 일개의 특무 기관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관동군 사령부에 어떤 허가도 얻지 않고 독단으로 만주철도를 작동시켜 구원 열차를 만주마을에 급행시켰다.

 2일 후의 3월 12일.하얼삔역에서는 열차의 도착을 기다리는 카우프만 박사를 시작해 수십명의 유태인 협회의 간부가, 구호반을 지시하면서, 따뜻한 음료나, 의류등의 점검에 바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굉연한 땅울림을 세우고, 열차가 홈에 미끄러져 들어가 왔다.야윈 자 투성이의 얼굴이, 창에 가득해 줄지어 있다.우연히, 격렬한 소리의 소리가, 홈 가득하게 퍼졌다.열차가 정지하면, 구호반이 맨 먼저에 차내에 뛰어 올라탔다.환자나 동상으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차례차례로 탄카로 옮겨 나온다.

 상 껴안아 쓰러져 우는 난민들.야위어 여윈 아이들은, 밀크가 들어간 병을 보면, 미친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좋았다.정말로 좋았다!」카우프만 박사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벗는 구토도 하지 않고, 홈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다친 난민가 얘기하고 있다.

 대여섯 시간 후,통로는, 소리 폴의 난민 모두가, 하얼삔에 수용되었다고 하는 보고를 받았다.동사자는 수십명, 환자와 동상 환자 20수명을 제외한 전원이, 상공 클럽이나 학교에 수용되고 식사 공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의사들은 구원 열차의 준비가, 이제(벌써) 하루 늦으면, 이만큼의 희생자에서는 미안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난민의 8할은 대련, 샹하이를 경유하고 미국에 건너고 있어 가, 나머지의 4천명은 개척 농민으로서 하얼삔 두메 산골에 이주 하게 되었다.히구치는 부하에게 지시해, 그러한 농민을 위해서, 토지와 주거를 알선하는 등, 끝까지 돌보았다.

 후일, 히구치의 난민 보호에 대해서 독일로부터 강경한 항의가 왔다.히틀러 총통의 계획과 이상을 방해하는 행위라면 문서가 왔다.관동군 사령부로부터의 출두명령이 히구치에 내렸다.거기서 히구치는 도조 히데키 참모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일만양국이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도적인 독일의 국책에 협력하는 것은 인륜의 길 을 거역하는 것이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나는일독간의 친선과 우호는 희망하지만, 일본은 독일의 속국은 아니고, 만주국도 또 일본의 속국은 아니다.모름지기 대등한 입장에 서서, 인도적인 국책와 절구 한다」 「토우죠 참모장!히틀러의 하라는 대로 되고, 약한 사람학째를 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생각하십니까?」
토우죠는, 훨씬 대답에 즉, 천정앙행동을 하고 나서, 말했다.
「히구치군, 잘 알았다.당신의 이야기는 가장이다.일리가 있고 있다.나부터도 중앙에 대해, 이 문제는 불문에 첨부같게 전달해 두자.」

 히구치는 불문으로 여겨졌다.


 그 후, 히구치는, 참모본부 제2 부장, 제5 방면군의 사령관을 역임해 종전에 이른다.제5 방면군에서는, 종전 후에 가라후토와 기타치시마에 있어서의 소련군의 침략에 철저 항전, 점모리시마에 대해 소련군을 격퇴해 홋카이도에의 상륙을 저지했다.

 1942년(쇼와 17년) 8월 1일, 삿포로에 사령부를 두는 북부군(후북방군· 제5 방면군이라고 개칭) 사령관으로서 북동 태평양 육군 작전을 지휘.앗트도옥쇄, 키스카섬철퇴, 패전 후의 점모리시마, 가라후토에 있어서의 전투를 지휘해, 점모리시마의 싸움에서는 소련군치시마 침공 부대에 타격을 주었다.그 때문에 스탈린은 당시 군인으로서 삿포로에 거주하고 있던 히구치를 전범으로 지명했다.


 세계 유태 협회는 재빨리 이 움직임을 찰지하고, 온 세상의 유태인 커뮤니티를 움직여, 재구미의 유태인 금융가에 의한 로비 활동도 시작되었다.세계적인 규모로 히구치 구출 운동이 전개된 결과, 더글라스·막카서는 소련으로부터의 인도 요구를 거부하고, 히구치의 신병을 보호했다.

「소리 폴의 은혜를 돌려줄 때가 왔어」
 유태 협회에는, 그 소리 폴의 역에서 생명을 구해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그들은, 히구치의 몸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예루살렘의 언덕에 서는 골든·북에 새겨진「위대한 인도주의자, 제너럴·히구치」의 명은 그 증거이다.






 거슬러 올라가는 일, 8월에 하얼삔에 부임해 온지 얼마 안된 하얼삔 특무 기관장·히구치 키이치로우 소장은, 착임 조속히, 「만주국은 일본의 속국은 아닌 것이다.그러니까 만주국, 및, 만주국 인민의 주권을 존중해, 쓸데없는 내부 간섭을 찢어져 만인의 비호에 극력 노력하도록(듯이) 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부하에게 훈시 해, 「악덕인 일본인은, 가차없이 적발해라」라고 명했다.카우프만 박사는, 그 히구치에 중대한 부탁일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것은, 하얼삔으로 극동 유태인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허가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나치스·독일의 유태인 박해의 폭동을 세계의 양식에 호소하고 싶다고 하는 것으로가 있다.

 히구치는 하얼삔에 오기 전에 독일에 주재해, 러시아를 여행하고, 유태인들의 비참한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히구치는 즉석에서 쾌락해, 박사를 격려했다.

 다음 13년 1월 15일, 하얼삔 상공 클럽에서, 제1회의 극동 유태인 대회가 개최되었다.도쿄·샹하이·홍콩으로부터, 약 2천명의 유태인이 모였다.히구치도 내빈으로서 초대되었지만, 부하는 신변의 위험을 걱정해 사퇴하도록(듯이) 추천했다.

 당시의 하얼삔에서는, 백계 러시아인과 유태인의 대립이 심각화하고 있어, 치안의 지배인인 기관장이 유태인 대회에 출석해서는, 러시아인 과격 분자를 자극하고, 불상사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히구치는 상관하지 않고 출석해, 카우프만 박사로부터 구할 수 있는 내빈으로서의 인사를 했다.「유럽이 있는 일국은, 유태인을 호밖에들 바구니 분자로서 법률상 동포여야 할 사람들을 추방한다고 한다.도대체, 어디에 추방하자고 하는 것인가.추방 천도한다면, 그 행선지를 제대로 명시해, 미리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당연 취해야 할 처치를 게을리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학살에 동일한 행위와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나는 개인으로서 이러한 행위에 분노를 느껴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유태인을 추방하기 전에,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서! 안주의 땅을 주어서! 그리고 또, 조국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연설이 끝나면, 굉장한 환성이 일어나, 열광한 청년이 단상에 뛰어 오르고, 히구치의 전에 무릎 꿇어 통곡하기 시작했다.협회의 간부들도, 감동의 색을 띄워 계속해서 악수를 요구해 왔다.


 대회 종료후, 하얼삔 주재의 각국 특파원이나 신문기자들이, 일제히 히구치를 포위했다.영국계의 기자가, 핵심을 대한 질문을 해?`트 왔다.

「히구치 소좌의 연설은, 일독이의 삼국의 우호 관계에 명확하게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다.거기로부터 파급하는 결과를 알고 하고, 그와 같은 것을 입에 대었는가.」

 히구치는 주위를 둘러싼 수십명의 신문기자나 카메라맨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돌려주어 말했다.

 「일독 관계는, 어디까지나 코민테른과의 싸움이며, 유태인 문제와는 절이야기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조국이 없는 유태 민족에게 동정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인의 고래부터의 정신이다.일본인은 옛날부터, 도리를 가지고, 약한 사람을 돕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오늘, 독일은 피의 순혈 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외치고 있다.그러나, 그러니까라고 하고, 유태인을 미워해, 박해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세계의 선진국이 조국의 없는 유태 민족의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해결하지 않을 것이다.」

 히구치의 담화는, 각각의 통신망을 거치고, 각국의 신문에 게재되었다.관동군 사령부 내부에서는, 특무 기관장의 권한으로부터 일탈한 언동이라는 비판이 올랐지만, 징벌까지는 도달하지 않았다.유태인 박해는 인종 평등의 국시에 반그러자(면) 하는 국가 방침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일 것이다.




골든 북 표지



●본래, 유태인 밖에 등록되지 않아야 할 「골든·북」에, 왠지 일본인이 등록되어 있다.1997년 현재, 일본인의 피등록자는 다음의 6명으로 전해진다.


야스에선홍( 전 육군 대령)
히구치 키이치로우( 전 육군 중장)
소십절3(헤브라이어 학자)
우치다 고사이(원외무 대신)
테시마욱낭(텐트 주의의 창시자)
고기박(주식회사 「근동」사장)

●전 해군 대령으로 해군의 「유태 문제 전문가」 이누즈카유중씨도, 「골든·북」에 기록되는 예고를 받았다고 하지만, 당사자는 사퇴했다고 한다.그 후도 여러가지 형태로 이누즈카씨의 공적을 현창할 계획이 유태인의 사이에 행해졌지만, 당사자가 이것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미국의 유태교회로부터, 씨의 유태에 대한 공로를 칭송해 조각한 「은제 담배입케이스」를 주어져 그는 소중히 그것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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