ピルギチェになった 6ページ分量の肉筆本は初週を題目に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朝鮮独立宣言)”と書いた. 韓日強制併合を置いて “a great blot on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世界興亡史に特筆する人類の大きい数値と同時に恥辱)”と表現して, “we shall fight to the last drop of blood(日本に対して永遠な血戦を宣言しよう)”と書くなど 2・8独立宣言書国文本の内容がそのまま盛られた. 肉筆本の筆者は確認されなかった. ただ 1919年 1月末頃留学生たちが巨事の前大韓人国民会で発送した英文草稿本である可能性に重みが加わる.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서 육필(肉筆) 영문본(육필본·사진)이 104년 만에 처음 발견됐다. 지금까지 확인된 하나뿐인 육필본 2·8독립선언서로, 춘원 이광수(1892∼1950) 등 거사를 주도한 일본 도쿄 한국인 유학생이 직접 쓴 선언서 초고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서 대여해 온 자료를 분석하다 육필본을 발견했다고 22일 밝혔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도쿄 YMCA 강당에서 한국인 유학생 600여 명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한 사건이다.
필기체로 된 6쪽 분량의 육필본은 첫줄 제목에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조선독립선언)”라고 썼다. 한일 강제병합을 두고 “a great blot on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세계 흥망사에 특필할 인류의 큰 수치이자 치욕)”라고 표현하고, “we shall fight to the last drop of blood(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라고 쓰는 등 2·8독립선언서 국문본의 내용이 그대로 담겼다. 육필본의 필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1919년 1월 말경 유학생들이 거사 전 대한인국민회로 발송한 영문 초고본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2·8독립선언서는 이광수와 최팔용(1891∼1922)을 비롯한 유학생들이 함께 우리말(국한문 혼용)로 작성한 뒤 각국 대사관과 언론에 배포하기 위해 영어와 일본어로도 작성했다. 이광수는 1월 31일 중국 상하이로 파견됐고, 영문본 선언서는 2월 8일 오전 각국 대사관에 뿌려졌다. 일본 외무성 자료인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에 따르면 배포된 영문본은 타자기로 친 원고였다. 선언서 분석을 맡은 진주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육필본이 미국으로 보내진 건 선언서를 타자기로 치기 전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설명했다.
3·1독립선언서도 최종 서명자가 확정되기 전 만주로 보내진 바 있다. 이명화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이광수가 자신과 긴밀한 관계였고, 당시 미국에 있던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에 미리 따로 이 육필본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광수는 당시 일본에 머물던 미국 선교사 조지 섀넌 매큔(한국명 윤산온)으로부터 소개받은 미국인 박사에게 영문본을 감수받았는데, 육필본을 쓴 이가 감수자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2·8독립선언서의 육필 원본은 이 선언서가 유일하다. 독립기념관은 등사본인 국한문 혼용본과 육필이지만 사본인 일문본 선언서를 1980년대 입수해 소장하고 있다. 영문 인쇄본은 2014년에야 ‘3·1운동의 진상과 독립선언서’라는 소책자에 실린 채 발견됐다.
이번 육필본은 미주사회에 배포된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진 연구원은 “육필본과 함께 발견된, 타자기로 친 원고와 인쇄본 등 3가지를 비교한 결과 ‘육필본→타자기로 친 원고→인쇄본’ 순으로 오탈자나 문법적 오류가 교정된 흔적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독립운동이 미주와 만주, 러시아 등 동포사회와 연대해 벌어졌다는 걸 육필본은 다시금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독립기념관은 올해 3·1절 104주년을 맞아 이번 육필본을 비롯해 그동안 국내외에서 두루 수집해온 독립선언서 원본 32점을 충남 천안시 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27일 오전 10시 반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