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成的な米不足は結局 20世紀初め, 特に 1918年の米騷動(米騷動)のような大規模民衆暴動の背景になりました.
米収入拡大: 19世紀末から日本は米不足を解決するために朝鮮を含めた海外で米を大量輸入し始めました. 特に 1890年代以後朝鮮で米輸出が急増したが, これは日本の需要によるのでした.
植民地政策につながり: 米不足問題は以後産米増殖計画のような植民地政策の核心同期になったし, 日本本土の米問題を植民地である朝鮮の犠牲で解決しようと思いました.
したがって 19世紀末の日本は米が残るどころか, 増える人口と消費欲求を満たすことができなくて米代が不安定になって社会問題になるほどに不足を経験し始めた時点でした.
만성적인 쌀 부족은 결국 20세기 초, 특히 1918년의 쌀 소동(米騷動)과 같은 대규모 민중 폭동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쌀 수입 확대: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비롯한 해외에서 쌀을 대량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90년대 이후 조선에서 쌀 수출이 급증했는데, 이는 일본의 수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식민지 정책으로 이어짐: 쌀 부족 문제는 이후 산미증식계획과 같은 식민지 정책의 핵심 동기가 되었으며, 일본 본토의 쌀 문제를 식민지인 조선의 희생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 말의 일본은 쌀이 남아돌기는커녕, 늘어나는 인구와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쌀값이 불안정해지고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부족을 겪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