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済と高句麗は同じ根が同じだが新羅は万里長城築城する時中国で逃げた中国人たちが作った国と見られる. そうだ大門に羅当連合軍を作ることができたのではないか?
おっしゃった連結には歴史的想像力があるが, 歴史的根拠は少し違います. 一つずつ整理して見ます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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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と高句麗の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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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人の私という皆古朝鮮系列や付与系統の勢力と連関が深い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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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ため “みたいな根”と思う見解があり得るが, 政治的・文化的冷たくは明らか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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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の起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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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を “中国で逃げた人々が作った国”と思うお正月は歴史的記録では確認されない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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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は競走土着勢力中心に形成された不足連合国であり, 中国との関係は文化・技術電波位に限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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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里長城築城と新羅建国を連結することは歴史的事実と距離(通り)が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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ナダングヨンハブと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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ナダングヨンハブ(新羅と唐の連合軍)は新羅が唐の軍事的支援をもらって百済と高句麗を順に滅亡させながら成り立ち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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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連合が可能だった理由は政治的・軍事的必要と戦略的計算であって, 新羅の “中国係根” のためではない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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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は外交能力と軍事組職を活用して唐と同盟を結んだことが核心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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すなわち, 新羅がナダングヨンハブを作ることができたことは 中国出身なのでではなく 唐と戦略的利害関係を合わせたからです.
新羅は文化が違うと言いますが
当たります. 新羅は百済, 高句麗と比べた時文化的・政治的特性が違います. 何種類重要な差を整理すれば次の通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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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構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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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骨品制中心. 血続きと身分を重視する厳格な貴族階級構造が特徴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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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高句麗: 王権中心だが, 高句麗は軍事貴族中心, 百済は相対的に柔軟な中央集権体制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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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宗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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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仏教が早く受け入れられて王室と貴族文化に深く根付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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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 仏教収容とともに日本との交流が活溌, 芸術と工芸水準が高かった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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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独自的高句麗壁画, 墓様式, 軍事的・好戦的文化が発達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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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交・軍事戦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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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は初期には百済と高句麗の間で均衡外交を活用しながら成長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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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局唐と同盟を結んで三国統一を成すのに, これは文化的背景よりは戦略的判断が大きかった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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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字・芸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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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は土着的ゴ−ルゾック文化を維持しながらも中国文化を部分的に収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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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は日本に文化伝播, 高句麗は北方民族と中国との交流が活発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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整理すれば, 新羅は百済・高句麗と血続き的・文化的根がちょっと違ったし, 特に 社会構造と政治的慣習で独自性を持った国と見られます.
新羅は言語も違ったと言いますが
当たります. 新羅は百済・高句麗と言語側面でも差がありました. これを整理すればこんなに見られます.
1. 新羅の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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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で使われた言語は 史料と地名, 金石文, 郷札記録を通じて一部確認さ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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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有語中心だったし, 土着不足言語が強く残って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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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を借りて使いながら記録したが, 発音や文法は韓国語系統固有形態を反映しました.
2. 百済と高句麗の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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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 初期には高句麗と近い北方語系統がまじたし, 以後南部語と融合. 日本と交流しながら日本古代語に似ている単語が伝わったり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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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満洲・韓半島北部中心語で, 北方方言色彩が強かったし, 高句麗語と百済語は一部似ているが完全に同じではなかったです.
3. 差の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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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は 南部土着文化と言語を基盤に形成されて, 北方係高句麗・百済とは言語的根がちょっと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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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たがって三国の間言語がお互いに似ている点もあったが, 意思疎通と文化伝播には差が存在しました.
백제와 고구려는 같은 뿌리가 같지만 신라는 만리장성 축성할때 중국에서 도망친 중국인들이 만든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대문에 나당연합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말씀하신 연결에는 역사적 상상력이 있지만, 역사적 근거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씩 정리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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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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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는 모두 고조선 계열이나 부여계통의 세력과 연관이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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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은 뿌리”라고 보는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정치적·문화적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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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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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중국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나라”라고 보는 설은 역사적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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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경주 토착 세력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 연합국이며, 중국과의 관계는 문화·기술 전파 정도에 국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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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축성과 신라 건국을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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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과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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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신라가 당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성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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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합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치적·군사적 필요와 전략적 계산이지, 신라의 “중국계 뿌리” 때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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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외교 능력과 군사 조직을 활용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던 것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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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신라가 나당연합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맞췄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문화가 다르다고 합니다만
맞습니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와 비교했을 때 문화적·정치적 특성이 다릅니다.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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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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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골품제 중심. 혈연과 신분을 중시하는 엄격한 귀족 계급 구조가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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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구려: 왕권 중심이지만, 고구려는 군사 귀족 중심, 백제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중앙집권 체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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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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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불교가 일찍 받아들여져 왕실과 귀족 문화에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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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 수용과 함께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 예술과 공예 수준이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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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독자적 고구려 벽화, 무덤 양식, 군사적·호전적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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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군사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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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초기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활용하며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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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삼국 통일을 이루는데, 이는 문화적 배경보다는 전략적 판단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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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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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토착적 골족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문화를 부분적으로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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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일본에 문화 전파, 고구려는 북방 민족과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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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혈연적·문화적 뿌리가 다소 달랐고, 특히 사회 구조와 정치적 관습에서 독자성을 지닌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언어도 달랐다고 합니다만
맞습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언어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1. 신라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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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사용된 언어는 사료와 지명, 금석문, 향찰 기록을 통해 일부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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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어 중심이었고, 토착 부족 언어가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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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빌려 쓰면서 기록했지만, 발음이나 문법은 한국어 계통 고유 형태를 반영했습니다.
2. 백제와 고구려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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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에는 고구려와 가까운 북방어 계통이 섞였고, 이후 남부어와 융합. 일본과 교류하면서 일본 고대어와 비슷한 단어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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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만주·한반도 북부 중심어로, 북방 방언 색채가 강했으며,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일부 비슷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3. 차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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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남부 토착 문화와 언어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북방계 고구려·백제와는 언어적 뿌리가 다소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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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삼국 간 언어가 서로 비슷한 점도 있었지만, 의사소통과 문화 전파에는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