要約から言えば そうだ, 相当部分意図的に縮小・歪曲しようとする試みがあったと見ることが現在韓国・国際学界の一般的な評価です. ただ すべての日本歴史学者が等しくそうだったのではなくて, 学問的研究と植民地統治論理が 構造的に結合になったという点が核心です.
どうして高句麗歴史を縮小しようと思ったのか?
1 植民地支配の正当化
日帝は韓半島支配を合理化するため
“朝鮮は自主的国家を維持する能力がなかった”
増えた論理を作る必要がありました.
ところが 高句麗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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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強い軍事国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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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王朝と対等・優位で戦った国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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満洲まで含んだ広大な領土を支配した国家
だっただから, これをそのまま認めれば
朝鮮は自ら国家を運営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は論理が崩れます.
それで高句麗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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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の辺方政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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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るいは韓半島歴史で “主類ではない周辺国家”
のように 意図的に格下げしました.
2 ‘韓半島はいつも弱かった’は敍事作り
日帝植民史観の核心構造は次の通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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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 中国・日本に依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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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 内部分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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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 自力近代化失敗 → 日本が代わりに近代化
が構造に 高句麗みたいな強大国はあまり障る存在だ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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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の中で新羅中心敍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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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は “ちょっと強かっただけ持続性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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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との連続性も断絶
同じ方式で縮まりました.
3 万株支配論理とも連結
高句麗は 満洲地域の正統支配者だったが,
これを認めれば日本が満洲を占める名分が弱くなります.
そのた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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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を “中国係” あるいは “地域政権”で処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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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民族の歴史的活動舞台を韓半島で閉じこめ
朝鮮は大陸的歴史主体ではないという認識を植えようと思いました.
実際に使われた方法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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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料選択的使用
→ 日本に不利な記録は “課長” または “信頼不足” 処理 -
領土縮小指導製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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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科書で高句麗比重最小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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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渤海高麗の歴史的連続性不正
これは 個別学者の逸脱というより, 総督府・朝鮮史編修会中心の体系的作業でした.
それなら日本学者全部がそうだった?
いい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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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権力と距離を置いた一部学者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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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の国家性を認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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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中心士官を批判したり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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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 権力・資金・教科書影響力は植民史観の方が圧倒的だったし,
その結果が解放後まで残りました.
現在学界の共通された評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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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時期高句麗縮小は 学問科権力の結合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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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的目的が歴史解釈に介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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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で今日韓国・中国・西欧学界は
高句麗を明白な古代東アジアの強大国家で見ます.
1行整理
日帝時代日本歴史学界は高句麗の強大性と主体性を認めれば植民地支配論理が崩れるから, 体系的に縮小・歪曲しようと思った.
요약부터 말하면 그렇다, 상당 부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재 한국·국제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다만 모든 일본 역사학자가 동일하게 그랬던 것은 아니고, 학문적 연구와 식민지 통치 논리가 구조적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왜 고구려 역사를 축소하려 했는가?
1️⃣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
일제는 한반도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은 자주적 국가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는 논리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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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군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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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조와 대등·우위로 싸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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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까지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국가
였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인정하면
👉 조선은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었다는 논리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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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변방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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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한반도 역사에서 “주류가 아닌 주변 국가”
처럼 의도적으로 격하했습니다.
2️⃣ ‘한반도는 항상 약했다’는 서사 만들기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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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일본에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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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내부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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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자력 근대화 실패 → 일본이 대신 근대화
이 구조에 고구려 같은 강대국은 너무 거슬리는 존재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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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신라 중심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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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잠깐 강했을 뿐 지속성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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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의 연속성도 단절
같은 방식으로 축소되었습니다.
3️⃣ 만주 지배 논리와도 연결
고구려는 만주 지역의 정통 지배자였는데,
이를 인정하면 일본이 만주를 차지할 명분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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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중국계” 혹은 “지역 정권”으로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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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족의 역사적 활동 무대를 한반도로 가둠
👉 조선은 대륙적 역사 주체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습니다.
실제로 사용된 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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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 선택적 사용
→ 일본에 불리한 기록은 “과장” 또는 “신뢰 부족” 처리 -
📐 영토 축소 지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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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서 고구려 비중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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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적 연속성 부정
이것은 개별 학자의 일탈이라기보다, 총독부·조선사편수회 중심의 체계적 작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학자 전부가 그랬나?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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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권력과 거리를 둔 일부 학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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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국가성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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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심 사관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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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권력·자금·교과서 영향력은 식민사관 쪽이 압도적이었고,
그 결과가 해방 후까지 남았습니다.
현재 학계의 공통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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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기 고구려 축소는 학문과 권력의 결합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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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목적이 역사 해석에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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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날 한국·중국·서구 학계는
👉 고구려를 명백한 고대 동아시아의 강대 국가로 봅니다.
한 줄 정리
일제시대 일본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강대성과 주체성을 인정하면 식민지 지배 논리가 무너지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축소·왜곡하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