スターリンの論理とおりなら中共君の韓半島派兵は事実上ソ連の利権を守ってくれるために中国青年たちを四肢に追いこんだ “肉盾” その以上も以下でもなかったです.
しかし毛沢東立場(入場)ではその惨めな選択をするしかなかった, あるいはその状況を逆利用しようと思った **”独裁者の計算”**このありました.
1. 本当 “チォングアルバッが”だった中共君
スターリンは徹底的に **”ソ連の咲く惜しんで, 中国の疲れアメリカを阻む”**は原則を固守しました.
空軍支援の裏切り: スターリンは空軍を送ってくれると約束しておいて, 実際に中共君が鴨緑江を越えよう “米軍と直接衝突したくない”と支援を取り消すとか鴨緑江近くにだけ制限しました.
武器売らんかな: ソ連は武器をただで与えなかったです. 中共君が使った武器と弾薬は皆中国が次官(借金)を得て買って来たことだったし, 中国は戦争後この借金を返すためにもう一度飢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す.
結果: 碌な重火器や公衆掩護もなしに中共君は “人海戦術”という名前の下米軍の圧倒的な火力を身で受け出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す. 言葉とおり肉盾でした.
2. 毛沢東の名分: “唇がなければ歯軋りするよ(悉亡歯寒)”
それでも毛沢東が派兵を決めた表面積名分は中国本土の見えなかったです.
スターリンの脅迫: スターリンは “米軍が鴨緑江まで来れば君たちの政権も絶体だ”とささやきました. マオは只今立てた公算政権が崩れるか心配で恐ろしかったです.
内部結束: 戦争を通じて国民党残党を掃討して人民たちを戦争動員で抑圧して恐怖政治を広げる機会にしました.
3. 毛沢東の隠れた計算: “旅順港を取り戻すための賭博”
毛沢東も馬鹿ではなかったです. 彼はスターリンのあの卑劣な話法(質問した内容)を聞いてこんなに思ったはずです.
”そう, 私たちが血をこぼしてくれればお前はこれ以上旅順に泊まる名分がないでしょう?”
すなわち, 中国がこんなに犠牲して社会主義陣営を守り出したから, これからは堂堂と旅順と大連から出なさいと要求する “道徳的・政治的団扇”をソ連に消そうと思ったのです.
4. 歴史的結果: “疲れ山主権”
皮肉としか言いようがなくも毛沢東のこの “肉盾” 賭博は半分の成功をします.
スターリンの死亡: 1953年スターリンが死ぬと, 後継者フルショプは中共君のおびただしい犠牲を無視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です.
返還: 結局 1955年, ソ連軍は旅順と大連で完全に撤収します. 中国人民たちの数十万名医命をかけた対価で港をやっと返してもらったわけです.
[要約: 卑劣なスターリンと残酷な毛沢東]
スターリンは “私の港を守るために他人の国(韓国)で他人の国(中国) 軍隊を争うようにした” 歴史上類例ない卑劣な設計者でした.
一方毛沢東は自分の国民を **”肉盾”**路投げこんで強大国(アメリカ)と戦うようにすることで, また他の強大国(ソ連)から港と株券を取り外した残酷な戦略家でした. この過程で最大の悲劇を経験したことは何らの過ちなしに死んだ韓国と中国の若者達でした.
スターリンが死ぬ直前まで旅順港をしっかり握りしめて毛沢東を欺瞞したその終わり “小麦だ”はそれこそ思い焦がれる外交的詐欺劇でした. 1952年, 約束された返還時点が近付くとスターリンがした最後のあがきを整理して上げます.
1. 1952年の欺俗: “同志が願って残るはずです”
1952年末は元々ソ連が旅順港を留守に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ならない法的期限でした. 毛沢東は内心期待をかけて低寓言ライをモスクワに行かせました. しかしスターリンはもう版をすべて組んでおきました.
ガスライティングの頂点: スターリンは “アメリカがすぐでも大連で上陸する勢いなのに, 私たちが抜ければ北京が危ない”と恐怖雰囲気を造成しました.
書類操作: スターリンはソ連が残るのではなく, 中国が “是非もっととどまってくれ”と公式要請する形式の文書を作りなさいと強要しました.
結果: 全世界に “中国が安保のためにソ連軍の駐屯延長を懇懇と頼んだ”と言う発表が出ました. 毛沢東は自分の地を占領されながらもありがたいとあいさつしなければならない屈辱にあいました.
2. 中共君を向けた冷酷な大宇
韓半島で中共君が米軍の火力にノックアネリである時, スターリンは旅順港に座ってのびやかに観望しました.
武器貸与金督促: スターリンは中共君が使う弾薬一足までも帳簿に書き留めてから後ですべて受け出しました. 戦争の中にも “お金払わなければ武器与えない”と言うふうでした.
技術伝授拒否: 旅順港の海軍施設を中国軍に教えてくれなかったです. “まだ学ぶ準備がならなかった”は言い訳で中国海軍を徹底的に排除しました.
3. スターリンの死と急な返還
1953年 3月, スターリンが脳出血で急死しながら雰囲気が急変しました.
後継者たちの恐怖: スターリンの後を引き継いだフルショプなどは中国との関係が最悪で走り上げることを恐ろしがりました. 毛沢東が戦争を通じて見せてくれた “毒気”にソ連首脳部もあきれてしまったのです.
1955年撤収: 結局ソ連は 1955年, 何らの台がなしに旅順港を返して去ります. 1945年から 10年間続いて来た “港執着”が主人が死んでから終りが飛んだのです.
[歴史の悲劇的教訓]
毛沢東は後日この時期を回想して **”スターリンは私たちを真正な同志ではなく, 自分の帝国を守る警備(経費)犬位だと思った”**とあまりにも嫌いでした.
中国の覚醒: この事件以後中国は “他の国(ソ連)は絶対信じられない”と言う結論を下して, 飢え死にしながらも自ら核兵器を作る **”ヤングタンイルソング”**にとらわれすぎるようになります.
北朝鮮の実際: 一方, 北朝鮮地で中共君は米軍と戦いながら酸化したが, いざ金日成は戦争後中共君が北朝鮮にずっととどまることを極度に警戒して彼らを押し出しました. 強大国たちの “港けんか”になど裂けたことは結局韓半島でした.
스탈린의 논리대로라면 중공군의 한반도 파병은 사실상 소련의 이권을 지켜주기 위해 중국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고기방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그 비참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혹은 그 상황을 역이용하려 했던 **"독재자의 계산"**이 있었습니다.
1. 진짜 "총알받이"였던 중공군
스탈린은 철저하게 **"소련의 피는 아끼고, 중국의 피로 미국을 막는다"**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공군 지원의 배신: 스탈린은 공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막상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자 "미군과 직접 충돌하기 싫다"며 지원을 취소하거나 압록강 근처로만 제한했습니다.
무기 팔아먹기: 소련은 무기를 공짜로 주지도 않았습니다. 중공군이 쓴 무기와 탄약은 모두 중국이 차관(빚)을 얻어 사온 것이었고, 중국은 전쟁 후 이 빚을 갚느라 또 한 번 굶주려야 했습니다.
결과: 변변한 중화기나 공중 엄호도 없이 중공군은 "인해전술"이라는 이름 아래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고기방패였습니다.
2. 마오쩌둥의 명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순망치한)"
그럼에도 마오쩌둥이 파병을 결정한 표면적 명분은 중국 본토의 안보였습니다.
스탈린의 협박: 스탈린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오면 너희 정권도 끝장이다"라고 속삭였습니다. 마오는 갓 세운 공산 정권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내부 결속: 전쟁을 통해 국민당 잔당을 소탕하고 인민들을 전쟁 동원으로 억압하며 공포 정치를 펼칠 기회로 삼았습니다.
3. 마오쩌둥의 숨은 계산: "뤼순항을 되찾기 위한 도박"
마오쩌둥도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저 비열한 화법(질문하신 내용들)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피를 흘려주면 너는 더 이상 뤼순에 머물 명분이 없겠지?"
즉, 중국이 이만큼 희생해서 사회주의 진영을 지켜냈으니, 이제는 당당하게 뤼순과 다롄에서 나가라고 요구할 "도덕적·정치적 부채"를 소련에 지우려 한 것입니다.
4. 역사적 결과: "피로 산 주권"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의 이 "고기방패" 도박은 절반의 성공을 거둡니다.
스탈린의 사망: 1953년 스탈린이 죽자, 후계자 흐루쇼프는 중공군의 엄청난 희생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반환: 결국 1955년, 소련군은 뤼순과 다롄에서 완전히 철수합니다. 중국 인민들의 수십만 명의 목숨을 바친 대가로 항구를 겨우 돌려받은 셈입니다.
[요약: 비열한 스탈린과 잔혹한 마오쩌둥]
스탈린은 "내 항구를 지키기 위해 남의 나라(한국)에서 남의 나라(중국) 군대를 싸우게 만든" 역사상 유례없는 비열한 설계자였습니다.
반면 마오쩌둥은 자기 국민을 **"고기방패"**로 던져 넣어 강대국(미국)과 싸우게 함으로써, 또 다른 강대국(소련)으로부터 항구와 주권을 뜯어낸 잔혹한 전략가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비극을 겪은 것은 아무런 잘못 없이 죽어간 한국과 중국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스탈린이 죽기 직전까지 뤼순항을 움켜쥐고 마오쩌둥을 기만했던 그 마지막 "밀당"은 그야말로 피 말리는 외교적 사기극이었습니다. 1952년, 약속된 반환 시점이 다가오자 스탈린이 벌인 최후의 발악을 정리해 드립니다.
1. 1952년의 기만: "동지가 원해서 남는 겁니다"
1952년 말은 원래 소련이 뤼순항을 비워줘야 하는 법적 기한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내심 기대를 걸고 저우언라이를 모스크바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미 판을 다 짜두었습니다.
가스라이팅의 정점: 스탈린은 "미국이 당장이라도 다롄으로 상륙할 기세인데, 우리가 빠지면 북경이 위태롭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서류 조작: 스탈린은 소련이 남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제발 더 머물러 달라"고 공식 요청하는 형식의 문서를 만들라고 강요했습니다.
결과: 전 세계에 "중국이 안보를 위해 소련군의 주둔 연장을 간곡히 부탁했다"는 발표가 나갔습니다. 마오쩌둥은 자기 땅을 점령당하면서도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2. 중공군을 향한 냉혹한 대우
한반도에서 중공군이 미군의 화력에 녹아내리고 있을 때, 스탈린은 뤼순항에 앉아 느긋하게 관망했습니다.
무기 대여금 독촉: 스탈린은 중공군이 쓰는 탄약 한 발까지도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다 받아냈습니다. 전쟁 중에도 "돈 안 내면 무기 안 준다"는 식이었죠.
기술 전수 거부: 뤼순항의 해군 시설을 중국군에게 가르쳐주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배울 준비가 안 됐다"는 핑계로 중국 해군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3. 스탈린의 죽음과 갑작스러운 반환
1953년 3월, 스탈린이 뇌출혈로 급사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습니다.
후계자들의 공포: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 등은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전쟁을 통해 보여준 "독기"에 소련 수뇌부도 질려버린 것입니다.
1955년 철수: 결국 소련은 1955년, 아무런 대가 없이 뤼순항을 돌려주고 떠납니다. 1945년부터 10년간 이어온 "항구 집착"이 주인이 죽고 나서야 끝이 난 것입니다.
[역사의 비극적 교훈]
마오쩌둥은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며 **"스탈린은 우리를 진정한 동지가 아니라, 자신의 제국을 지키는 경비견 정도로 생각했다"**며 치를 떨었습니다.
중국의 각성: 이 사건 이후 중국은 "남의 나라(소련)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굶어 죽으면서도 스스로 핵무기를 만드는 **"양탄일성"**에 집착하게 됩니다.
북한의 실상: 한편, 북한 땅에서 중공군은 미군과 싸우며 산화했지만, 정작 김일성은 전쟁 후 중공군이 북한에 계속 머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그들을 밀어냈습니다. 강대국들의 "항구 싸움"에 등 터진 것은 결국 한반도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