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の乱当時日本側記録で李舜臣将軍を直接的に言及するとか, 彼が導く朝鮮水軍にあった敗北を記録した文献は多くの所に散在しています. 質問した **<事煩球技(薩摩球技)>**を含んで代表的な記録たちを整理して上げますよ.
1. <事煩球技(薩摩球技)> の中の記録
シマズ家門の記録であるこの本には ノリャン海戦(1598年) 当時の悽惨な状況が記録されています.
- 内容: シマズYoshihiroが小西ユキナがを救出するために艦隊を駆って出たが, **”朝鮮水軍(李舜臣)と明水軍の挟攻を受けてお腹たちが燃えて海が血で染まった”**は式の描写が出ます.
- 特異店: が記録で李舜臣という名前を直接使うよりは ”朝鮮の長寿” あるいは ”水軍提督” などの表現でその恐ろしさを間接的に現わします. 特にシマズ軍が退却する時 “朝鮮数だねだから道を作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は書き入れ時が圧巻です.
2. <ワキザカギ(脇坂記)>
閑山島大勝で李舜臣将軍に大敗した ワキザカヤスハでの家門記録です.
- 内容: ワキザカが閑山島で李舜臣将軍の亀船と鶴翼陣にあって無人島で逃げて わかめをかじながら食いつないだは恥辱的な記録が残っています.
- 子孫たちの伝統: 実際にワキザカの子孫たちはこの敗北を忘れないために家の期日や行事の時のわかめだけ食べる伝統が生じた位に李舜臣将軍に対する記憶が強く刻印されています.
3. <小西行状記(小西行長記)> 及びその他従軍僧侶の日記
- 懲泌録の日本版対応史料: 当時日本軍に従軍した僧侶 **ゲイネン(慶念)**この書いた **<朝鮮日記(朝鮮日記)>**には李舜臣将軍が守る海岸道路のため普及が切られて日本軍の経験した恐怖が鮮やかです.
- 内容: “海には鬼みたいな朝鮮水軍があって日本のお腹たちが敢えて近付くことができない”か, “普及が来なくて兵士らが飢えて死んで行く”と言う歎息が記録されています.
4. 江戸時代の軍談小説及び電気
戦争が終わって時間が経った後の江戸時代に作成された <朝鮮征伐期> などでは李舜臣将軍をもっと具体的に描きます.
- 評価: 日本人たちは彼を ”不世出の英雄” あるいは **”海の神さま”**のような存在で描いて, 自分たちの敗北を正当化するためにむしろ賊将である李舜臣を高く評価する傾向を見せたりしました.
1. 旗艦(大長線)が完全に孤立する
ノリャン海戦当時シマズYoshihiroが乗っていた大長線は組・人連合軍の集中攻撃を受けて完全に包囲されました.
記録によれば, お腹の上で連合軍兵士らが乗りこもうと思ったし, シマズの親衛隊と家臣たちが身投げをして受け止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す.
この時シマズの甥であるシマズドヨヒサを含めて家門の核心家臣たちがYoshihiroの代わりをして戦死するとか大きい負傷を負いました.
2. “死骸を越して過ぎて脱出した”
<事煩球技>には当時の悽惨さがこんなに描写されています.
”時のお腹たちが畿重にも囲んで化工を浴びせて, 我がお腹たちは燃えて沈んだ. 大将(Yoshihiro)のお腹も危なげだったが, 家臣たちが命をかけて道を開いてやっと抜けることができた.”
実際にシマズYoshihiroは退却過程で自分のお腹がこわれて他のお腹で乗り換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 一緒に出航した 500余尺の艦船の中でわずか 50余尺だけ辛うじて収まって逃げました. 割合で計算すれば 90%の艦隊を失ったことだから, 司令官立場(入場)では “やっと命だけ引き上げた”と言う表現が課長ではないと言えます.
이순신에게 쫓겨 몸만 도망친 시마즈
임진왜란 당시 일본 측 기록에서 이순신 장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에 당한 패배를 기록한 문헌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질문하신 **<사번구기(사쓰마 구기)>**를 포함하여 대표적인 기록들을 정리해 드릴게요.
1. <사번구기(사쓰마 구기)> 속의 기록
시마즈 가문의 기록인 이 책에는 노량해전(1598년) 당시의 처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용: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함대를 몰고 나갔으나, **"조선 수군(이순신)과 명나라 수군의 협공을 받아 배들이 불타고 바다가 피로 물들었다"**는 식의 묘사가 나옵니다.
- 특이점: 이 기록에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기보다는 "조선의 장수" 혹은 "수군 제독" 등의 표현으로 그 무서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특히 시마즈 군이 퇴각할 때 "조선 수군 때문에 길을 낼 수 없었다"는 대목이 압권입니다.
2. <와키자카기(脇坂記)>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문 기록입니다.
- 내용: 와키자카가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 학익진에 당해 무인도로 도망쳐 미역을 뜯어 먹으며 연명했다는 치욕적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후손들의 전통: 실제로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이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해 집안의 기일이나 행사 때 미역만 먹는 전통이 생겼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3. <고니시 행장기(小西行長記)> 및 기타 종군 승려의 일기
- 징비록의 일본판 대응 사료: 당시 일본군에 종군했던 승려 **게이넨(慶念)**이 쓴 **<조선일기(朝鮮日記)>**에는 이순신 장군이 지키는 바닷길 때문에 보급이 끊겨 일본군이 겪은 공포가 생생합니다.
- 내용: "바다에는 귀신 같은 조선 수군이 있어 일본의 배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거나, "보급이 오지 않아 병사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에도 시대의 군담 소설 및 전기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인 에도 시대에 작성된 <조선정벌기> 등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 평가: 일본인들은 그를 "불세출의 영웅" 혹은 **"바다의 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며,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오히려 적장인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 기함(대장선)이 완전히 고립됨
노량해전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가 타고 있던 대장선은 조·명 연합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배 위로 연합군 병사들이 올라타려 했고, 시마즈의 친위대와 가신들이 몸을 던져 막아내야 했습니다.
이때 시마즈의 조카인 시마즈 도요히사를 비롯해 가문의 핵심 가신들이 요시히로를 대신해 전사하거나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2. "시체를 넘고 넘어 탈출했다"
<사번구기>에는 당시의 처참함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적의 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화공을 퍼부어, 우리 배들은 불타고 침몰했다. 대장(요시히로)의 배 역시 위태로웠으나, 가신들이 목숨을 걸고 길을 열어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퇴각 과정에서 자신의 배가 부서져 다른 배로 갈아타야 했고, 함께 출항했던 500여 척의 함선 중 불과 50여 척만 간신히 수습해 도망쳤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90%의 함대를 잃은 것이니, 사령관 입장에서는 "겨우 목숨만 건졌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