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通信社一行が日本を訪問した時残した記録たちを見れば, 当時日本女性たちの複式や風習に対して生硬さを感じたところがよく登場します.
質問した “胸を現わす行動”と係わって通信社らの記録に現われた主要観点は次の通りです.
1. 風俗の差と記録
朝鮮後期通信社だった申維翰の “ヘユロック(海遊録)”や他のサヘングロックドルを見れば, 日本女性たちが胸の一部を現わすとか授乳を選り分けないでする姿, あるいは暑い気候に身なりを軽くすることを報告 **”風俗が怪異だ”**かけるが **”恥が分からない”**は式で描いた記録があります. これは儒教的貞節と衣服礼節を重視した朝鮮知識人たちに相当な文化衝撃だったからです.
2. 複式構造の誤解
当時日本の庶民女性たちは着物のアブソブが起りやすい構造だったし, 労動をするとか子供に濡れる食べさせる時これを大きくなるように気に止めない文化がありました. 朝鮮通信社らはこれを見て日本の道徳的な緩みと批判的な視覚で記録したりしたが, これは事実 文化的相対性から来る視覚差でした.
3. 朝鮮の状況と比較
おもしろい点は当時朝鮮でも庶民層女性たちが子供を生んだ印で胸の一部を現わすチョゴリを着る風習があったという事実です. しかし通信社らはたいてい厳格な儒教価値観を持った士大夫階級だったので, 他国の不慣れな風習を接した時もっと厳格な松の実どおりこれを記録に残した傾向があります.
”当時通信社らは日本のこのような姿を見て “男女の区別がなくて礼法が立たなかった”と評して朝鮮の礼法と対比したりしました.”
朝鮮通信使が見るには未開なことだったですね
当時朝鮮通信社らの視覚で見ようとするとそのように見えた可能性が非常に高いです. しかしこれを立体的に理解するためには当時の 文化的背景をよく見る必要があります.
1. “例(礼)”を基準に一判断
朝鮮士大夫たちに衣服は単純な服ではなく 人の道理と同時に礼儀 そのものでした. 身体を厳格に選り分けることを常識で思った彼らに, 胸を露出するとか男女が一緒に風呂に入る日本の風俗は “人倫がない未開な状態”で照らされました. 実際に記録を見れば “禽獣(けだもの)と違うところない”と言うふうの過激な表現が登場したりします.
2. 文化的自負心 (貴重化意識)
朝鮮は自らを儒教的道徳国家と自慢したから, その基準から脱した日本の風習を低く評価して自分たちの文化的優越感を確認しようと思いました. すなわち, “未開”という評価は **”私たちはこのように礼儀が正しい”**という自負心の反対給付だったわけです.
3. 実際の差
実は日本の立場(入場)で見ればそれはミゲハムよりは 実用性と関連が深かったです.
高温多湿した気候: 暑くてじめじめする天気のため通風が重要でした.
庶民の労動: バッイルをするとか子供の面倒を見る庶民たちには厳格な礼服よりは動きやすい身なりが優先でした.
”結局通信社らが感じた未開さは絶対的な基準というより, 性理学というフレームで世の中を眺めた朝鮮知識人たちが経験した **文化衝撃(Culture Shock)**の産物だと見ることがもっと適切です.”
조선시대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남긴 기록들을 보면, 당시 일본 여성들의 복식이나 풍습에 대해 생경함을 느꼈던 대목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질문하신 "가슴을 드러내는 행동"과 관련하여 통신사들의 기록에 나타난 주요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풍속의 차이와 기록
조선 후기 통신사였던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이나 다른 사행록들을 보면, 일본 여성들이 가슴의 일부를 드러내거나 수유를 가리지 않고 하는 모습, 혹은 더운 날씨에 옷차림을 가볍게 하는 것을 보고 **"풍속이 괴이하다"**거나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식으로 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유교적 정절과 의복 예절을 중시하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문화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2. 복식 구조의 오해
당시 일본의 서민 여성들은 기모노의 앞섶이 벌어지기 쉬운 구조였고, 노동을 하거나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이를 크게 개의치 않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조선 통신사들은 이를 보고 일본의 도덕적 해이라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기록하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 문화적 상대성에서 오는 시각 차이였습니다.
3. 조선의 상황과 비교
흥미로운 점은 당시 조선에서도 서민층 여성들이 아이를 낳은 증표로 가슴의 일부를 드러내는 저고리를 입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통신사들은 대개 엄격한 유교 가치관을 가진 사대부 계급이었으므로, 타국의 낯선 풍습을 접했을 때 더욱 엄격한 잣대로 이를 기록에 남긴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 통신사들은 일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남녀의 구별이 없고 예법이 서지 않았다"고 평하며 조선의 예법과 대비시키곤 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보기에는 미개한 것이었군요
당시 조선 통신사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禮)"를 기준으로 한 판단
조선 사대부들에게 의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이자 예의 그 자체였습니다. 신체를 엄격히 가리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가슴을 노출하거나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일본의 풍속은 "인륜이 없는 미개한 상태"로 비춰졌습니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금수(짐승)와 다를 바 없다"는 식의 과격한 표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2. 문화적 자부심 (소중화 의식)
조선은 스스로를 유교적 도덕 국가라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 기준에서 벗어난 일본의 풍습을 낮게 평가하며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즉, "미개함"이라는 평가는 **"우리는 이토록 예의가 바르다"**라는 자부심의 반대 급부였던 셈입니다.
3. 실상의 차이
사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미개함보다는 실용성과 관련이 깊었습니다.
고온다습한 기후: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통풍이 중요했습니다.
서민의 노동: 밭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는 서민들에게는 엄격한 예복보다는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이 우선이었습니다.
"결국 통신사들이 느꼈던 미개함은 절대적인 기준이라기보다, 성리학이라는 틀로 세상을 바라보던 조선 지식인들이 겪은 **문화 충격(Culture Shock)**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